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  Chang, Uc-Chin
 
무제 (Untitled), Oil on canvas, 45.7×35.5cm, 1988
장욱진은 1918년 1월 충남 연기군 동면의 대지주 가문에서 4형제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시ㆍ서ㆍ화에 안목을 지니고 있어 스스로 병풍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리곤 했고, 아이들에게도 그림을 그리게 했다고 한다. 당시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그의 고모는 조카들의 교육에도 열성을 보여 그의 가족을 서울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7세 되던 해 그의 아버지가 갑자기 타계하자 이때부터 고모가 그의 교육을 책임지게 되었다.
가슴에 품은 이상세계를 캔버스에 펼치다
장욱진 생가. 장욱진은 1918년 충남 연기군 동면의 대지주 가문에서 태어났다. 6세 되던 해 서울 내수동에 있는 고모의 옆집으로 이사하였고, 그 다음해 서울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서화와 골동품을 애호하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공부보다는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에는 도화책(지금의 미술교과서)에 그려진 까치를 보고 세부묘사를 생략한 채 온통 까맣게 그렸다가 최하위 점수인 병점을 받기도 했고, 3학년 때는 유화 까치 그림이 일본인 교사의 소개로 ‘전일본소학생미전’ (히로시마 개최)에 출품되어 일등상을 받게 되는 등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그 후 그는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복중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미술반에서 그림 그리는 일에 열중하였는데, 이때 동경예대 출신 미술교사의 수업을 통해 그 당시 유행하던 입체파와 피카소의 미술세계를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 역사교사에 항의한 사건으로 인해 퇴학처분을 당한 후 화가 공진형의 화실에서 그림 그리기를 계속하였다. 퇴학 처분은 그렇지 않아도 그림 그리는 일을 반대하던 고모에게 커다란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결국 몰래 그림을 그리다 발각되어 고모로부터 호되게 매를 맞게 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전염병인 성홍열을 앓게 되자 그는 고모와 평소 인연이 깊은 만공선사가 거처하던 충남 예산의 수덕사에서 6개월간 조용히 쉬면서 요양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수덕사를 찾은 나혜석과 만나게 되었으며 나혜석으로부터 그림에 대한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장욱진의 그림이 고전적 아카데미즘식으로 묘사에만 충실하기보다는 작가의 주관이 강조되었던 점이 나혜석의 공감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의 일은 장욱진이 화업에 대한 신념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1) 초기: 자전적 향토세계(1937~1949)
1936년 20세의 나이로 양정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한 그는 4학년 때에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제2회 전조선학생미술전람회’에 < 공기놀이 >를 출품하여 최고상을 받았다. < 공기놀이 >는 화가의 서울 내수동 집의 풍경을 그린 것으로 고향 연기군 집에서 올라와 함께 기거하면서 가족의 시중을 들었던 하인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전통적인 한옥과 한복을 입은 인물들이 바쁜 틈을 타 공기놀이 하는 광경을 수수한 색감과 꽉 채워진 구도로 표현한 이 작품은 당시 화단에서 유행하던 향토색 경향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아마도 그의 작품이 최고상을 받게 된 데에는 당시 화단의 이러한 경향이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때 최고상과 100원의 상금을 받게 되자 장욱진은 더 이상 집안의 반대에 부딪히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양정고보에 재학하던 당시 그린 것으로 1937년 조선일보가 주최한 ‘제2회 전조선 학생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최고상인 사장상을 받은 작품이다. 화가와 가족이 머물던 서울 내수동 집의 풍경과 기거하던 하인들의 한가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양정고보를 졸업한 후 1939년 4월에 일본의 제국미술학교(지금의 무사시노미술대학)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1943년 9월에 졸업하였다. 그가 유학하던 당시 일본의 상황은 1937년의 중ㆍ일전쟁을 시작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는 전시체제의 기간이었다. 그로 인해 국수적인 성격이 사회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화단에서도—비록 서구의 중요한 사조, 예컨대 야수파, 미래파, 초현실주의, 추상회화 등의 화풍이 그전부터 도입되어 성행하고 있었으나—전쟁의 영향으로 전쟁화나 국수적인 내용이 강조되었다.
