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승 Koo, Cha Soong

‌꽃이 있는 정물, 130.3×162.0㎝ Oil on canvas, 2017


내적인 사유를 옹호하는 동양적인 세계관을  반영하는 구자승

‌글: 신항섭(미술평론가)

인상파가 출현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눈에 보이는 사실을 실제의 모양 그대로 재현하는 사실주의 표현기법은 화가가 몸에 익혀야 할 윤리였다. 적어도 사실적인 묘사력을 갖추지 못하면 작가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사실적인 묘사력에 출중한 작가는 거꾸로 구태의연하게 평가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을 정확히 묘사한다는 것은 한 작가로서의 독립적인 요건임에는 변할 수 없는 일이다. 설령 추상작업을 할지라도 사실적인 묘사력의 완성도는 아주 중요한 요건이다.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익힌 물상에 대한 이해력 위에서 추상작업을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기 대문이다.
‌그렇다면 현대미술이 요구하는 것이 반드시 비대상적이고 비사실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현대미술의 어느 분야에서는 극사실적인 묘사력을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현대의 사실주의 회화는 이전과는 다른 오늘 이 시대를 통찰하는 미적인 감수성을 필요로 하고 있다. 사실주의 회화의 표현영역은 다른 현대미술 양식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많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구자승의 작업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바로 이 시대가 만들어낸 사실주의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대상 및 소재를 눈에 보이는 그대로 충실히 묘사한다는 점에서 보면 1세기 이전의 사실주의 미학이 지시하는 조형성을 충족시킨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전의 사실주의 회화와 그의 그림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무엇을 소재로 하고 어떤 관점에서 접근하며 조형적인 원리는 어디에 근거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시각적인 인상만으로도 그의 그림과 이전의 사실주의 회화와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1세기가 넘는 시간 및 공간의 차이에서 비롯된 환경의 변화와 함께 미의식 및 감성의 차이에 기인한 당연한 결과이다. 그는 현대라는 시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과거의 회화적인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그 자신의 미적 감수성에 솔직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을 보면 과거의 그림과는 조형적인 면에서 그리고 정서적인 면에서 현대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묘사력에 출중한 작가들이 그렇듯이 그는 인물, 정물, 풍경 등 모든 분야를 아우른다. 그리고 모든 작품은 일정한 수준을 유지한다. 한마디로 타작이 거의 없다. 치밀한 묘사력을 기반으로 하기에 허튼 작품이 있을 수 없는지 모른다. 그만큼 작가로서의 자신에게 철저하다는 얘기다. 오늘 한국화단에서 사실주의 중진으로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철저한 자기관리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초기부터 오늘까지 작업의 전모를 살펴보면 한 작가로서의 겸허한 자세를 읽을 수 있다.
‌작품제작을 위한 진지함과 열정 그리고 절제된 감정표현은 그 자체만으로도 성공적인 작가로서의 요건을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다.특히 감정의 과잉을 억제하면서 철저하게 이지적인 태도로 물상과 대결하는 그 치열한 작가적인 정신을 통해 사실주의 회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단순히 이해하기 쉬운 그림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현대인은 그림 속에서 과거의 미술애호가들보다 더 많은 것을 찾아내려고 하는지 모른다.
‌명암을 실제보다 과장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정도에 한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림은 전체적으로 밝고 맑고 명료하다. 바로 지금 눈앞에 놓인 정물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색채가 투명하게 보이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실제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는 묘사기법이야말로 회화적인 기교를 배제한 표현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수단이다. 어쩌면 현대인들이 그의 그림에서 친숙감을 느끼는 것도 자신의 눈에 보이는 사실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는 데 대한 공감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편 그는 정물화의 경우 소재에서도 과거와는 다른 우리 시대의 공산품 및 과일 꽃 따위를 선호한다. 물론 조선백자 및 토기 따위의 옛 그릇이 등장하는 작품도 있지만 대다수는 우리 시대에 만들어진 글라스, 컵, 술병, 꽃병과 같이 공산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소재는 그림에서 느끼는 친숙성과도 관계가 있다. 일상적으로 눈에 익은 탓에 그림 속의 소재로 등장했을 때는 낯설지 않다는 심리적인 친근감을 주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 소재는 대체로 현대적인 조형감각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역시 우리들의 눈 높이와 일치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그의 작품은 현대인의 감수성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현대미학이 풍미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여전히 사실주의 회화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현대적인 미적 감각을 반영한다는,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요구를 충족시키는데 대한 응분의 대가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에 실현되고 있는 현대적인 감각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우선 그는 과거 사실주의 회화에서 요구되는 중후하면서도 어둡게 느껴지는 색채이미지에서 벗어나 밝고 맑은 색채이미지를 지향한다. 흔히 컬러시대라고 말해지는 현대적인 색채감각에 순응하는 것이다. 의도적이기보다는 현재를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의 자연스럽고도 솔직한 색채반응인 셈이다.
