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림 Kim Ku-Lim

‌캔버스 ‌130.3x80.3cm 1980
‌‌김구림, 그는 다변적인 체질의 작가이다.
‌글: 신항섭(미술평론가)

‌김구림, 그는 다변적인 체질의 작가이다. 그는 초기에 회화로만 출발했으나 미술의 「장르」가 붕괴된 오늘에 와서는 평면, 입체, 「오브제」, 판화, 「과슈」, 「드로잉」, 「비데오」, 도자기, 조각, 「이벤트」... 등 표현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이 궁극하는 예술세계의 정점을 향해 창작의지를 불태우고 있다.뿐만 아니라 한 때는 영화, 연극, 음악에까지도 관여함으로써 다각적인 면에서 자신을 시험하고 그런 체험을 통한 발상으로오늘의 작품세계를 더욱 살찌게 하고 있다.어떻게 보면 그는 이 시대의 기인이 아닐까 싶으리만치 많은 해괴한 짓거리(?)를 통해 사람들의 관심의 추적물이 되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 평범 그 이상의 행위란 다름 아닌 예술편력이었을지언정 세인의 얘기거리가 되기 위한 짓은 정말 아니었다.작가적인 입장에서 볼 때 그에겐 다만 남들보다 불우한 여건을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어려움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림에 대한 타고난 소질이야 어찌됐든 그는 정규 미술 「아카데미즘」을 거치지 못한 채로 우리 화단에 흘러들어 왔다. 때문에 평범, 그이상의 것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편협한 한가지 틀에 얽매임 없이 방임된 상태에서 행위의 자유로움을 구가했는지도 모른다. 아뭏든 그는 오늘 한국현대미술의 주축을 이룬 한 사람으로서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음에는 분명하다.전술한 바와 같이 표현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추구하는 그의 작품세계의 공통분모는 “시간성의 문제” 이다.인간이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고 있는 일체의 사물과 공간을 점유한 불가시적인 모든 것에 생명의 맥으로 숨어든시간에 대한 검증이야말로 김구림이 설정한 예술행위의 핵심인 것이다.작품에 등장하는 소재는 물론이고, 그 소재를 옮겨오는 작가의 의식활동에 개재된 보이지 않는 시간의 축적을 밝히려는 그자신의 손을 통한 행위와 그 결과까지를 포함하여 작품을 의미화한다.또한 그의 예술행위의 핵심이 “시간성의 문제”는 이 시대를 증언하는 투철한 작가정신과도 일치한다. 왜냐하면 표현의 대상물은 모두가 작가 주변이나 우리들 일상생활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 (병, 전구, 다리미, 깡통, 걸레, 빗자루, 봉투...)로서 “작가 자신과 함께”라는 공유개념으로 밀착된 이 시대의 산물인 까닭이다. 더구나 그것들은 회피할 수 없는 실재이며,그것은 곧 이 시대의 상황이 설정한 진실인 까닭에 거리낌 없이 작품의 소재가 되는 것이다. 창작행위가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라면 마땅히 그것들은 예술의 문제로 논의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작가와 더불어 존재하는 동일한 시간선상에 놓여진 상황(환경) 에 따라 무위적으로 변화된 모습, 즉 그것들의 태어난 모습이아닌 주변 공간의 변화에 의해 새로운 느낌으로 바라보이는 실체를, 창작이라는 새로운 질서속에 끌어들이는 작업이 바로 김구림의 현재이다.그것은 작가적인 의식과 행위를 거쳐 순화된 신선한 세계인 것이다. 시간에 의해 태어나는 물질의 근원성을 작품속에 남김은물론, 시간을 타는 물질 자체의 변화된 모습을 하나의 작품으로 형상화시키는 일이기도 하다.그는 이제껏 어느 한 곳에 정착해 본 일이 없듯이 체질적으로 꾸준한 문제추구형 작가이다. 60년대 초반 한국 화단에 일기 시작한 「엥포르멜」 운동과 병행하여 그가 시도한 새로운 작업, 일테면 「이벤트」, 「해프닝」, 그리고 생활용구를 차용한 일련의 「오브제」 작품들에서 보여주었듯이 그는 실험정신이 강한 일면을 보여준다.그가 시도했던 60년대 초반의 행위는 세계미술사적으로 보아 선진한 것은 아니었을 망정, 우리 화단에서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획기적인 사건들로 받아들여졌음은 사실이다. 그러한 행위는 단순한 새로움이기 보다는 앞으로 전개될 한국현대미술의 양태를 지향하면서 그 나름대로 예견된 필연적인 운동의 설정이었던 것이다.