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수와 환상의 미학
- 천경자의 인생과 예술세계 -
글: 김삼랑(미술평론가) 1995년 10월에 쓴 글
찬란한 고독(인생)
천경자는 1924년 전라남도 고흥(高興)에서 태어났다. 온대 식물이 무성하여 남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고흥반도(高興半島)에서 낙천적이고 정이 많으며 풍류를 즐기는 남도 사람들 사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드럽고 애교적이며 씹을수록 감칠맛 나는 전라도 말, 목이 메이도록 구슬픈 남도의 잡가(雜歌), 마치 소쩍새 소리처럼 피먹은 육자배기, 그 삶의 노래를 들으며 자랐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어릴 때부터 눈물과 정이 많았다. 은하수가 하얗게 뿌려진 밤하늘을 서커스 천막처럼 걷어버리고 싶던 호기심, 무덤 위에 흐드러지게 핀 진분홍색 파랭이 꽃을 아버지가 낫으로 싸악싸악 쳐버렸을 때, 그만 주저앉아 서럽게 울던 일, 개천을 건너면서 비단같이 고운 실뱀을 경이롭게 지켜보던 추억들은 소녀 천경자의 감성과 정서를 풍요롭게 해 주었다.
1941년, 천경자는 동경(東京) 미술전문학교에 유학하여 재학 시절에 노인이 등장하는 그림 3점을 그렸다. 그 작품 중‘조부상(祖父像)’과‘노부(老婦)’로 선전(鮮展)에 각각 입선한다. 특히 '노부'는 특선 후보에까지 올랐던 작품이었으며, 그 당시에 모던(modern)하다는 칭찬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날로 치열해진 전쟁 때문에 종전을 앞두고 귀국하여, 1946년 모교인 전남여고에서 미술교사로 봉직하게 된다. 그 때 나이 22세였다.
광주(光州)로 이사 온 후, 초혼(初婚)에 실패한 그는 사랑하는 아버지와 하나 뿐인 누이 동생을 여의고, 남들처럼 행복한 결혼생활은커녕 몰락한 가정을 거느려야 하는 연약한 여자로서 인생이 얼마나 엄숙한 것이며,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즉 사랑하지 못한 것이 슬픔으로 남고, 이젠 다시 사랑할 수 없는 사실이 더 구슬프다는 사랑의 철학을 터득하게 된다.
그는 이러한 고난 속에서 첫 애기를 기르며 일요일이면 스케치북을 끼고 이국정서(굋國情緖)가 서린 양림동(楊林洞) 언덕의 신록을 찾아 헤매곤 하였다. 자연을 너무나 사랑했고 현실이 너무 고통스러웠던 나머지, 현실을 보는 눈이 몽롱한 꿈으로 치달아 초현실의 세계에서 배회하기도 한다.
1949년 6월, 서울 동화백화점(지금 신세계)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 무렵 그는 유머러스한 동작으로 아름다운 꽃무늬를 뻔득거리며 꽃향기를 거느리고 스쳐가는 뱀을 소재로 작품‘생태(生態)’를 그렸다. 그것은 야속한 운명에 처한 그가 악에 복받치고 저주 받은 불효자로서, 자신이 살아갈 용기와 길을 찾으려는 자학적(自虐的)인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한의 응어리는 1977년에 그린 자전적(自傳的) 이미지를 담은 그림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에서도 나타나게 된다.
1951년, 서울로 이사한 천경자는 35세의 뱀띠 남자와 재혼을 한다. 1955년에는 작품‘정(靜)’으로 대한미협전에서 영광의 대통령 상을 받는다. 그러나 재혼한 남편과 다시 생이별의 슬픔을 맛보게 되고, 곡마단 단장같은 뱀띠 사나이의 환상에서 깨어난지 5년만에 얻은 것은 두 남매 뿐이었다.
