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Lee, Jung-Seop

길떠나는 가족 종이에 유채 30x65cm 1950년대

상상과 해학의 미학
- 이중섭의 생애와 미술세계 -

글: 김삼랑(미술평론가)

세상에는 모험을 추구하기 위하여 안락한 생활과 사랑하는 처자를 버리고, 언제나 무조건적인 헌신을 각오하는‘돈키호테’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서민적인 편의주의(궄宜主義)나 처세술(處世術)이라는 처지에서 보면 그가 바보나 망상가로 보일 것은 틀림없다.그러나 한번 인생을 맛본 사람이라면 가정적 평화나 전원생활과 같은 외면적인 안식을 떨쳐버릴 때, 깊이 숨어있는 진정한 안식을 얻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래서‘돈키호테’가 영웅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유한한 사물로부터 이탈하는 것은 바로 무조건적인 헌신과 결단으로 통한다는 실존주의자 우나무노(Unamuno)의 철리(哲理)를 깨닫게 될것이다.이와 같이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불행한 인간이 되는 길을 선택한 화가 이중섭(굃仲燮)의 비극적 생애와 그 예술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자신의 비극적 체험을 결단과 선택의 주체로서 표현한 이중섭의 예술은 어떠한 것인가? 또그가 거기서 비약하여 현존과 실존의 궁극적 포괄(包括)로서는 무엇을 추구하였는가?이러한 문제제기는 생의 철학에 입각한 딜타이(Dilthey)의 해석학(解析學: 체험—표현—이해)과 실존철학(實存哲學)에 입각한 야스퍼스(Jaspers)의 초월관(超越觀: 현존재—실존—초월)을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동시에 그의 예술이 한국의 근대회화의 발전에 어떤 위치에 있으며, 회화전통의 계승에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계기도 되리라고 믿는다.Ⅰ. 비극적 체험 (일상—현존재)대향(大鄕) 이중섭(굃仲燮: 1916∼1956)은 우리 나라에서 서양화가 급진적으로 수용(受容)되던 1920년대에 평양에서 자랐다.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문화제5장 한국 미술 평론계 산책 933학원에서 수학하였다. 재학 중, 일본 자유미협전(自由美協展)에서‘태양상(太陽賞)’을 받았고(1943), 졸업 후에도 자주 출품하여 회원이 되었다고 한다.해방 직후, 그는 한국의 서양화가들이 뚜렷한 주체의식도 없이 외래 미술사조에 피상적으로맹종하고 있던 1945년에 귀국하였다. 함남 원산(元山)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일녀(日女) 야마모도(山本方子: 굃男德)와 결혼하여 한때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6·25동란으로 원산에서 국군의 마지막 철수선을 타고 월남했던 그는 부산(釜山), 제주(濟州), 통영(統營) 등지를 전전하였다. 1952년 사랑하던 부인이 전시(戰時)의 처절한 생활고에 못이겨 두 아들을 데리고 동경의 친정으로 떠났다. 그 후 가족과의 해후(邂逅)와 평화로운 가정의회복을 애절하게 갈망하던 끝에 궁지에 몰려 고통과 의기소침한 채, 부두에서 노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서구의 조형양식을 이식하고 있던 가치 혼란의 시대에, 처자에 대한 애정과 강인한 조형의지, 뼈에 스미는 고독과 초조와 실의의 일상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운명을 지닌 그는 모진 병마에 시달리다가 드디어 서울 적십자 병원에서 간장염으로 요절(夭折)할 때까지 비극적 일생을살았다.