「보디 페인팅」 이라든가 연극 및 영화작품 그리고 「해프닝」 이라는, 일반인들에겐 어처구니 없는 장난이라고 까지 받아들여져야 했던 예술방식을 채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그만큼 시대정신에 민감했고 실험정신이 강렬했음을 믿게 한다.새로운 시도는 결국 새로운 시대까지를 당겨온다는 역사적 당위성으로 귀착되는 평범한 진리를 신뢰한 결과이기도 하겠다. 그는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정신적으로나마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이 공통으로 인지하고 있는 사실들에게서 한발 앞선 선험의 자리에 서야만 했다. 남들이 해 왔거나 하고 있는 것의 답습에는 길들여지지 못한 철저한 배신을 통해 자신의예술목표에 접근하려 했다.남들이 안하는 것을 해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조잡한 유아기적인 우월감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에 부딪히지 않으면 예술작업을 하지 않는 것 같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좀 변형적인 체질의 작가라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자기가 존재한 현실을 앞서 간다는 일은 어차피 관념의 문제이며 동시에 시간의 문제인 것이다. 시간개념이 정리된 상태의 작업이란 그에겐 참으로 쓸모 없는 일이어야 했다.보이는 것을 그대로 옮기는 것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사변적인 유추의 세계, 즉 추상세계가 지닌 표현의 자유에 탐닉되고 있는 화단의 흐름을 한발자국 벗어나 그다운 작가적인 선견으로 시간의 문제와 조우했던 것이다.그것은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성의 유기적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변이의 근거를 찾는 일이기도 했다. 그가 선택한 시간성의 진실이란 일반적인 미술개념과 미학에 기조한 기존의 표현방법과는 엄연히 다른 차원에서 발생된 변혁이었다.다른 측면에서 볼 경우, 이같은 그의 새로운 방법은 화단의 흐름, 다시 말하면 평균을 깨는 도전이었고, 자칫 비예술적인 행위일 수도 있었다.그의 시간성에 놓인. 물질의 표현속에는 이미 아름다움의 창조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미술 일반이 아름다움을 찾고규명하는 데 있었다면 김구림이 모의하고 있는 작업은 어떤 형태로든 예술행위와는 거리가 멀다.그것은 우리의 손으로 버려진 것이었을지언정 참으로 아름다움과는 상반된 폐물이니 말이다.그가 지금껏 관심을 갖고 있는 「오브제」 류의 작품들은 전쟁의 폐허속에 묻혀 있던 잔해라든가 폐품 따위의 더러운 것들 뿐이었으니 그냥 망칙한(?) 짓거리로만 여길 수 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그는 외부적인 반응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다만 누구에게 보여주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무언가 새로운 일을 찾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내부의 드센 충동질에 의해 매수당하고 있었고 그 사실을 은밀히 즐겼다. 그 즐김이란 창작열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그가 「오브제」로 다루는 물건들은 얼핏 보기엔 일상생활의 단편적인 파편들을 주워다가 명제를 붙인 듯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엔 새 것에서 사용되고 버려진 상태, 즉 변모되기까지의 시간의 흔적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케 된다.그 시간의 흔적이란 말할 필요조차 없이 김구림에 의한 인위적인 변모인 것이다.