 이와 같은 전체 상황 속에서 장욱진의 유학생활을 파악하는 것이 그의 초기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아직 이 부분에 대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부족하나마 대학 1학년 때 그린 < 소녀 >와 당시 그가 하숙방에서 작업하던 광경을 찍은 한 장의 사진, 그리고 관련된 인물들의 증언을 통해 유학 당시의 작품경향을 파악할 수 있다.
 유학시절 그는 고향에 대한 소재와 주제를 많이 그렸다. 그 때문인지 장욱진은 주위로부터 그림에 일본풍이 안 보인다고 비판하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림을 멋대로 그린다는 지적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은 장욱진이 유학시절부터 나름대로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미 양정고보 재학시절 연습한 그림들 틀에서 뜯어낸 천만 해도 성인 허리에 닿을 정도로 많은 양의 그림(지금은 소실되었음)을 그렸다는 유족의 회상에서 알 수 있듯이, 장욱진은 유학하기 전에 이미 대상을 그대로 나타내는 재현적인 조형방식에 있어서는 그 수련을 마쳤다. 이는 그가 유학 초기부터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확보하는 실마리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소녀 >도 그와 같은 정황에서 그려진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유족에 의하면 작품의 인물상은 장욱진의 고향에 있던 산지기의 딸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한다. < 소녀 >에서는 화면 어디에서도 일본풍 혹은 당시 일본화단에 성행하던 화풍의 흔적이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인물의 표현적인 형상과 전체적인 구도 및 색채는 마치 르네상스 시대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보는 듯하다.
 추측컨대 장욱진은 유학시절 당시 화단의 움직임이나 학교 교육에서 영향을 받기보다는 책과 같은 간접적인 매체를 통하여 유럽의 현대미술뿐만 아니라 로마네스크ㆍ비잔틴을 비롯한 중세미술, 이집트나 중동의 고대미술, 멕시코 민속미술, 혹은 아프리카의 원시미술 등과 같이 보다 민족적ㆍ토속적인 기원과 고유의 정체성이 뚜렷한 미술품들에 더욱 관심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 소녀 >는 그러한 관심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추측은 장욱진이 이미 유학시절부터 상당히 고가였던 헤이본사[平凡社]의 『세계미술전집』(1939)을 소장하고 있었으며, 훗날 아이들의 머리를 손질할 때도 마치 화집에 있는 이집트 여인풍으로 해주었다는 장녀의 회고를 생각할 때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일본의 제국미술학교 1학년 때 그린 작품이다. 화가의 고향 집안의 선산을 관리하던 산지기의 딸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전과는 달리 배경을 생략하고 평면적인 구성이 강조되었다.
귀국 후 1945년 장인인 역사학자 이병도 박사의 주선으로 국립박물관 진열과에 취직하여 도안과 제도 일을 맡았으나 1947년에 사직하고 만다. 하지만 이때 박물관에서 얻은 전통미술과의 만남은 작가의 화풍에 영향을 주어 전통미술과 관련된 도상들이 이후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장욱진은 같은 해 김환기, 유영국, 이중섭 등과 함께 ‘신사실파’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조형적으로 아카데미즘을 거부하고 전통적인 요소의 현대적 번안을 연구한 모더니스트들의 회합이던 ‘신사실파’는 당시의 이념적 대립이 극심하던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작품에 열중하자는 취지로 결성된 모임이기도 했다.
