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색체: 언 페이스풀

‌글: 김순옥 (예술학 박사, 한국미술진흥원 원장)

줄거리
결혼 10년째를 맞은 코니 섬너(다이언 레인 紛)와 에드워드 섬너(리처드 기어 粉) 부부. 8살난 귀여운 아들을 키우며 단란하게 살아가는 모범적인 이 부부의 삶은 바람이 심하게 불던 어느 날, 거리에서 일어난 우연한 사건으로 치명적인 위기를 맞는다. 신뢰의 위기.
쇼핑차 시내에 들른 코니는 강풍에 중심을 잃고 부상을 당하는데…. 우연히 부딪친 프랑스 미청년 폴 마르텔의 도움으로 상처를 치료하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폴은 그녀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몇 차례 망설임 끝에 다시 그를 찾은 코니. 그녀의 지성과 도덕심과 가정에 대한 의무는 폴의 강렬한 미소와 유혹 앞에 수치스럽게 무너져내린다. 점점 더 폴과의 쾌락에 마약처럼 빠져드는 코니. 집안 일은 점점 더 엉망이 되고 사랑하는 아들마저도 소홀하게 된다.
아내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의심을 갖게 된 에드워드는 뒷조사를 통해 아내의 부정을 확인하고 폴 마르텔의 집을 찾는다. 감정을 절제하며 청년과 대화를 나누던 에드워드는 아내에게 선물해준 유리구슬과 헝클어진 침대를 발견하고는 이성을 잃고 유리구슬로 청년의 머리를 내려쳐 살해한다. 그 때 아내로부터 걸려온 전화. 아내는 자동응답기에 울먹이며 폴 마르텔과의 이별을 선언한다.
에드워드는 쓰레기하치장에 폴의 시체를 버리고 사건을 은폐하려 하지만 코니의 전화번호가 폴의 방에서 발견되고 쓰레기하치장에서 시체가 발견된다. 에드워드의 범행임을 알게 된 코니. 자수하려는 남편을 말리고 함께 새로운 곳으로 떠나자고 한다. 차가 서 있는 곳은 경찰서 주차장. 신호가 몇 번 바뀌어도 떠날 줄 모르는 차. 그들의 차는 그곳을 무사히 떠났을까? 혹은 떠나도 되는 것일까? 그 해답을 관객들에게 맡긴채 영화는 끝이 난다.


밝은 회색을 띈 황색
베이지(beige)

베이지는 회색의 딱딱한 이미지에 비해 부드러운 따스함이 베어 있고 유약한 느낌을 준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
회색옷 위에 걸쳐 입은 ‘코니’(다인안 레인)의 연한 베이지색 코트가 어지럽게 휘날리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잔뜩 흐린 회색빛 날씨와 회색빛 도시에 아름다운 백인여성의 밝은 베이지색 의상은 지적이고 세련된 현대적인 이미지와 함께 빛나고 있었다.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에서 베이지는 교양 있고 수수한 절제된 방법으로 평온함을 주는 이성적인 색이다. 빨강이나 초록, 노랑과 같은 자극적인 색이 아닌 베이지는 주위와 온순한 방법으로 타협하는 색이며 자신의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일 없이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는 색이다. 다만 에너지가 결여된 듯 무기력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차분한 색인 베이지는 변화 없는 따분한 일상처럼 자신의 평범한 일상에 질려 있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밝은 베이지는 코니의 성실한 남편 ‘에드워드’(리차드 기어)와 어린 아들과 함께 안락한 가정생활을 하는 평범한 그녀의 상징적인 색이기도 하다.
권태로움 속에서 유혹에 빠지기 쉬운 그녀를 매력적인 프랑스 남자 ‘폴’(올리비에 마르티네즈)이 영화의 첫 장면에 나온 강한 바람처럼 그녀를 흔들어 놓았다. 쾌락주의자는 베이지색과 어울리지 않는다.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 없는 색이며 자립심과 패기가 부족한 색이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베이지다. 그러기에 스스로의 틀에 맞추려 부단히 노력하는 그녀를 폴이 강한 자극으로 마치 마약처럼 중독 시켜 베이지가 가지는 틀을 스스로 깨게 하였다.


검정
검정은 빛이 전혀 없거나 빛을 모두 흡수하므로 사실상 색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검정은 하양과 반대 되는 색으로 극단적인 시작과 끝을 말해주는 색이다.
고대 그리스 문명의 시민국가시대(B.C 1,000-322)에는 하루가 어둠으로부터 탄생하기 때문에 검정이 생명을 상징했고, 16세기경에는 영국의 앤(Anne)왕비가 애도를 위해 검정을 사용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검정은 미술에서 사탄의 색이기도 하고 죽음과 부정, 죄악, 공포, 사망, 불길, 증오, 고민의 색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불륜의 관계를 맺은 코니와 폴이 하얀 침대 위에서 사랑을 나눌 때, 검은 천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다.
그것은 검정이 암시한 도덕의 타락과 함께 미스테릭한 무드를 말해준다. 검정은 육감적인 무드를 고조시키는데 효과적인 색이다. 여체를 쇠사슬로 묶으면 실제보다 더 섹시하다는 말이 있듯이 여성을 더욱 여성답게 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아름답지 않은 색으로 몸을 둘러싸게 해서 여성다움과 대비되어 속에 있는 여성다움이 더욱 돋보이게 되는 것이다.
언페이스풀의 포스터는 미모의 여주인공 다이안 레인과 꽃미남 올리비에 마르티네즈를 검정색 배경 위에 포착하였다. 검정이 주는 상징적인 이미지처럼 죽음을 부른 관계이기에 영화의 스토리를 압축시킨 색이다.


어두운 파랑
네이비블루 (navy blue: dark blue)

기원전 5,000년경까지 파랑은 검정의 일종으로 여겨왔다고 한다. 그리고 헤브라인은 파랑과 보라를 구별하지 않았다.
파랑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행복, 희망, 진실, 명예, 휴식을 상징한다.
반면에 부정적으로 해석하면 침묵, 적막, 고독, 자유, 슬픔, 연인, 이성, 비애, 지성, 우울, 억제, 은밀, 공포 등을 뜻한다.
이 영화에서는 파랑이 주는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다.
어두운 파랑인 네이비블루는 의상과 함께 영화속 배경으로 자주 등장한다.
낯선 곳으로부터의 자유를 갈망하는 코니의 모습이 누군가의 시선으로부터 결코 자유스러울 수 없었기에 네이비블루가 주는 침묵으로 일관하게 하였다.
아내의 부정을 알면서도 모르는척하는 에드워드의 침묵 또한 네이비블루의 고독을 뜻한다.
코니에게 네이비블루는 어두운 심리를 반영한 형용사 색이지만 폴과 에드워드에겐 시각적으로 구체적인 표현을 하였다.
폴이 입고 있는 의상과 그의 아파트 입구 색상은 온통 네이비블루다. 젊고 지적이면서 남성적 매력이 넘치는 폴을 네이비블루로 후레쉬하게 표현하였다.
에드워드의 네이비블루 의상 역시 보수적이고 헌신적인 성실한 남편의 이미지의 내적인 성향이 잘 나타나 있다.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혼탁한 암색조의 네이비블루 톤이지만 마지막 장면은 새벽의 푸른 기운이 도는 네이비블루 톤이다.
무한대의 상상으로 이끌어가는 연상의 여운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