이같이 그가 빌어다 쓰는 「오브제」의 소재 전부가 우리들 일상생활과 긴밀한 연관성을 지니면서도 일단 쓰고 버려진 것들임을 볼 때 오늘의 미술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하는 방법론적인 측면에서의 해석이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그것은 일반적인 미론에 전거한 측면에서 추구된-잘 다듬어지고 조화를 이루어 그같은 교육을 받은 우리들 시각에 거슬리지않는-기존 미술작업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 다시 말하면 우리들 일상생활에 사용되는 물건들이 지니고 있는 속성을 분석하고돌이켜 보는데 보다 근본적인 목적이 있을 따름인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배반이었다. < 물론 이같은 시도가 김구림에 의해 맨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다. 맨 처음이라는 의미는 미술사적인 측면에서 평가되어질 것이지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일 수는 없을 것이다. > 따라서 그는 이 시대의 미술행위란 기존 미학에 근거한 아름다움의 창조일수 없다는 시대적인 상황과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그에 의하면 아름다움이란 한낱 허구라는 것이다. 그저 관념적이고 애매한 미적가치란 허무맹랑한 짓이라는 얘기다.그의 말대로라면 미술교육 자체마저도 부정하는 반론이다. 어찌됐건 그의 생각으로는 보이는 것을 단순히 보고 그리거나 만드는, 아니면 추상적인 무엇을 직감적인 감흥에 의해 그리거나 만들어내는 따위의 행위는 현실 상황과 시대적인 배경, 인지능력 등의 급격한 변화가 있기 이전의 문제들일 뿐임을 강조한다.오늘과 같이 예측하기 어려운 시대상황이 급조한 다양한 형태의 물건들의 해체를 통해 인간과의 유기적 관계를 밝히는 일이야말로 오늘의 예술가들이 할 일이란 얘기다. 그것은 물질의 본질을 회복하는 일임과 아올러 인간의 행위에 대한 반성일 것이며, 그같은 물건들과의 애정어린 만남-작품화시켜 놓았을 때-을 통해 인간성을 회복하자는 의도까지 은유되고 있다 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낸 무성격-대량 제조된-한 물건의 진실성과의 「하모니」를 연출하는 일이기도 하다. 덧붙인다면 인간과 사물의 진실한 접근을 통한 공존과구원의 모색이기도 한 것이다.이를 위해 그는 작업에 엄격한 시간성을 가미한다.사물의 속성에서부터 사물의 형성과정을 표면화함으로써 이미 꾸며진 형태, 또는 모습에 의한 일체의 의혹을 제거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대상물이 지니는 현존의 의미가 확실해질 뿐더러 비로소 사물의 진실에 공감이 가능한 것이다.덧붙인다면 의미론적으로 보아 시간은 유일한 진실이며 동시에 작품의 진실이기도 하다. 과거에서 현재로 이행되는 사물의그림자를 나타냄으로써 현존하는 사물의 보다 뚜렷한 존재양태를 살피고 거기에 확신을 주자는 것이다.물론 이러한 방법에는 작가 자신의 의식과 행위가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여기서의 방법이란 그의 작업에 소요되고, 축적된시간의 상황 아래 전개되는 일체의 「리얼리티」를 말한다.방법론적으로 설명을 하자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현재의 빗자루를 사다가 그 위에 오랜 시간의 흔적을 덧입힘으로써 그 빗자루가 경험치 못한 빗자루 자신의 과거를 소급시키는 일이다.이같은 감쪽같은 변형에는 물리적인 시간의 모습이 배제되면서 자연의 모습에서 인위적인 모습으로 옮겨가는 시간의 흔적,즉 작가의 행위만이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거기에는 다만 가정된 시간의 흐름이 내재되면서 작품의 성격으로 고착되기도 한다.이처럼 시간의 문제에 집착하는 까닭은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시대라는 일회적인 시간속에 올바르게 살고 있는 작가로서의 자신을 증명하는 일임을 자각한 때문이며, 그것은 또한 인간과 상관관계에 있는 사물이 시간의 흐름, 또는 공간의 변화에 따라자연스럽게 변형되는 과정을 인위적인 방법으로 검증해 봄으로써 작품에 진실성을 부여하자는 데 있다.그가 믿는 한 예술이란 아니 미술이란 선택된 소수의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이다.이제까지는 예술가연하는 사람들만이 해왔고 또 그러한 일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으나 오늘에 와서 미술의 「장르」가 무너졌듯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다시 말하면 우리들 일상생활에 직접·간접으로 무수히 관여하고 있는 조그마한 하나의 물건일지라도 그것들이 인간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이상 그만의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그 물건에 최소한의 의미를 되살리자는 생각이다. 