1954년, 그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이 세상에 흔한 것이 자식이고 모정(母情)이라고 하지만 화가 천경자의 꿈과 아내 천경자의 애절한 사랑이 불안한 평행선을 무궤도하게 달릴 때, 거기에 안전하게 다리를 놓아준 것은 언제나 어머니 천경자의 모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화가 천경자는 꿈과 사랑과 모정, 이 세가지를 원동력으로 삼아 자기 인생과 예술을 경영해 온 셈이다.
1969년, 그녀는 여름에 출발하여 다음 해 봄에 돌아오는 남태평양의 여러 섬과 뉴욕, 파리,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로 스케치 여행을 감행하게 된다. 강열한 태양과 꽃향기로 가득한 절해 (絶海)의 고도 타히티(Tahiti) 섬, 고갱의 전설이 깃든 그곳은 화가 천경자의 환상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1974년, 인도네시아, 아프리카, 프랑스 등 9개국 스케치 여행을 하면서 구상했던 것을 작품화하기 시작한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뛰노는 야생 동물과 소녀 때부터 즐겨 읽은 문학 작품이나 즐겨 본 외국 영화 등, 서구 문학의 고향인 현장을 답사하여 스케치 하기도 하고, 외국의 풍물이나 흑인들의 원초적인 생명감을 즐겨 그렸다.
그 당시 40대 후반에 들어선 그는 여러 차례 세계 여행을 하고 돌아와 변화와 시도를 거듭하면서 왕성한 창작 의욕에 불탔으며 작품은 한층 더 무르익어 간다. 그는 생활이 무척 어려웠던 시절에 속수무책으로 아버지와 누이 동생을 저 세상으로 보내면서도 꽃상여 하나 씌어 드리지 못한 서러움이 한으로 맺혔을 것이다. 그 흔한 결혼식도 없이 치른 결혼하며, 결혼을 두 번이나 치렀으면서도 평범한 가정 주부로서 평온한 삶을 누려 보지도 못하고 두 번 다 실패한 것도 한으로 남았을 것이다.
고난이 심하면 심할수록 인생의 의미와 삶의 맛은 깊어지는 것일까. 그는 결코 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을 거역하거나 도피하려 하지 않고, 영원한 환희(歡喜)와 희열(喜悅)을 동경하면서 구슬픈 애수와 안온한 즐거움을 화폭에 담고 있었다.
그것들이 잘 표현되지 않고 답답해질 때는 엉엉 울기도 하고, 처녀때부터 즐겨 듣던 육자배기나 심청가, 춘향가의 이별가 등, 판소리를 들으며 작품을 구상하곤 하였다. 세상을 원망하거나 울며 하소연하는 듯한 애처로운 호소, 그 창(唱)의 아름답고도 구슬픈 한을 판소리의 아니리처럼 자기 창작의 휴식으로 듣는 것이었다.
그래서 화가 천경자는 고독해도 좋고 슬퍼도 좋았다. 비록 현실의 삶이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고난과 슬픔 속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터득해야만 살벌하고 비정한 이 시대에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가꿀 수 있다는 교훈을 던져 주고 있다. 그러기에 그는 스스로‘찬란한 고독’이라고 하면서‘이젠 슬프지 않다’고 말한다.
1991년, 그는 미주(美州)로 스케치 여행을 다녀와서, 백인에게 착취 당하고 억압 받는 남미 흑인들의 인상과 삶의 모습, 그들의 비운(悲運)에 대한 간절한 사랑과 애수를 느끼며 작품화하고 있다. 국민학교 학예회 때 연극 배우를 동경했지만 키가 커서 히로인(heroine:여주인공)은 되지 못하고, 단역(端役)으로 출연했던 일, 어려서 기르던 강아지가 부엌에서 죽었을 때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울지 못했던 울음을 섧게 울던 애정 등이 그의 작품 후경에 등장하는 모티브가 되기도 한다.