 그는 1949년 ‘제2회 신사실파 동인전’에서 < 독 > 등의 작품들을 발표하였는데, < 독 >은 그의 작품세계 전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과감하게 화면의 중앙을 가득 차지하도록 독을 배치하고 그 뒤로 앙상한 나무를 걸치게 한 비현실적이며 과감한 구도와 그러한 소재들이 현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자전적 성격은 전체 작품세계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1949년 11월 28일부터 12월 3일까지 열렸던 ‘제2회 신사실파 동인전’에 출품된 작품이다. 작가의 관심이 인간에서 자연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크고 둥근 독과 작고 앙상한 나무, 화면 앞 쪽의 까치가 서로 대조를 이루어 강한 긴장감을 형성하고 있다.

2) 중기: 자전적 이상세계(1950~1974)
중기로 분류될 수 있는 이 시기는 전쟁이 일어나던 때로부터 덕소에 거주하던 때까지의 기간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 장욱진의 정서는 초기에 보여주던 향토적 세계를 뛰어넘어 보다 이상화된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나아간다. 필자1)가 보기에 그와 같은 이상세계에 대한 염원을 일으킨 하나의 계기가 전쟁이었던 것 같다.
 전쟁이 일어나자 그의 가족들은 1951년 1ㆍ4후퇴 때 부산으로 피란하였다. 다행히 몸은 전쟁으로 인한 재앙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전쟁은 그로 하여금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여력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폭주(暴酒)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그해 9월 비교적 전쟁의 상흔이 덜한 고향 연기군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그곳에서 어느 정도 심신의 안정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고 이때 나온 대표작이 바로 < 자화상 >이다. 그는 고향에서의 피란 생활과 이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화가가 고향인 충남 예산군 내판에 피란해 있던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화가의 작품세계 전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전쟁의 와중에 있을 리 만무한 목가적 풍경과 연미복으로 정장한 자신의 모습에서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우러나오는 비애를 느낄 수 있다.
오랜만에 농촌 자연환경에 접할 기회가 된 셈이다. 방황에서 안정을 찾으니 불같이 솟는 작품의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 간간이 쉴 때에는 논길, 밭길을 홀로 거닐고 장터에도 가보고 술집에도 들러본다. 이 그림은 대자연의 완전 고독 속에 자기를 발견한 그때의 내 모습이다. 하늘엔 오색구름이 찬연하고 좌우로는 풍성한 황금의 물결이 일고 있다. 자연 속에 나 홀로 걸어오고 있지만 공중에선 새들이 나를 따르고 길에는 강아지가 나를 따른다.
 그는 ‘외롭지 않은 대자연 속의 고독’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당시 전란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이 작품은 온통 아이러니이다. 우선 전쟁이 일어난 가운데 이 같이 풍요롭게 물들어 있는 논이 있을 리 없으며, 더욱 기이한 것은 그 논 사이 길로 신사풍의 정장을 한 채 팔자걸음을 걷고 있는 작가의 존재이다. 부인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전쟁의 혼란 중에서 화가 자신의 꿈꾸는 삶을 그린 것이며, 화면에 나타난 풍성한 황금물결, 공중의 새, 길의 강아지는 고향에 실제로 있던 광경이 아니라 가공된 상상이었다. 특히 화면에서 풍겨지는 평화로움과 한가함은 전쟁으로 인해 빼앗겨버린 현실과 비교됨으로써 그 역설적 힘이 커질 뿐이다. 이 시기부터 그는 현실 상태에 대한 반작용을 이상적 상태라는 역설적 방향으로 펼쳐가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1954년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취임하지만 재직 6년 만인 1960년에 교수직을 사임하고 만다. 사임의 결정적 이유는 그 자신이 창작에 전념하고 싶고, 누구를 가르칠 체질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후 집안의 생계는 고스란히 서점을 운영하던 부인의 몫이 되었다. 학교를 사직한 후 그가 취한 가장 커다란 변화는 1963년(47세)에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에 속하는 덕소에 화실을 마련하고 그곳으로 거처를 옮긴 일이었다.