그것은 곧 인간으로서의 자각일 것이기 때문이다.김구림은 애시당초 아름다움에 현혹된 사람은 아니었다. 오늘 그가 한국현대미술에 새로운 방법론을 들고 나온 것도 언제나스스로 자각적인 인간이길 원했기 때문이다.그러기에 어느 때든 자신의 작품을 반추하면서 일단 거기에 미흡한 표현, 혹은 허위가 발견되면 또 다른 방법을 모색해왔던것이다.끊임없이 분출하는 활화산과 같은 열정으로 고뇌하고 행동하면서 새로운 사실들과 만나곤 했다. 그럼 여기서 오늘의 김구림을 원인케 한 유년시절부터 살펴 보자.그의 고향은 경북 상주다. 늦자식으로 태어난 그는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그러나 외롭게 유년을 상주에서 보낸 뒤,사업가였던 부친의 사업관계상 대구로 옮겨 소년시절을 맞이한다.위로눈 누님과 형이 태어났으나 형은 말도 채 배우기 전에 세상을 달리했으며, 누님과는 20년 가까이 터울지는 까닭에 아주외롭게 성장했다. 일제치하에서 국민학교 시절을 거친 그는 이 때부터 “괴상한 아이”로 지목되어 선생님에게까지 지독한 미움의 대상이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일본애들고 걸핏하면 싸움질을 일삼았고, 더구나 어린 김구림의 추억속에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 형의 공허까지 가슴 한켠에 숨겨둔 탓인지 더욱 혼자였다. 해방이 되면서 친했던 일본 친구가 주고 간 「크레용」으로가슴의 공허를 메워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색깔에 매료되기 시작했다.그 때부터 정물의 정면에서만 그린다든지(이것은 똑바로 보려는 고집이고 동시에 원근이나 입체감이 없는 상태임), 남들이열심히 그리고 있을 때 뒷켠에 나앉아 관찰하는 것만으로 미술시간을 끝낸 뒤, 남들이 하학하고 나서야 비로소 혼자 남아 그리고 싶을 때까지 계속하는 따위의 엉뚱한 행동들을 보였음을 술회하고 있다.그 당시로선 외로운 자신을 도피시키는 방법으로 미술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런 상태로 8.15를 맞이했고 중학교에 진학하게되었으나 다시금 6.25라는 참담한 세월과 마주한다. 살육의 현장과 폐허의 목도는 어린 그에겐 실로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런 놀라움과 함께 은연중에 밀생해 온 반항심의 발산은 그림에서 이루어졌고, 그 시절 최초로 대면한 미국공보관에서 열린 전람회는 자신의 길을 확신케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는 다만 그리는 일에만 몰두했는데 때로는 그림을 싸 갖고 다니며화가들에게도 보였다. 특히 잊지 못할 일은 어느 추운 겨울날 그동안 열심히 그린 작품 100여점을 싸갖고 유명 화가를 찾아가 보았지만 「장사나 하라」는 절망적인 한마디를 들었을 뿐이었다.추억하건데 그때 이미 자신의 그림이 달리자고 있었던 게 아닌가, 말하고 있다. 그 후 군에 입대해서 뜻하지 않게 군악대로배속되어 나팔수가 되지만 그때 비롯된 음악의 이해는 후일 「제 1회 서울국제현대음악제」의 참여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군에있으면서도 그림에 대한 열망을 깨뜨릴 수 없어 외국 미술서적을 사다가 공부를 하며 틈틈히 붓을 들곤 했다. 57년도 갖은 어려움 끝에 제대하자마자 미친듯이 「캔버스」에 매달리기 시작, 1년만에 80여점의 작품으로 대구에서 첫 전시회를 가졌다. 그것은 햇병아리 화가로서 인정받게 된, 말하자면 화단에의 첫발이었다.그 후 60년대 초 한국의 젊은 층에 풍미하던 「엥포르멜」 운동에 불만을 느낀 그는 혼자 돌아앉아 전쟁의 잔해를 주워 일련의「오브제」 작품을 시도하기 시작함으로써 주목을 받는다.처음엔 시대적인 산물인 전쟁의 잔해가 대부분이었으나 점차 사회가 밝아짐에 따라 소재 역시 어두운 면을 극복하게 된다. 60년대 말까지 「오브제」 작품으로 일관하다가 예술의 「장르」가 붕괴 되었음을 의식하게 되자 돌연히 「해프닝」에 공감하는한편, 문학, 연극, 영화, 미술, 의상 등을 포용한 예술 전반에 걸친 종합예술을 부르짓고 나서기도 한다.새로운 예술은 형태상의 문제뿐이 아니고 예술 자체, 본질에까지 개성이 강조돼야 한다고 확신한 탓이다. 이래서 “불과 잔디의 「이벤트」” 로 시작되는 소위 전위예술이라 일컫는 새로운 작업에 매혹당한다.행위를 통해 만나는 물질과 그 상황에 절대적인 관심을 나타내면서 과연 무엇이 미술인가를 돌이켜보게 하는 「이벤트」는 지속되면서 70년대 초까지 평면과의 해후를 거절한다. 그것은 안일한 작업이라고 여겼던 평면에서 이탈, 시간성의 문제에 잠입하려는 과도기적 현상일 수 있었다.