천경자는 그동안 이른바‘미인도 사건’을 비롯해서 수많은 시련이 예고 없이 찾아와 그를 당황하게 하기도 하였다. 정이 많고 눈물이 많기에 세상 물정에는 어두웠고, 사회생활에서도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닥칠 때가 많았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일상 속에서 때때로 인간 사회의 허무(虛無)를 느끼면서 그것을 운명의 장난으로 돌리고 싶다는 심정을 토로한 바 있다. 운명을 거역하지 않고 천명으로 여기며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는, 말하자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운명론자인 듯하다.
그는 그 흔한 호(號) 하나 짓지 않고 작품에 낙관(落款) 하나 찍지 않는 소탈함, 자기 과시나 권위의식 없이 누구에게나 속마음을 털어 놓는 우직하리만큼 소박하고 솔직한 성품을 지녔다.
최근에는‘죽음의 수용(受容)’‘사후(死後)의 세계’등의 독서를 즐기면서 윤회설(괷回說)과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는가?’그녀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환상적으로 형상해 보겠다는 의욕에 차 있다.
‘화실에서 일할 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그림이 잘되는 날은 그리다 둔 그림을 몇 번이고 반복하여 보면서 흐뭇한 기분으로 판소리를 들으며, 18세 소녀처럼 한없는 꿈과 환상에 잠겨 마냥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
참신한 예술혼(예술)
화가 천경자의 예술을 향한 식지않는 열정과 고뇌, 넘치는 의욕과 끈질긴 창작 정신이 이루어 놓은 작품 세계는 어떠한가?
그 하나는, 자신의 비극적 체험과 심상(心像)의 세계를 주체적으로 조형화 한 솔직하고 신선한 착상력(着想力)이다.
천경자의 그림은 자신이 체험한 소재와 표현하려는 궁극적인 정신이 화재(畵材)와 상상적 결합을 통하여 만들어 내는 세계이다. 그는 어떤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동양화의 전통이나 인습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솔직한 표현을 하고 있다. 재학시절부터 18세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섬세한 감성과 참신한 착상력으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여 왔다.
그리고 그는 슬픔이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정서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이며, 동시에 모든 예술의 전형(典型)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로우엘이‘환희 그 자체는 4분의 3이 슬픔’이라고 말했듯이, 그는 가장 달콤한 기쁨을 진동시키는 것은 바로 가장 깊은 슬픔과 한의 가락으로 자아내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그가 30대에 접어들어 그린 자아의식적(自我意識的) 작품‘정(靜)’, 그립고 애절한 회상에
젖어 있는 길레 언니의 환영(幻影) (‘길레 언니’), 수도자처럼 인생을 달관하고 고독에 쌓여 있는 가련한 여인(‘孤’), ‘한중록(恨中걧)’을 쓴 이조 여인의 머리에 꽂힌 꽃잠처럼 섬세한 심정과 애타는 호소(‘恨’), 탱고의 선율을 타고 오는 애수와 보라빛 황혼을 바라다 보는 드라마틱한 슬픔(‘탱고가 흐르는 황혼’) 등, 자신이 체험한 슬픔과 고독과 한을 상상으로 엮어 환희의 세계로 조형화하고 있다.
이 시기부터 그의 화법은 더욱 자유로워지고 색채는 강렬하고 밝아졌으며, 그 착상력과 주제의식은 더욱 신선해져 간다.
아름답고 고운 여인도, 화려하고 풍요롭던 꽃도 화무십일홍(花無十一紅)이요, 찬란하고 영롱한 꽃뱀도 죽는 순간부터 칙칙한 색깔로 변하며 사라진다. 우리가 갈망하는 행복과 사랑도 한번 얻고나면 아무것도 아니듯이, 다가서면 저만큼 물러나는 사막의 신기루(蜃氣걹)나 북극의 오로라(aurora)처럼 허무한 것이다.
그러나 화가 천경자는 이러한 현실 세계의 무상함을 그의 작품 세계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아름답게 살려 내는 놀랄만큼 신선하고 주저 없는 착상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 둘째는, 단순한 자연의 소재를 통하여 전이(轉移)와 과장, 상징적 수법으로 이루어내는 환상적 구성력(構成力)을 들 수 있다.