 흔히 덕소시절로 이야기되는 그곳의 생활은 그 후 장장 12년 동안 계속된다. 말이 12년이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집에서 혼자서 생활한다는 것은 보통사람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결정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외로움과 불편함을 스스로 청하였던 장욱진은 중년의 시기를 꼬박 다 보내고 노년의 할아버지가 되어서야 그곳을 나오게 된다. 그가 서울을 싫어했던 것처럼 도시화로 번잡해지는 덕소를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덕소에서의 생활은 그 세월의 길이만큼, 자연의 섬세함만큼, 그리고 그의 고민만큼 많은 실험과 좌절을 맛보게 하였고 그가 새로운 단계로 승화되는 시기였다. 하루에 4시간 이상을 자지 않았고 늘 새벽이면 일어나 산책하고, 다녀와서는 화폭을 마주하며 그림을 그리는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 작업이 막히거나 지치면 술로 휴식을 취했다.
 덕소에서 장욱진은 지금까지의 반추상 형식과는 달리 대상과 재현이 완전히 사라진 추상작품을 시도해보았다. 당시 서울의 화단에 거세게 일고 있던 앵포르멜(제2차세계대전 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서정적 추상회화의 한 경향)의 바람이 그를 흔든 것이다. 1962~1964년의 기간 동안 화가는 순수추상을 시도해보기도 했지만 왠지 자신의 것 같지 않고, 다시 형상을 원래상태로 되돌렸지만 여전히 자신할 수 없는 그런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의 제자였던 조각가 최종태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한다.
 장욱진 선생은 비교적 초년기부터 자기의 어떤 특수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계속 고집하였다. …… 그가 그 자리에서 끄덕 않고 앉아 있는 동안 서울의 화단에는 여러 개의 회오리바람이 불어왔다가 어디론가 사라져갔다. 액션 바람이 있었다. 한ㆍ일 국교가 수립 된 뒤에 일본 바람이 있었다. 내부로부터는 민족적 민속 바람이 있었다. 미니멀 바람, 극사실 바람, 추상 표현주의 바람, 민중 미술 바람 등이 몰려오고 밀려가고 하는데, 그 속에서 그는 애초의 그 자리에 그냥 앉아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65년에는 단 한 점의 유화밖에 그리지 않았고, 1967년의 작품으로도 남아 있는 것이 한 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에게 있어 1960년대는 전반적으로 다른 시기에 비해 거의 그림을 그리지 못한 때였다. 당시 “나는 누구인가를 많이 고민했다”는 유족의 기억이나 “그림을 엎어놓았다 제쳐놓았다 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는 자신의 이야기가 당시 그의 고민과 갈등을 보여준다.
 < 눈 >은 당시 그가 실험하던 추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예에 속하는 작품이다. 덕소의 산, 혹은 강바닥에 쌓인 눈을 보고 그린 작품이라고 하는데, 거의 화면의 상하좌우를 구별할 수 없는 전체성과 평면성을 띠고 있으며, 그의 작품 중 비교적 큰 편에 속하는 53.0×72.5cm의 화폭이었다. 붓의 사용 또한 매우 격정적인데 이러한 전체적 양상을 통해 그가 당시 서울을 중심으로 전개된 앵포르멜 경향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이러한 방식을 오래가지 않아 그만두게 된다.
 덕소의 산 혹은 강바닥에 쌓인 눈을 보고 그린 작품이다. 이 시기 화가는 추상작품들을 시도하였으며 추상은 대개 현실의 대상을 바탕으로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순수추상의 실험기를 마치고 등장한 작품 중의 하나가 < 진진묘(眞眞妙) >이다. 이는 1970년 정초에 명륜동 집에 머물던 중 예불을 드리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아, 그길로 덕소 화실로 돌아가 일주일간 식음을 전폐하며 그린 작품이다. ‘진진묘’는 독실한 불교신자인 부인 이순경 여사의 법명으로서 이 작품은 아내의 첫 번째 초상화이자 그가 직접 제목을 붙인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우선 이 작품에서는 대상의 생략과 압축이 돋보이며 인물의 자세와 표정이 바탕의 색감 및 질감과 어우러지면서 고도의 상징성이 우러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다. 그의 강렬한 집중력과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에 대한 염화시중의 마음이 화면에 응축됨으로써 얻어진 결과라 할 수 있다.
