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종현 Ha, Chong-Hyum

‌접합 32x41cm Oil on Pushed from Back of Hempen Cloth 2003

한국 ‌단색화의 거장 - 하종현
‌글: 신항섭(미술평론가)

하종현, 그는 일체의 회화적 기법을 거부하는, 좀 특이한 체질의 작가이다. 물론, 여기서의 “회화적 기법”이란 무엇을 “그린다.”는 전제아래서 행해지는 평면작업상의 표현기법에 한한다.
방법론이 현대미술의 표현의 쟁점으로 부상하기 전까지만 해도 비화화 취급되었을 그의 작품들이 오늘에 와서 문제시되는 까닭은 종래의 표현기법이 얻지 못한 평면의 순수성 때문이다. 이제까지 극에 달한 어떤 기교로도 하종현의 평면이 획득한 만큼의 순수성을 묘사할 수 없었다는 사실로써 그의 작품에 대한 비화화하는 선입견을 버려야 할 것이다. 오늘의 회화가 당면한 문제는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주어지지 않고, 표현되는 캔버스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과연 캔버스란 무엇인가, 하는 보다 직접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로 귀속되는 오늘의 상황을 정당화시킬 때, 이 같은 반회화적 방법은 한층 설득력 있는 것이 된다.
또한 이러한 물음은 표현 이전의 문제이고 볼 때, 반회화적인 그의 행위는 바로 이 시대의 회화적인 방법의 발상과 딱 들어맞는 것이다.
이로써 그의 방법은 어느새 현대회화의 핵심에 들어서고 만다.
그의 평면작품을 보면 회화적인 수법이 도대체 눈에 띄지 않는다. 마대위의 촉촉이 배어 나온 단색의 물감이 그 전부이다.
표현의 상징성도 없고 상식으로 이해될만한 이미지도 하나 없다. 그러나 캔버스위에 나타난 사실은 우리의 눈에 하나의 현상으로 비치고 있다. 이 현상을 파악하는 것은 방법론적인 개념상으로 비치고 있다. 이 현상을 파악하는 것은 방법론적인 개념이다. 그렇다면 상식에서 개념으로 넘어가는 통로는 어디에서 찾아야만 할까.
보편적인 미의식으로도 분별할 수 없는, 이 반회화적인 개념은 아름다운 얽매여 있는 우리들의 미적 관점을 깡그리 깨뜨림으로써 극적인 이해의 통로를 맞이할 수 있을 뿐이다.
특히 작품에 나타나는 평면성의 순도에 따라 그의 방법과 회화적인 이해도가 결정됨으로써 평면의 순수성이 강조될수록 종래의 회화적인 이해의 접근점에서는 멀어진다.
바꿔 말하면 평면에 무엇을 표현하려는 인위성이 적으면 적을수록 평면의 순수성은 높아짐으로, 이는 곧 종래의 회화적 발상과는 더욱더 멀어진다는 생각이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은 비회화, 또는 반회화인 것이며, 이 같은 긍정이 다름 아닌 이해의 통로인 것이다.
그러나 주어진 캔버스 자체, 즉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은 상태가 절대적인 순수라고 비약하는 것을 또 곤란하다.
이러한 생각은 캔버스뿐만 아니라 회화 자체까지 부정케 되는 비논리적인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캔버스 위에는 최소한의 무엇이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회화의 개념조차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간인 우리 자신마저 인정치 않음과 같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하종현의 작품세계는 이렇듯 힘들게 출발하고 있다. 한편에서 평면의 순수성을 추구하려는 시작단계에 있는 반면, 그는 이미 순수성 자체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러한 느낌은 역시 캔버스를 꾸미려한 인위의 흔적을 들키지 않는 그 자신의 독특한 방법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그는 작가일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닐까. 아니라면 표현을 거절하는 태도가 과연 작가다운 일인가.
그렇다. 그의 작품, 그의 방법을 만나기 위해선 이같은 물음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물음을 그 자신에게 던지는 것으로써 하종현은 여기에서 비로소 한 작가로서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작업의 진실로 이르는 문은 이 표현을 거절하는 듯 싶은, 아니 인위를 숨기려는 작품의 표정에 있다.
평면에서 출발, 실험적인 성격이 강한 오브제 시대를 거쳐 다시 평면으로 회귀한 74년도부터 오늘까지 지속돼온 일련의 접합시리즈는 일반화된 회화적인 측면에서 다루지 않고 물질과 물질(물감)의 만남으로써 발생하는 관계함을 나타내려 하고 있다.