예술 작품은 작가의 상상력이 재구성한 허구(虛構)의 트릭이다. 예술의 생명은 바로 이‘멋진 허구’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환상적인 유희(遊戱) 없이는 진정한 창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화가 천경자는 자연의 질서나 조화를 일부러 깨뜨리고 형과 색을 단순화하거나 변형시켜, 자신의 사상과 감정, 잠재의식의 세계를 통해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창출해 내고 있다.
이를테면, 옆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의 여유 있는 포즈와 긴 목, 정중동(靜中動)의 감정을 첨가한 단순하면서도 깨끗한 배경은 인물을 돋보이게 하고 강한 인상으로 여운이 남게하는 수법이다.
그의 40대 작품을 보면, 어린날의 추억과 향수, 서글픔이 환상으로 그려지고(‘春雨’), 화려한 너울을 쓴 뱀들이 황홀하게 환유(還遊)하며 일렁이는 요기 서린 환상(‘蛇’), 야생 동물이 노니는 아프리카 초원에서 코끼리 등을 타고 엎드려 우는 나체의 여인(‘초원Ⅰ’), 전설처럼 쏟아지는 꽃비를 맞으며 검고도 긴 머리채를 바람에 휘날리는 우수의 여인상(‘황금의 비’, ‘아리만다의 그늘’) 등은 단순한 소재를 변형하고 전이시켜 밀도있게 재구성한 상징적인 작품이다.
그가 50대에 그린 자전적(自傳的) 이미지를 담은 작품‘내 슬픈 생애의 22페이지’를 보면, 그의 그림의 특징을 단적으로 엿볼 수가 있다. 작품 속의 젊은 여인은 머리채를 길게 풀어 헤친채 네 마리의 꽃뱀들이 혀를 낼름거리며 머리와 이마를 휘감고 있다. 그녀의 눈동자는 동굴처럼 허전하게 뚫여 있고, 마땅히 있어야 할 눈썹은 날려 버리고 없으며, 목은 사슴처럼 길게 과장되어 있다.
실제로 이러한 여인이 현실 속에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녀는 미친 여자가 아니면 백치로 보일 것이고 우리들은 그녀를 외면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이상야릇하게도 이들 꽃뱀들은 우리에게 두려움이나 거북스러운 느낌을 주기보다는 슬프디 슬픈 전설처럼 초현실적 환상의 세계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동공이 열리고 눈썹마저 없는 여인의 인상은 아름답고 경이로우면서도 미묘한 매력으로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
이러한 시각현상은 머리로 생각하는 합리적인 논리를 초월하여 직감(直感)으로 느끼는 비합리적인 곳에서 얻어지는 미감이다. 그것은 천경자의 생명 깊은 곳에서 솟아 오른 영혼에의 절규와도 같이 느껴지는 비범하고도 독자적인 표현 양식이기도 하다.
그 셋째는, 원숙한 데생력과 예민한 색채감각이 이루어내는 밀도 있고 정교한 표현력(表現力)을 들 수 있다.
화가 천경자는 어릴 때 어머니의 슬하에서 수를 배웠다. 그 때부터 누에가 실오라기를 한올씩 뿜어내어 누에 고치를 만들고 그것으로 비단이 짜여지듯 한 섬세하고 집요한 결벽성(潔癖性)을 지니게 된다. 작품을 완성해 가는 과정도 처음 구상하여 밑그림을 그리고 다시 지우고 또 살리며, 더 보태기도 하고 뒤바꿔 가는 방법을 거듭하면서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심혼을 불어 넣는 작업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머리카락 한올 한올에 나타난 필선 하나 하나의 흐름이 정확하게 살아 있으며, 현실적인 명암이나 음영을 넣지 않고도 나타낸 미세한 톤과 정교한 볼륨을 나타내는 등, 폭넓은 데 생력과 원숙미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표현 방법은 대개 오랜 시간에 걸쳐 군더더기 없이 정제(整齊)되고 압축된 만큼 팽창력 있는 소품으로 그려진다. 아니, 그리거나 칠한다기보다 소조(塑彫)처럼 덧붙이고 다듬거나 연마해가는 이른바‘마저작침(磨杵作針)’의 참선적(굱禪的) 경지에서 작업한다고 보아야 좋을 것이다.