 예불을 드리는 부인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불교를 소재로 한 최초의 작품에 해당된다. 특히 간결하고 압축된 선만으로 사람의 형태를 표현한 것은 부인의 외면이 아닌 내면의 본질을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간결한 화면과 단아한 선에서 경건한 분위기가 돋보인다.

3) 후기: 종합적 이상세계(1975~1990)
1975년 5월 화가는 12년간의 덕소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의 명륜동으로 돌아온다. 덕소를 떠난 것은 주위에 공장이 들어서고 국도가 복잡해지면서 예전의 모습을 잃어간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60대를 앞둔 시점에서 독신생활을 고집하기에는 건강이 여의치 않은 점도 중요한 이유였다. 서울에 돌아온 그는 한옥 앞마당에 연못을 만들고 아담한 초가 정자를 지었으며, 틈틈이 시골여행을 하면서 스케치북에 매직펜이나 사인펜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큰스님이자 동국대학교 총장을 지낸 바 있는 백성욱(1896~1981) 박사와 함께 자주 시골의 사찰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1977년 어느 한 여름에 통도사를 찾았다가 불력이 높은 것으로 이름난 경봉(鏡峰, 1892~1982)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경봉이 대뜸 화가에게 “뭘 하는 사람이냐”고 묻자 장욱진은 “까치를 잘 그리는 사람”이라 답한다. 이에 스님은 “입산을 했더라면 진짜 도꾼이 됐을 것인데”라고 하자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것도 같은 길”이라 대답한다. 그 대답을 듣던 스님은 “쾌(快)하다”라며 그에게 ‘비공(非空)’이라는 법명을 지어주게 되었다. 화가를 도꾼으로 표현한 이 일화에서 짐작되듯, 화가의 심상은 후기에 들어 더욱 초연해지며 화면에서도 탈속의 이미지가 강조된다.
 예를 들어 1975년에 그려진 < 초당 >의 작품에는 마치 화선지 위에 먹을 듬뿍 먹인 붓으로 그린 것 같은 유화의 농담이 화면의 주된 경향을 이루고 있으며, 차를 달이고 있는 아이, 커다란 나무그늘 아래의 초당에 양반 자세로 앉아 있는 인물의 모습과 같은 소재들은 전통적인 문인 산수화의 도상들로서 ‘도꾼’이 다 된 화가의 심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신선들의 풍류를 현실에서 맛보고자 하는 작가의 정취는 다른 작품들에서 불교, 도교, 민화적 성격들이 다양하게 종합된 것으로 나타난다.
 덕소 시기 후반부터 등장하던 수묵화식의 표현방법이 이제 완연히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담채 유화식 표현기법과 함께 초당의 인물과 차 달이는 동자, 나무 밑에 쉬는 사람, 그리고 새와 해의 모습에서 전통적인 신선도의 풍류를 맛볼 수 있다.
1980년부터 시작된 수안보에서의 생활은 이러한 풍류적 정취를 확고히 하는 시기였다. 이는 무엇보다 수안보 시절에는 덕소와 달리 부인과 함께 생활할 수 있었고, 주변의 빼어난 자연 경치나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근처의 사찰들로 인해 그가 심신의 평정을 얻을 수 있었던 점이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일과는 새벽에 일어나 한참을 작업한 후 시냇물을 따라 5리쯤 걸어 온천을 다녀오는 일이었다. 그는 집을 둘러싼 본래의 시멘트 담장을 헐어 토담을 만들고 거기에 싸리문을 달아 완전한 시골집으로 만드는 등 되도록 자연의 상태에 가까워지려 하였다. 그러나 1985년 가을, 그는 덕소를 떠났던 것과 같은 이유로 수안보의 화실을 떠나게 되었다. 주변이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줄줄이 상업지역으로 변모해갔기 때문이다.