미망인 야마모도(55세) 여사는“그 분의 생애는 전쟁 속에서 시작하여 전쟁 속에서 사라졌지만, 작품 세계는 촌놈 같은 소박성이 있고, 처와 두 아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그리움에 가득찬 지극히 인간적인 세계”라고 회고(回顧)하고 있다.이중섭의 생애와 예술세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작품 연대를 편의상 다음 5기로 나누고자 한다.① 오산시대(五山時代) (1931∼1936)= 배태기(胚胎期)·반항기② 동경시대(東京時代) (1937∼1943)= 발아기(發芽期)·수련기③ 원산시대(元山時代) (1944∼1949)= 성숙기·의욕기④ 피난시대(避亂時代) (1950∼1953)= 저항기(抵抗期)·갈등기⑤ 서울시대(時代) (1954∼1956)= 자학기(自虐期)·실의기그는 인품이 착하고 천진하기 때문에 세상 물정에 타협하지 않고 통속에 흐르지 않았다. 만약 자기 예술이 자신의 삶을 비굴하게 만들 때에는 예술까지도 포기할 수 있는 멋과 예술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걸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작가였다. 이러한 멋과 용기는 때때로 현실과 이상의 갈등에 몸부림치게 되었고, 현실의 좌절과 고뇌(苦惱)에 처하여서도 개인적인 모든행복과 비애(悲哀)를 초월한 존재의 필연성과 법칙성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그가 현존재 질서의 절망에서 불안하다고 느끼는 것은 곧 자신이 현존재 내에 아직 매몰되어 있지 않는 까닭에, 그것의 한계를 몸소 폭로하면서 이 질서 내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현존재 질서 내에 기능화한 자기와 자유로운 본래적 자기와의 분열에 고민하고 있는 중섭을 발견하게 된다. 이 고민과 갈등에서 탈출하려는 자각(自覺)은 그의 실존을 각성시키는 근본계기가 된 것이다.이성(굊性)을 지각하는 인간이 됨으로써 참다운 인간의 비극을 겪어낼 수 있고, 비극을 통하여 영원히 향상하려는 것이 자각의 사명(使命)이다. 자각은 현실에서 시작되고 현실은 자각에서 또 부정(否定)된다. 그러므로 그의 자각은 현실을 그대로 긍정(肯定)하려는 직각(直覺)과그것을 부정하는 반성이 포함된 종합적 긍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이러한 자각적 사명을 그는 예술세계에서 어떻게 실현하고 있는가?첫째, 비폭력적(非暴力的)인 인생관(人生觀)을 들 수 있다.그는 미적 인간(美的人間)인 동시에 완전한 윤리적 인간이 되지 못하는 불안전성과 모순때문에 자신을 유일한 인간성의 비극 속으로 몰아넣는 미(美)의 비극성(悲劇性)을 자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생활을 포기하고 희생함으로써 하나의 완결된 예술작품으로 자기를완성시켜 미적 인간이 되고자 했다. 흔히 의식적(意識的) 생존경쟁은 파괴적인 폭력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자기를 희생하면서 이기는 힘이요, 생의 원만한 수단으로서의 비폭력적 생존경쟁을 그의 생활속에 암류(暗流)시키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둘째, 작품에 임하는 중용 정신(中庸精神)을 지적할 수 있다.현실은 그에게 따뜻한‘마음’대신에 차가운‘두뇌’만을 요구한다. 따뜻한 마음은 이별한가족과 함께 아름답게 살고자 하는 욕구에 불타있다. 그렇지만 차가운 두뇌는 가족과 대립하는운명을 시인하고, 예술의 세계로 향하려는 이성(굊性)으로 결빙(結氷)되어 있다. 이렇게 대립되는 현실(現實)과 이상(굊想)의 모순을 긍정하면서 조화(調和)와 통일(統一)을 꾀하려는 중용정신은 곧 양심의 세계를 지향하려는 생활과 이상이 화합하는 질서인 것이다.그의 작품에 시도된 생략(省略)과 왜곡(歪曲)·과장법(誇張法)은 극단으로 가서 서구의 추상으로 향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비례를 상실하지 않는 중용의 미학이다.