그의 색채 표현은 욕심스럽거나 호들갑스럽지 않고 단순하면서도 명정(明淨)하고 황홀하면서도 감미로운 환상적 무드를 자아낸다. 언젠가 그는‘노란색이 난무하는 뜰을 보면 뭇 인간과의 감정이 단절되어 가는 현대의 비정감(非情感)과 각박함을 느낀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색채를 구사하여 그린 그의 그림은 오히려 잔잔한 즐거움과 풍요로운 정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는 50년대까지 한국적 향토색을 즐겨 썼다. 그러나 60년대 남태평양과 아프리카 여행 이후부터는 이국정서가 깃든 강열하고 황홀한 아열대적 색채로 정열적인 생명감을 나타내고 있다. (‘아열대Ⅰ’), 검은 배경에 화려한 꽃, 그 위에 호젓하게 앉은 호랑나비와의 환상적인 색채대비(‘장미’), 붉은색과 노란색, 주황색이 어우러진 명랑한 환희의 색조(‘아라만다의 그늘’), 명상에 잠긴 듯한 회갈색과 연초록, 암보라의 색채(초원Ⅰ), 그리고 붉은색을 배경으로 한 검은 머리와 노란 옷과 암보라 꽃의 신비로운 배색(‘孤’) 등, 다채롭고 예민한 감각으로 절묘하게 조화시킨 설채의 기법이다.
물감을 여러 번 칠해가며 진하게 칠하는 진채화(眞彩畵)의 수법으로 그린 이 그림들은 수묵화에 비해 섬세하고 우아하며 곱고 산뜻한 색채 효과를 내고 있다. 그래서 그의 화면은 판소리처럼 군더더기가 없고 다이나믹하다.
이러한 색채들이 결코 아열대적 이국풍(굋國風)에만 젖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전통적인 색동옷이나 단청(丹靑)무늬, 만다라(蔓茶갥), 무녀들의 복식에서도 볼 수 있는 색채이며, 소녀 천경자가 자란 고흥반도에서 보고 느낀 색채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그림에서는 한국적 정서와 남국적 정취가 어우러진 우아한 색감을 느낄 수 있다. 이와 함께 살풀이 춤을 추는 여인이나 해원(解怨) 굿을 하는 무녀에게서 느끼는 신령스럽고 카리스마charisma)같은 영기를 느낄 수가 있다.
그 넷째는, 인생의 궁극으로서의 고난과 시련을 극복한 자기응시적(自己應視的) 달관에 이른 감성적 독창력(獨創力)을 들 수 있다.
예술가들은 자기 표현의 절정인 해탈의 경지를 체험하기 위해서 고통스러운 고뇌의 창조작업에 매달린다. 드라마틱하고 비극적인 생애를 극복한 화가 천경자의 예술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치열한 감동과 복잡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준다. 상국설매(霜菊雪梅), 된 서리 속의 국화와
눈보라 속의 매화의 아름다움도 그 미의 본질은 다름아닌 비극성에 있다. 그의 작품에서 느끼는 애수는 우리의 생각을 맑게 정화시켜 주고, 열락은 우리의 마음을 살찌게 하는 새로운 세계를 펼쳐준다.