19세기의 사실주의 아니 그 이전의 다양한 회화양식에서 가장 중요시한 조형적인 특징의 하나는 사실보다 과장된 명암기법이었다. 빛을 강조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음영이 실제보다 짙어지는 현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빛과 음영의 대비를 중시한 것이다. 이러한 작품은 극적인 요소가 강하기 마련이다.강렬한 명암대비를 통해 시각적인 인상을 강화시킨다는 전략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그의 그림은 우리의 일상적인 시각을 신뢰하는 쪽이다.
 명암을 실제보다 과장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정도에 한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림은 전체적으로 밝고 맑고 명료하다. 바로 지금 눈앞에 놓인 정물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색채가 투명하게 보이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실제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는 묘사기법이야말로 회화적인 기교를 배제한 표현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수단이다. 어쩌면 현대인들이 그의 그림에서 친숙감을 느끼는 것도 자신의 눈에 보이는 사실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는 데 대한 공감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편 그는 정물화의 경우 소재에서도 과거와는 다른 우리 시대의 공산품 및 과일 꽃 따위를 선호한다. 물론 조선백자 및 토기 따위의 옛 그릇이 등장하는 작품도 있지만 대다수는 우리 시대에 만들어진 글라스, 컵, 술병, 꽃병과 같이 공산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소재는 그림에서 느끼는 친숙성과도 관계가 있다. 일상적으로 눈에 익은 탓에 그림 속의 소재로 등장했을 때는 낯설지 않다는 심리적인 친근감을 주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 소재는 대체로 현대적인 조형감각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역시 우리들의 눈 높이와 일치된다.
실제로 그의 그림에서 이들 소재는 현대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긴요한 역할을 한다. 날렵하면서도 유려한 곡선 및 직선을 활용한 현대적인 미적 감각이 반영된 세련된 디자인을 보여주는 것이다. 단순히 소재 자체만으로도 이미 현대적인 세련미가 담긴 그림으로서의 기초가 마련된다는 뜻이다.
여기에다가 이들 소재가 놓이는 방식 또한 이전의 사실주의 조형개념과는 다른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전의 정물화에서는 시각적인 화려함 및 풍요로움을 중요시 했다. 그러기에 소재의 숫자가 많았을 뿐더러 구성이 복잡했다. 소재를 이리저리 늘어놓고 일정한 구도에 집중시키는 듯한 구성방식으로 소재를 배치했다. 그러다 보니 짐짓 시각적인 화려함이 강조되기 마련이었다. 이에 비하면 그의 구성 및 구도는 지극히 단출하다. 어쩌면 거의 금욕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절제된 구성 및 구도를 보여준다.
‌정물화에서 소재는 대체로 화면의 중심에 집중되고 있다. 의도적으로 조밀하게 모아 놓음으로서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는 듯이 보인다. 물론 소재들이 겹쳐짐에 따라 뒤쪽에 놓이는 소재의 경우에는 그 형태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는다. 하나의 덩어리를 전제로 하는 소재의 집중화라는 독특한 구성 및 구도는 이미 모란디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소재를 화면 중심에 집중화 시킴으로써 어떠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소재의 집중화는 사뭇 의도적이다. 자연스러움을 배제한 인위적인 구성이라는 혐의가 짙다. 정물화 그 자체가 인위적인 구성임은 당연한 일이다.