셋째, 창의적 조형의지(造形意志)의 발현을 엿볼 수 있다.934 제5장 한국 미술 평론계 산책서귀포 고기잡이 / 목판 위에 유채 75×30㎝제5장 한국 미술 평론계 산책 935피난생활의 빈곤한 상황에서도 그는 낙천적인 성품과 표상에 알맞은 소박하고 다양한 화재(畵材)를 발견하였다. 이것은 궁핍한 일상에서도 끊임없이 향상하려는 강인한 조형의지의 발현이었다. 장판지·마분지·잡지쪽·담배갑 은지(銀紙)·베니아판·하드보드, 자연형 목판 등에그린 유화구·과슈·에나멜·크레파스·수채 등의 채료(彩料)는 당시 화포(畵布)나 화선지 위에 유화구나 먹으로만 그리던 화가들에 비하여 확실히 독창적인 발견이다.특히‘담배갑 은지’의 발견은, 철근 콘크리트의 새로운 재료가 건축가들에게 유연한 곡선과현란한 돌출부를 만들게 해주었듯이 중섭으로 하여금 새로운 표현 기법을 낳게 하였다. 이것은철필로 그린 오목한 선묘(線描) 위에 담뱃진 같은 흑갈색을 발라 헝겊으로 문질러서 채우고, 공백(空白)은 은지에서 나오는 금속의 광휘(光輝)로 번득이게 하는 기법이였다. 뿐만 아니라 아무렇게나 찢어진 잡지쪽이나 휘어져 있는 자연형 목판에다 소재를 기발하게 살려 화면을 유머러스하게 구성한 것 등은 재료의 발견에 따른 창의적 표현 수법의 하나이다.넷째, 독자적인 표현 양식을 찾아 볼 수 있다.중섭은 결코 환경에 지배되는 숙명적 선택이나 물리적 인과율(因果괹)에 복종하지 않고, 사르트르(Sartre)의 절대적 자유속에서‘자기 행위의 선택’에 의하여 살아온 의지적 존재였다. 외재적(外在的)인 주의(主義)와 이유와 어떤 개념에 제약받지 않고 자유롭고 개성적인 표현양식을 형성하였다.강렬한 색채와 다이나믹한 화면, 작품의 내용과 포름에 강한 액센트를 주는, 그러면서도 사람을 잡아 흔드는 이미지의 행동적이며 터무니없는 사용은 초현실주의(surrealism)에 가깝다고볼 수 있다. 그리고 주제를 강조하기 위하여 배경을 거세(去勢)한 것이라든지, 동자들을 모두남아들로만 등장시킨 것 등은 주제의 소재를 주관적 가치에 따라서 이상화(굊想化)한 것이라는점에서 관념주의(ideaalism)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그러나 표현양식이라는 것은 개성에 의한 창의(創意)이며, 주제에 구애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예술에 가장 적합하도록 자기의 상상관(想像觀)에 주제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그는 반드시 어느 한 미술사조에 편승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오직 정신과 자유, 마음의 자유요 유희(遊戱)인 상상력을 동원한다. 그리하여 랑게(Lange)의 의식적 자기 환상에서 관조(觀照)하는 환상미학(幻想美學)을 추구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이러한 예술세계는 1955년에 미도파 화랑에서 개최한 그의 마지막 작품전에서 이미 확고한현대적 주관으로 독자적인 표현양식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1957년 이후, 구미(歐美)에서 귀국한 작가들이 우리 나라에 이식(移植)시킨 주관적인 구상(具象)과 비구상(非具象),앵포르멜(informel) 회화운동이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선구적인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중섭 ‌(1916년, 평안남도 평원 - 1956년 9월 6일)
■데뷔
1941년 미술창작 작가협회전
■학력​​​​​
‌도쿄문화학원 미술과
1931오산고등보통학교
평양종로공립보통학교
‌1952 국방부 정훈국 종군화가단 단원
1950 원산 신미술가협회 회장
1946 원산사범학교 미술교사
‌1937 자유미협전 태양상
‌1978년 은관 문화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