여기에선 마대와 물감이라는 이원적 상황만이 존재할 뿐, 그 이외의 무엇에게도 간섭을 받지 않는다. 이 두 가지는 동시에 수체가 되며, 서로가 자율성을 지닌다. 더구나 물감이 단색이라는 사실로써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이원적 체제는 그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캔버스는 물감에 의해서 그 존재성이 더욱 확실해지고 물감은 캔버스를 통해 그 존재성을 얻게 되는, 이들 불가분의 관계는 작품이라는 하나의 전일한 모습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물감의 존재가 캔버스를 기초하여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캔버스와 더불어라는 동시적인 의미로서 나타난다.
이 “더불어” 라는 말은 “어울림”을 말하며, 또 “어울림”은 “섞임”으로 진전되는 어의의 진행방식에서도 간파할 수 있듯이, 그의 “접합”은 캔버스와 물감의 “섞임”으로 표현성을 얻는다.
그의 방법을 보면 이같은 설명이 명쾌하게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나타내려는 작가로서의 근본적인 표현 욕구마저 은페 시키려 하는 창작의도까지 그대로 노정된다.
그의 “접합”은 단색 물감을 캔버스 뒷면에 낳고 누름으로써 그 압력에 이기지 못한 물감이 마대의 교직 사이로 비어져 나가면서 서로 엉겨 붙거나, 또는 물감의 농담에 따라 흘러내리는 등 마대와 물감의 유기적 관계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작가적인 안목으로 분류 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일반화된 회화의 기법인 “그린다.”는 의미로서의 행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같은 현상은 앞서 언급한 바대로 ‘무엇을 표현하느냐’가 아닌,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하는 방법론상의 행위가 우월한 표현양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대미술의 특성에 잘 부합되고 있다 할 것이다.
되풀이 하거니와, 방법상에 있어서도 그이 “접합”적인 방법은 물감을 캔버스에 붙이는, 일테면 의지하는 데서 만족치 않고 캔버스 자체와 섞임으로써 일체감을 구현한다.
캔버스가 물감의 표현능력을 위해 자신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물감의 표현영역으로 동승하는 것이다. 이것은 순전히 캔버스의 자의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는 이처럼 캔버스와 물감에 최대한 자율성을 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화구는 회화의 재료적인 의미보다는 물감 자체의 물질성, 혹은 캔버스 자체의 물질성의 강조로 나타난다.
이들 물질은 서로가 만남으로써 제한된 공간, 즉 하나의 작품화되었을 때는 자율성을 얻지만 개별적인 존재로서는 그냥 물질에 불과하다. 이들 무표정한 물질이 지닌 성질을 스스로 발휘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을 바로 하종현의 일인 것이다.
여기서 그는 ‘샤머니즘’에서 말하는 영매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이들 두 물질이 작품이라는 통일된 목적에 의해 가정된 공간, 즉 ‘캔버스’에서 만나 작품으로 형성되도록 주문하는 것은 하종현이 담당케 된다. 이들 두 물질이 화합할 수 있는 장을 선택한다는 사실에는 작가적인 작의가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장이란 하나의 작품을 전제한 만남의 장소인 셈이다. 이들 두 물질이 지닌 개별적인 물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최소한의 행위는 주술과 다름없다.
이들 두 물질이 만나 의롭게 화합했을 때 발현되는 작품성이란 영적인 존재인 것이다. 이 작품성을 불러내 두 물지에 개입시켜 작품화 한다는 의미에서 그는 영매자인 것이다.

하종현 (Ha Chong Hyun) 

‌1935년 12월 28일 ~  
경상남도 산청

■학력
홍익대학교 회화과 학사

■수상
2019 이동훈미술상 본상
2010 제4회 대한민국 미술인상
‌2009 은관문화훈장
‌2007 프랑스정부 문화훈장 기사장
‌1999 서울시 문화상
‌1980 제7회 한국미술대상전 대상
‌1975 제1회 공간미술대상전 대상‌

■경력
‌서울시립미술관 관장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현재
2018~ 하종현 예술문화재단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