‌전체적인 화면에 비해 현저하게 작은 부분에 소재들이 자리함으로써 공간적인 깊이가 커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렇다. 이와 같은 필요 이상으로 커지는 듯한 공간해석은 소재를 향한 시각적인 집중 및 심리적인 안정감을 준다. 무엇보다도 상대적으로 시거리가 멀어짐으로써 시각적인 부담감을 덜어준다. 이렇듯이 시거리가 멀어질 경우 소재의 형태적인 아름다움에 근접할 수 없다는 문제는 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소재 하나 하나의 형태미보다는 하나의 군집을 이루는 상황이 빚어내는 새로운 조형적인 해석의 아름다움을 주시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경우에는 가능한 한 소재 하나 하나가 가지고 있는 형태적인 아름다움이 개성을 발하면서도 전체적인 조화 및 통일을 모색하는 일반적인 정물화의 구성적인 습속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보다 인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소재의 배치방식은 필연적으로 이지적인 해석을 기다리게 된다. 소재 하나 하나의 형태미보다는 서로 다른 소재들이 겹쳐지면서 만들어지는 선의 변주를 주시하려는 것이다. 하나의 덩어리 속에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선의 변화는 그림에 시각적인 활력과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소재의 집중화는 다른 측면에서도 연구대상이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 중에서 서로 다른 소재들을 화면 중심에 모아 놓는 구도가 적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소재의 배치방식에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점은 전체적인 화면과의 비례가 균형을 잃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라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비례가 반드시 심리적인 불안이나 시각적인 불편함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딘지 예외적이어서 낯설다는 인상이다.
전체적인 화면에 비해 현저하게 작은 부분에 소재들이 자리함으로써 공간적인 깊이가 커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렇다. 이와 같은 필요 이상으로 커지는 듯한 공간해석은 소재를 향한 시각적인 집중 및 심리적인 안정감을 준다. 무엇보다도 상대적으로 시거리가 멀어짐으로써 시각적인 부담감을 덜어준다. 이렇듯이 시거리가 멀어질 경우 소재의 형태적인 아름다움에 근접할 수 없다는 문제는 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소재 하나 하나의 형태미보다는 하나의 군집을 이루는 상황이 빚어내는 새로운 조형적인 해석의 아름다움을 주시하려는 것이다.
그림에서 형태를 만든다는 즉, 조형이라는 것은 반드시 형태를 묘사한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소재를 어떻게 배치하고 어떠한 구성 및 구도를 만들어 가는가 하는 문제도 조형의 하나인 것이다. 그러기에 그가 보여주는 소재의 배치방식 또한 조형적인 해석의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공간의 설정 방법 또한 조형의 범주에 들어간다. 소재는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기에 소재의 크고 작음 및 화면상의 비례 따위에 의해 공간의 의미가 달라진다.
그가 추구하는 공간의 해석은 동양화의 여백개념에 근거하는 것이다. 열린 공간을 상정한다는 뜻이다. 동양화에서의 여백은 '비어있다'는 서양적인 공간개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형태에 대응하는 상대적인 개념으로서의 '비어두는' 공간인 것이다. '비어있음'은 수동적인 태도를 의미하는 반면에 '비어둠'은 능동적인 개념으로서의 태도를 말한다. 능동적인 태도는 무엇인가를 의도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동양화의 여백개념은 비표현적인 공간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여백 그 자체도 표현의 하나인 까닭이다. 소재를 놓는 방식에 따라 공간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그의 여백 개념은 거기에 사유의 여지를 둔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소재가 적은 부분을 차지하고 상대적으로 여백이 크면 그림과 마주하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소재와 감상자의 사이에 공간이 끼어들면서 긴장이 해소되는 것이다. 시거리가 가까운 경우에는 소재와의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게 마련이다. 소재를 바라보는 감상자에게 심리적인 압박감이 몰려드는 것이다. 사람과의 만남에서도 상대가 코앞에 있으면 심리적인 압박감이 클 수밖에 없듯이 그림을 보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소재가 화면을 가득 채우는 그림의 경우에는 호소력이 강한 반면에 시각적인 부담이 따른다. 그의 그림은 바로 이와 같은 시각적인 부담을 해소시키고 있다. 공간을 많이 열어둠으로써 심적인 압박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서 말하는 열린 공간은 동양화에서처럼 '비어두는', 다시 말해 캔버스에 물감을 전혀 바르지 않은 소지 자체로 남겨두기도 한다. 그리고자 하는 소재만이 캔버스의 마대 위에 하나의 섬처럼 존재한다. 이는 확실히 동양화의 여백개념에 합당하다. 먹이나 물감을 전혀 바르지 않은채로 두는 닥종이 그대로의 상태와 같은 것이다.