창조의 근원은 영성적(괈性的) 자기 성찰에 있으며, 명상이나 선(禪)과 같은 개성화의 노력에서 최고의 창조력이 발현된다. 화가 천경자는 자기 내면의 심연으로 침참해가는 준엄한 자기 응시적 태도와 자기 내면에 살아 있는 신령스러운 기운을 내밀(內密)한 감성으로 작품 속에 살려 내는 독창력을 지닌 작가이다. 화면과 대결하며 파고드는 작가적인 의지, 털 끝 하나라도 예사로 처리하지 않는 완벽하고도 진지한 작업 태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다.
언청이가 밤 중에 그 자식을 낳고 나서 서둘러 불을 비춰 보는 뜻이 행여 자기를 닮지 않았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에 있듯이, 화가 천경자는 비통하리만큼 엄정한 자기 응시를 통해 화면을 지우고 또 그리면서 예술혼을 살려낸다. 이러한 작업은 곧 자기 작품에 대한 애정임과 동시에 자기 확인의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80년대 들어와 그는 기욕(嗜慾)이 줄어 들고 더 이상 자기 표현성을 과시하지 않는 고담청냉(枯淡淸冷)한 노경(老境)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경지는 나이가 많아서 이르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궁극으로서의 시련을 극복한 다음에 오는 경지이다. 그는 이제 자기 영혼에 붓을 적셔 자신의 참모습을 표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이는 곧 인생을 관조(觀照)하고 행위의 원숙함과 함께 정신적 노경을 통해 성취되는 달관에 이르는 미적 경지라 할 수 있다.
90년대에 들어 와서는 특히 현대문명 속에 살아가는 원시적 소박미를 지닌 남미(南美)나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모티브로 하여 작품을 하고 있다. 흑인 배우들의 광기서린 짙은 분장을 통해 현대라는 광태(狂態)를 외면하지 않고 예술의 순수성 속에 녹여 버리는 노숙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우리의 현대미술은 일제의 암흑기와 광복, 그리고 6·25동란 등, 민족적 격동 속에서 자라왔다. 이 시기에는 서구의 조형양식이 들어와 미술의 주류를 형성하였는데, 표면적으로는 전통의 단절이라는 혼란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 후기의 남화풍(南畵風)을 계승한 한국화는 주로 선전과 서화협회(書畵協會), 광복 후 국전 등을 무대로 하여 발표되었다. 그러니까 50년대 한국화의 경향은 광복 이전에 유행한 일본 화풍에서 벗어나려는 전통주의와 서구 모더니즘의 경향을 받은 추상적 경향이, 전쟁의 폐허 위에 급속하게 퍼진 실존주의(實存主義)를 깔고 나타났다.
이러한 시기에 화가 천경자는 한국화의 전통적인 경향과 일본화적 경향에서 탈피하는 근대적인 각성을 통해 한국화를 회화라는 의식에까지 끌어 올려 놓았다. 어둡고 침울한 일본화의 색채에서 벗어나 우리 나라의 밝은 햇빛과 청명한 자연에 대한 감성을 드러내면서 감각적이고 농축된 색채로 자기화시켰다. 그리고 오늘날의 회화가 시공(時空)과 이념, 방법 등 모든 것을 초월하여 다양한 내용과 양식의 변화를 거듭하면서도 거기에 인간 감정의 통로가 없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 즉 때묻고 질식할 것 같은 현대 사회의 문명에서 날로 메말라 가는 인간성을 회복 시켜주는 청순하고 명정한 그림 세계를 개척한 것이다. 그의 예술은 한과 슬픔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인간의 운명과 무상함을 호소하며 고백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한과 슬픔의 체험을 그저 잊고 마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인생의 값진 가치를 찾아 호소하며, 나아가 그것들을 환희와 열락의 세계로 변용해 내었다는 데 예술적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화가 천경자는 일제말기부터 광복 이후 오늘에 이르기가지 50여 년 동안, 우리 나라 현대미술과 더불어 활동해 온 산 증인이며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는 조선시대 신사임당(申師任堂), 일제시대 나혜석(羅蕙錫) 이후 우리나라 최고의 여류 화가로서 항상 시대를 앞서 가며 한국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선구자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