걸레로 바닥을 닦고 그 상태로 놔둔 채 작품임을 선언하는 행위속에는 이미 시간성이 깊숙히 개재되고 있음을 살필 필요가있다.또한 지금 막 생산된 일용품을 시장에서 구입해다가 거기에 김구림 자신의 체온과 손때라는 인위를 보탬으로써 “내 것이 아닌 것” 과 “내 것”의 차이를 증거하는 등의 「오브제」 작품의 성격상의 특징은 “내 것”을 만든다는 사실로써 창작의 의미가 될뿐만아니라 원래의 모습을 변모시킨 흔적, 즉 시간성의 부여로 일관된다.시장에서 새 빗자루를 사다가 「샌드 페이퍼」질을 하거나 손때를 묻혀 오랜시간을 두고 사용해서 닳아버린 듯이 자연스러운변모를 가해 골동품으로 등장시킨다는 사실은 곧 시간성의 부여로 재확인 된다.그러나 거기에는 빗자루에 없던 과거가 발생케 되고 또한 예측된 미래가 편승함으로써 비롯된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된다.그것은 새로운 문제였다.그래서 이를 위한 해결방법으로 74년부터는 물감을 사용하는데, 현존하는 상태 위에 물감을 두텁게 칠함으로써 역시 골동품처럼 보이는 시각의 착각을 일으키게 유도했다.결국 둘 다 시간의 차이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방법론에 있어선 엄격히 구별된다. 이러한 작업 도중에 그는 일본에 가서 1년쯤 머물며 판화의 기본을 습득하는 한편, 일본화단을 휩쓸고 있는 현대미술의 세계적 흐름과 경향에 대해 냉철히 관찰, 분석한 뒤 일단 마음속에 정리하고 돌아온다.이 때 「비디오」라는 새로운 매체를 통한 작업의 신선감에 이끌려 여기에도 시간성을 중시, 50년이란 세월을 단 5분으로 압축시키는 변화를 꾀 하였다.한 사람이 걸레로 책상을 닦는 장면이 있다. 반복되는 걸레질을 50년동안 계속하는 모습을 5분으로 묶어 마지막에 그 결과를 보여주는 방법이다.새 걸레가 5분 후에는 완전히 낡아 못쓰게 된 헌 걸레로 변해있다는 자연의 변화, 혹은 인위의 변화로 연유한 시간의 차이가바로 김구림이 포착한 문제의 쟁점인 것이다.이렇듯 함축된 의미로서의 시간성은 「비디오」를 보여주고 나서는 일단 사라지고 만다는 한계성에 부딪힌다. 「비디오」라는 매체를 빌리지 않고선 존재가치가 원점으로 되돌려질 수 밖에 없다는 보존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역시 평면작업에서 그가능성을 찾는 길 밖에 없다고 깨닫는다.그래서 평면에의 복귀를 위한 방편으로 판화작업에 몰입한다. 75년부터 관심을 보인 보존성의 문제, 즉 기록에 대한 애매성을 극복하고자 평면으로 되돌아오지만 소재는 변함없이 일상용품에 머물고 있다.그동안 갖가지 예술 형식을 섭렵한 뒤에 정리되는 표현기법의 하나로서 「메카닉」한 「콤프레서」의 기능을 빌어오는 형태로 나타난다. 평면에 물체를 놓고 「콤프레서」로 물감을 뿜어댐으로써 물체의 윤곽만을 남기게 되는 방법이다.평면 위에 전구가 놓여 있었다는 과거의 일들을 암시하는-전구의 빛이 빛이 아닌 그림자처럼 존재케 되는-비논리성을 유발케 한 시도야말로 기계문명의 차가움과, 동시에 인간의 체취가 없다는 자기확인의 방법인 것이다.또한 기계의 기능에는 인간적인 진실이 결핍되어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메카닉」한 방법은 방법론적인 실험에서 그치고 말 뿐임을 자각하고 말았다.평면에서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손으로 그린다는 의미를 강조함에 있음을 확신케 된 것이다. 그래서 다시금 붓으로 환원된다. 그러나 붓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도 그 방법이 문제였다.그는 하나의 사물이 완성되기까지의 「스케치」를 평면 속에 그대로 남겨 의도했던 바와, 작품으로 완성된 후의 차이를 밝혀주는 일 또한 진실임을 믿게 된다.다시 말해서 창작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변화들, 일테면 작가 자신의 심적인 변화라든가, 시간의 흐름과 구상의 잘못 따위를 평면 위에 노출시켜 보다 깊은 신뢰성을 획득코자 하는 것이다.그러나 거기엔 나른한 정서적인 분위기와 표현의 나약함이 엿보였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불만을 없애고 힘을 주기 위해 연필, 크레용 등을 사용해 선을 삽입시켜 보았지만 역시 명암처리가 안된 상태라서 소재가 걸레일 경우 관념상의 걸레만 보였다.그것은 물체의 그림자이거나 아니면 물체의 허상일 뿐이라고 생각되는 것이었다.더구나 물감으로 걸레를 그려놓고 보아도 걸레의 실체는 보이지 않고 「캔버스」와 물감만이 존재케 됨을 자각하고 만다. 그것은 단지 그림과 물질의 만남이라는 대립적인 긴장감만 고조시키고 있을 따름이었다.