거기에는 동양화에서처럼 정적이 깃들인다. 그 정적은 정태적인 침묵이 아니라 사유 및 생성의 기운이 가득한 우주의 무한공간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우주를 포괄하는 사유를 매개로 하여 새로운 임의 우주공간의 한 부분으로 존재케 되는 것이다. 모든 물상은 자연계 즉, 시각적으로 인지되는 형태 자체의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의 일원인 자연계가 그를 감싸고 있는 외계 즉, 우주와 일체가 되어 있듯이 물상의 형태는 동시에 우주와 연대를 이룬다.
그런가 하면 소재를 에워싸는 화면공간을 물감으로 채우는 일반적인 조형개념을 충족시키는 작업이 있다. 사실은 이러한 형식의 작업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화면을 소지 자체로 두지 않고 물감을 바르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에서도 배경은 마치 비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눈에 띄는 색채를 지향하기 때문인데 여기에서는 미묘한 감정의 파장을 감득할 수 있다. 캔버스 소지 자체로 두는 여백에서 느끼는 감정이 아니다. 보다 정제되고 절제된 잔잔한 감정의 흐름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느낌은 구체적인 어떤 이미지를 표현하지 않을 뿐 거기에는 무엇인가 담기고 있음을 시사한다. 소재의 형태에 대응하는 어떤 실제를 담는다고 할 수 있다.
또 한가지 그의 정물화에서 관심을 끄는 부분은 거의 고정화되다시피 한 시점이다. 바꾸어 말해 정면 수평구도를 선호하고 있다. 어떤 신념에 이끌리는 듯한 주관적인 의지를 보여주는 동일 시점의 반복은 보이지 않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하는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러기에 소재의 측면 중심을 겨냥하고 있는 고정적인 시점은 냉철한 관찰을 수반하는 듯하다. 집중해서 본다는 즉, 소재를 보고 있는 외부의 어떤 산대적인 존재감이 강하게 와 닿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작품은 감상자로 하여금 긴장감을 맛보게 한다. 느슨한 일상적인 태도를 바꾸어주는 것이다. 한 치의 허술함도 용납하지 않는 냉철한 시각적인 이미지 탓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의 평정을 가져온다. 사실 일상생활 공간에 자리하는 물상들은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어떤 질서나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혼란스럽다고 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타성에 젖어 그러한 사실조차도 의식하지 못한다.
그런데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 그의 그림은 정리가 잘 되어 있고 절도가 있는 질서의 상징처럼 다가온다. 그의 그림에 부여되고 있는 어떤 정형성은 곧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는 질서의 표상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림과 마주하면서 경건해지고 마음이 깨끗이 씻어지는 듯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측면에서 바라봄으로써 소재들은 자연히 수평의 바닥 면에서 볼 때 옆으로 일직선을 이루게 된다. 일렬 횡대가 되는 셈이다. 아울러 소재는 대체로 화면의 중앙 또는 절반 이하의 아주 아래쪽에 배치된다. 이에 따라 화면 상단의 공간이 커지게 된다. 균형감각을 상실한 듯한 구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시각적인 안정감은 특별하다. 어찌 보면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소재의 배열방식인데도 오히려 시각적인 쾌감이 있다. 정해진 규범에 따라 정리 정돈된 물상의 존재방식은 시각적인 쾌감과 함께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있다. 제식흔련에서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전후좌우가 자로 잰 듯이 도열해 있는 모습을 보면 아름답다고 느끼듯이 그의 그림에서도 유사한 감정을 느낀다. 흐트러진 가운데 조화를 모색하는 일반적인 정물화의 소재배치 방식과는 전혀 다르기에 새롭게 보인다. 그리고 시각적인 쾌감을 느낀다.
