영화 속의 색채: 붉은 수수밭

‌글: 김순옥 (예술학 박사, 한국미술진흥원 원장)

‌붉은 수수밭

줄거리
1930년대 반 일본투쟁 기간동안 북 중국의 황량한 벌판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이다.
한 젊은 신부 쥬얼(공리)이 사람 키보다 크게 자란 붉은 수수밭을 지나게 된다. 그녀는 노새 한 마리에 50세의 나병환자에게 팔린 것이다. 갑자기 수수밭에서 튀어나온 노상강도가 그녀를 납치하려 하지만, 한 가마 운전수인 위잔아오(장웬)가 그녀를 구해낸다. 하지만 3일후 중국 풍습에 따라 그녀의 가족에게 되돌아가고자 수수밭을 지날 때, 그는 그녀를 붙잡는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는다. 그 나병환자는 의문사를 당하게 되고 위잔아오와 쥬얼은 그의 양조장을 인수한다. 둘은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는다. 그들의 평화는 일본군의 침략으로 깨어지고 만다. 수수밭에서 일을 하던 그녀는 일본군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는다. 식사를 들고 달려오던 남편과 아이는 할말을 잃고, 시체 앞에서 울기만 한다. 아이가 엄마의 넋을 달래는 노래를 부르며 영화는 Ending자막이 올라간다.
이 영화는 베이징영화학교를 졸업하고 ‘장예모’가 처음 만든 1988년 작품인데, 그해에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였다. 원래 ‘모엔’이 쓴 같은 제목의 소설을 각색한 것이다.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장예모감독과 ‘공리’라는 배우를 처음으로 소개시켜준 영화였다.




붉은 색
붉은 색은 선명한 카르메신 빨강에서부터 불투명한 카드뮴 빨강까지 색의 농도에 따라 육안으로 구분이 가능한 약105가지의 종류로 나누어진다. 언뜻 보기에는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화가들은 커다란 차이를 느낀다.
붉은 색의 연상 작용은 정열, 에네르기, 위험, 혁명, 폭발, 과격, 흥분, 투쟁, 감동, 거절, 사랑, 열광, 연소, 생명, 광기, 정지, 결혼, 격동, 무더위, 격정, 절교, 죽음 등이 있다.
태초에 붉은 색은 태양의 빛을 상징했다. 어둠에서 세상을 해방시켜 주는 것은 동녘에서 밝게 떠오르는 불을 상징하는 듯한 빨강이었고 괴테는 빨강을 색의 제왕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붉은 색은 동시에 죽음을 의미한다. 독립투사들이 거사에 앞서 단지의 글씨로 굳은 의지를 나타낸다. 노동자들이 파업때 붉은 띠를 머리에 두르는 것도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겠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호적에 빨간 줄이 그어지고, 사형 판결을 내리는 법관은 빨간 잉크로 서명한다. 영화 속에서 붉은 색도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을 암시하였다.
금세기초 미모와 정열적인 춤으로 일세를 풍미한 여성 중에 한사람이 이사도라 던컨(1877-1927)이다. 그녀는 정열적이고 연애편력도 다채로웠는데 가장 좋아하는 색이 빨강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사도라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빨간 숄을 몸에 두르고 춤을 추어 미국의 참전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그녀가 러시아 시인 에세닝과 결혼하고 여전히 빨강색 숄을 두르고 춤을 추어 미국사회에서는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불행하게도 그녀의 남편이 자살한 후 유럽을 전전하며 춤을 추다 1972년 니즈의 한 레이서로부터 드라이브의 유혹을 받는다. 그때 분신처럼 애용하던 빨간 숄을 목에 감고 있었는데, 그 숄 끝이 차바퀴에 늘어져 있는 것을 모르는 채 차가 출발, 숄이 목을 조이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죽고 말았다.
생명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 그리고 그 파생물들을 서로 연합하기도 하고 분열시키기도 하고 중화시키기도 하는 유혹의 색 빨강이 자유 분망한 그녀를 사상의 굴레에서는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레드 콤플렉스(red complex)라는 말이 있다. 공산주의에 대한 과민반응을 일컫는 말이다. 학자들은 레드 콤플렉스를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과장되고 왜곡된 공포심과 그 공포심을 근거로 한 무자비한 인권탄압을 정당화 하거나 용인하는 사회적 심리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레드콤플렉스가 국민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은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였다. 전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들은 끔찍한 전쟁을 기억하고 그 후 철저한 반공 교육을 통해 이 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월드컵을 시작으로 레드 신드롬이 시작되었다. 붉은 악마의 응원 붐으로 과거 터부시 되어 왔던 붉은색의 금기를 깨는 계기가 되었다. 붉은 악마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까지만 해도 한반도의 남쪽에서 공산주의의 상징이라 하여 금기시 되었던 색인 붉은 색을 과감히 채택하여 오랜 편견과 터부를 부수는 역할을 하였다. 붉은 악마라는 이름은 교회조직으로부터 기독교의 적인 악마를 연상케 한다 하여 월드컵 전부터 이름을 바꾸라는 압력을 기도했지만 응원 물결 속에 붉은 색은 열정과 활력을 상징하는 컬러가 되고 R-Generation이라는 문화코드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영화 ‘붉은 수수밭’은 일본군들이 아무리 밟고 베어도 계속 자라는 수수를 통해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중국인들의 끈질긴 민족성을 강하게 나타내었다.
영화의 제목에서 말해주듯이 붉은 수수밭은 붉은 색이 주조가 되는 중국 특유의 원색적인 대륙 성향이 풍경 속에서 잘 표현 되었다.
서민의 낭만보다는 일본의 압제에 투쟁하던 피지배민족의 삶과 열정을 그린 영화로서 암울했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모진 세월을 헤쳐나간 한 여인의 삶과 억누르면 폭발하는 인간의 원초적 생명력을 붉게 물들인 화면으로 선명하게 분출하여 중국전통음악과 대사의 절제가 작품을 돋보이게 한 수준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