그림과 물질 사이의 불안감과 긴장도를 해소키 위한 시도로서 목탄으로 선에 호흡을 주어 보았더니 긴장감은 풀렸으나 목탄이 지닌 재료의 불완전성이 문제로 남았다.그는 이번엔 「캔버스」에 글씨를 추가시켰다. 물체의 이름을 표기 함으로써 물성 자체의 변화를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역시불완전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물질의 진실에 보다 더 가깝고자 이번엔 물질이 놓인 공간의 상황을 표기해 보았다.어느 곳에 이런 물건이 있었다는 상황설명은 그림만으로 부족한 신뢰성을 약속케 되었다. 이로 인해 평면에서 원근을 소거해도 물체의 신뢰감은 남게 되니 물체를 완전히 평면화시킨다 한들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구체적으로 그가 물체를 평면화시킨 이유는 물체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설명으로서 평면 위에 행위지어지는 모든 작품은실체가 아닌 거짓임을 폭로하는 것이기도 하다.평면 위에 무엇을 그린다 하더라도, 설령 그게 입체감 있는 사물일지라도 평면 위에선 평면의 진실 그 이상일 수 없다고 결론한다.그렇다면 평면 위에서의 보다 진실한 작업은 설계임을 착안케 되며, 설계라는 행위에 있어서의 습작의 흔적은 물체의 원초인의미성과 동일시되고, 뿐만 아니라 작가의 의식활동의 변이에서 오는 흐름, 곧 하나의 연결된 행위인 생동감과도 일치한다.여기서 이번엔 진일보하여 물체의 실제적인 길이를 그림에 설계하여 명기케 되니 그림으로서의 물체의 높이는 진실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그리고 최근에 와서는 「메카닉」한 선과 사물의 윤곽만으로 표현하되 그 위에 물감을 덧입혀 물질감을 강조하는 한편 사물의윤곽 어느 한 쪽을 허물어뜨려(지워) 그 상태에서 다시 새로운 원형으로 되살아나는 모습을 찾아보는 작업에 심취하고 있다.이 때 지운다는 의미는 물체가 있었음을 강조함은 물론, 이로 인해 물체의 모습이 더욱 확실하게 되살아나며 특히 이 부분이그의 작품상 가장 핵심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부단히 고뇌하고 사색하며 실험성을 강조해 왔다.예술에 완성이란 있을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의 작업방법은 무한한 가능성의 변수를 지닌 채 시간의 흐름, 그 단면을서술하고 있다.물질과 손의 의미성을 실험하는 근래의 입체작품이라든가, 조각에 나타나는 한 경향은 인간이 사용한 흔적을 보여주는 일에서 벗어나 만들다 버린 듯한 미완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역시 일상용품인 소재는 기계에 의해 제품화된-실용이란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어떤 물건의 최초의 상태를 붕괴(없애거나 허물어뜨림)시킴으로써 미완성의 효과를 얻음과 동시에 아올러 물건의 생산과정을 역순하여 물건의 원형으로 되살아나는 모습을 주시하는 일인 것이다.
‌여기서 미완성이란 끝이 아닌 미래의 창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할 때 김구림의 작업현장은 언제나 예측된 미래일 것이며, 거기서 다시 출발하는 상태의 연속일 것이다.지향된 미래로 진행되는 시간속에 태어나는 작품들은 작가의 현실이다. 그는 인간과 물질에 가해지는 시간의 진실성과 정면충돌함으로써 공감하고, 이해되는 현실의 상황과 그 전개를 하나의 교훈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 양심적인 작업이야말로 시대성에 부합된 창작의 실체가 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또한 작품속에는 어떤 형태로든 우연의 효과가 나타나서는 안된다고 믿는 구조주의에 바탕을 둔 창작태도야말로 순수한 장인의 기질이 아닐까?어쨌든 그의 작품속에 흐르는 공통된 특징은 물질문명에 소외된 인간성의 회복이며, 이를 위한 문명의 산물 또는 잔해인 우리들의 일상용품을 그 자신의 행위(손의 의미성)에 의해 재현, 인간과 물건의 유기적 관계를 실증코자 하는 일인 것이다.김구림, 그는 부단한 문제추구형의 작가로서, 그리고 미술의 「장르」 붕괴를 행위를 통해 역설하듯 다변적인 체질의 작가로서,영원한 미완성의 한 시대속에 살고 있다는 자각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곧 이 시대의 참모습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파수꾼의역할이기도 하다.
김구림 (1936~)