이처럼 직선적인 소재배치 방식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들의 미적 감수성이 현대 도시의 기하학적인 선에 익숙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또한 현대 도시인으로서의 그러한 도회지가 지니고 있는 시각적인 이미지에 젖어 있기도 하거니와 그와 같은 사실을 작가적인 의식으로 통찰함으로써 작업에 자연스럽게 반영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작가가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은 반드시 현실참여를 전제로 하는 것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의 경우처럼 순수미를 추구하는 작가에게는 미학적인 관점을 더욱 중요시하는 것이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어떤 식으로든지 현실감각에 일치될 수 있는 표현방식을 찾아낸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세상을 직관하는 예술가로서의 현실인식의 한 표출일 수 있는 까닭이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그는 전형적인 사실주의 작가로서의 이지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외부세계를 향한 차가운 시선으로 물상의 외적인 형태미를 훑어가면서 그 자신의 미학적인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는 그 절정에 이른 손의 솜씨에 비례하는 정확한 눈 및 색채감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요건은 사실주의 작가에게는 필수적이다.정물화와 함께 인물화 및 누드화, 그리고 풍경화에서도 그만의 독특한 색깔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색깔이란 그만의 정서 및 조형적인 특징을 의미한다. 어느 장르이든 간에 고요한 정적인 분위기로 물들어 있다는 점도 하나의 특징이다. 어느 면에서 감정의 절제 및 겸양을 미덕으로 여기는 유교적인 정서에 일치한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는 그 자신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한발 물러서는 입장을 취하는 그의 성품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동양인의 공통적인 특성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그는 동양적인 정서를 그림 속에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누드화에서도 도발적인 정면 포즈보다는 뒷모습의 포즈를 선호하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완전히 드러내는 것보다 적당히 감추는 데서 오는 은근함이야말로 동양적인 미학의 한 특징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다. 직접적인 표현이 아닌 간접적인 표현이 오히려 여운이 길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튼 그의 누드화에서는 체모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의식적으로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이미지를 지양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부분이다.그래서일까. 그의 누드화는 성적인 매력이 현저히 감소하고 있다. 반면에 누드의 외적인 형태에 대한 미적인 탐닉의 시간은 길어지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감상자의 시선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까닭이다. 아무래도 동양인에게 누드화는 편한 상대는 아니다.
‌체모가 드러나는 정면 포즈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듯이 체모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뒷모습의 포즈는 여체의 윤곽이 만들어내는 곡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심취히게 만드는 시간적인 여유를 준다. 그러므로 탐미적인 태도로 작품을 감상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코스튬에서도 이러한 동양적인 정서는 어김없이 드러난다. 우선 모델의 포즈가 아주 단아하다. 자세가 단정하고 표정이 담담해서 정갈한 분위기마저 감지된다. 번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린 표정이기도 해서 친근감이 들지 않지만 그림이 때로는 교훈적인 효과를 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보면 그리 어색하지는 않다. 한마디로 엄격한 유교적인 가풍을 통해 몸에 밴 겸양의 태도가 반영되어 있는 포즈이다. 표정이 굳어있는 듯하나 그것은 내적인 감정을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동양여성의 일반적인 태도이다. 되도록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가운데 주변의 공기조차도 정적인 분기기에 빠뜨리는 미묘한 정서를 담고 있는 것이다.
풍경화도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멀지 않다. 정물화처럼 풍경화의 대다수는 대체적으로 화면의 하단으로 내려와 있는 구도가 특징이다. 또한 시점은 그 보다도 훨씬 낮다. 따라서 밑에서 올려다 보는 시점 설정이 특이하다. 이런 식의 특별한 구도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역시 정물화의 관점 그 연장선상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산길, 산, 들녘, 집 따위의 풍경이 등장하는데 어느 작품이나 한결같이 고요한 분위기에 젖어 있다. 그림을 보고 있음으로써 저절로 심신이 정화되는 듯한 감정에 이끌린다. 자연의 형태적인 아름다움 그 자체보다는 신비적인 기운이 감도는 대자연의 존재성에 대해 시선을 돌리게 하는 힘이 있다. 그것은 동시에 우리 자신의 내부로 시선을 옮기게 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 그는 정물이나 인물이나 항시 정태적이고 관조적인 이미지를 지향한다. 간단히 눈으로 이해되는 그런 외적 형태미에 주력하는 그림의 영역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나 인간의 내적인 세계를 반영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사유가 깃들인 그림이 아니고는 싱겁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는 뜻이다.
자연연령 환갑이면 세상에 대한 이해방식에서 물리가 튼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풍부한 경험 및 지식이 뒷받침되는 시점이다. 이제 그는 그러한 시간대로 성큼 들어서고 있다. 그림 여러 곳에서 이미 그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농염한 미를 즐기는 시간과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구자승 ‌

1941년 4월 24일, 서울특별시‌

■학력
‌1986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1981온타리오예술디자인대학 미술과
‌1969홍익대학교 회화과 학사
■수상
‌2010제30회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상
2007옥조근정훈장
2000제9회 오지호 미술상
1999제13회 예총예술문화상 공로상
1999세계평화교육자상
■경력 (‌2017.05 ~)
한국미술협회 상임고문
상명대학교 명예교수
세계미술문화진흥협회 부이사장
상명대학교 미술학과 교수
한국인물작가회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