김구림은 회화, 조각, 행위 예술, 설치, 메일 아트, 대지 미술 등 다양한 장르를 실험하고 있는 아방가르드 한국 예술의 선구자이다.
1970년 정찬승, 정강자와 함께 ‘제4집단’이라는 이름의 전위예술 단체를 설립하여 활동하는 등 전위예술을 행하여 한국 예술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최초’라는 단어는 1960년대와 1970년대 김구림의 작품을 묘사하는 데 자주 사용되는 단어이다. 그는 지배적 서사 구조 없이 24개의 이미지 프레임을 1초 단위로 보여주는 최초의 실험적 영상을 제작했으며 김차섭과 함께 한국 최초의 메일아트라 할 수 있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또한, 실험 예술 제작에 대한 의지를 표방하는 정물화 연작을 제작하였다.

< 학력 >
The Art Students League of New York USA 졸업

< 수상 >
2006년 제7회 이인성미술상 수상

< 개인전 >
2014 김구림전  아라리오 갤러리 천안, 천안

< 초대전 >
2013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서울시립미술관 , 서울

< 기획전 >
2014 예술가의 선물-나의 첫 번째 컬렉션   갤러리세인, 서울 강남구 청담동

< 저서 > 판화콜렉숀. 서문당

< 동화집 > 별하나 나하나. 동화 출판사

< 수상 > 제 7회 이인성 미술간 외 무용. 연극상 수상

< 경력 >
The Art Students League of New York. U.S.A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강사
한국아방가르드협회 회원
한국미술협회 회원
한국미술협회 감사
서울현대미술제 운영위원회 위원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회 위원

< 소장처 > 
국립현대미술관, 호암미술관
워커힐미술관, 이스라엘미술관(예루살렘)
베켄카운티미술관(뉴져지,미국)
프랑크푸르트 시민회관(독일)
훗가이도근대미술관(일본)
홍익대학교박물관, 뉴욕시티은행(미국)
대구문화예술회관, 부산시립미술관
서울대학교박물관, 대전시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아라리오미술관
토탈미술관, 한국문예진흥원
수원대학교미술관, 경주아사달조각공원
서울시립미술관, 오사카예술센터(일본)
경기도미술관, 후쿠오카아시아미술관(일본)
리움미술관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