 번잡한 서울을 떠나 마지막으로 거처를 정한 곳이 경기도 용인군 구성면 마북리의 한 오래된 집이었다. 그의 나이 70세 되던 1986년 봄의 일이다. 특히 세상을 떠나는 1990년까지 용인에서 지낸 5년간은 평생에 걸쳐 제작된 720여 점의 작품 중에서 거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220여 점이 그려진 가장 왕성한 창작의 시기였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렇게 폭발적인 양의 작품을 제작하게 하였을까? 지금껏 즐겨 사용하던 산, 까치, 집, 나무 등의 소재들은 어느덧 그의 평생의 동무가 되었으며, 조형적인 배치도 모든 한계를 넘어 자유자재로 구성되었다. 그러면서 1950~1960년대의 기하학적 구성과 동화적 심상이 다시 등장하는 등 복고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후기에 들어 화면의 실재적 풍경이 줄어들고 보다 환상적이고 관념적인 경향이 강해졌다. 가령 < 나무 >에 나타난 공간은 도저히 현실적인 풍경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기하학적인 단순한 구성을 바탕으로 중앙의 둥근 나무 주변에 배치되어 있는 소재들은 마치 하나의 무늬로서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경험에서 뽑아낸 소재들이 반복되어 사용됨으로써 작품에 따라 하나의 무늬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며, 관념적 풍경화를 구성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념성은 후기 작품세계의 중요한 경향을 이루고 있다.
 용인 시기의 작품은 수안보 시기에 비해 먹그림의 필획이 사라지고 기하적적인 구성과 관념적이고 환상적인 풍경이 좀더 강조된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는 < 강변풍경 >에서도 그러한 관념성을 확인할 수 있다. 안개 낀 강가를 배경으로 초막이 한 채 지어져 있는데, 가부좌를 튼 도인의 모습은 영락없는 장욱진 본인의 모습이다. 주변에는 학과 까치와 개가 화가를 바라보고 있어 마치 오랜 친구인 듯하고, 물빛과 하늘빛이 하나가 된 푸르른 선경(仙境)을 배경으로 뱃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은 한가롭기 그지없다. 그는 마치 무릉도원의 신선 같기도 하고, 선비 같기도 하다. 그러나 실재로 그가 거주하던 용인 집 근처에는 강이 있지도 않았으며, 살던 집도 초가집이 아니었다.
 이러한 ‘현실’에 비추어볼 때 화면 속의 세계는 순전히 그의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의 세계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관념적이다. 또한 화면에 등장하는 모든 소재들이 그 이전 시기부터 즐겨 사용되어왔던 것들이며 전통적인 산수화에서 사용되는 도상임을 알 수 있고, 그는 단지 자신의 심상을 표현하기 위해 그들을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가히 관념 산수화의 진수를 보는 듯하다.
 안개 낀 강가를 배경으로 초막이 한 채 지어져 있고, 가부좌상을 한 화가의 모습이 마치 도인과 같다. 화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난초, 강, 초막, 차 달이는 동자, 학 등은 전통적인 문인 산수화의 제재로서 현실을 초탈한 화가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평생 돈 버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점, 그림을 그려도 팔기보다는 간절히 원하는 이에게 아무 대가 없이 줘버리고 말았던 성품이나 나이를 먹어가기보다는 뱉어간다는 삶의 철학을 기억할 때 그의 마음은 진작부터 이상세계에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그는 (필자가 생각해왔던) 그림으로 자신이 동경하는 이상향을 만들어가는 작품방식과는 반대로, 이미 그의 마음에 도래한 이상향을 그림을 통해 밖으로 내보이는 방식으로 작품에 임했는지도 모른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가슴에 품은 이상세계를 캔버스에 펼치다 (한국의 미술가, 2006. 2. 1., 안휘준, 박정혜, 이내옥, 박은순, 이예성, 변영섭, 진준현, 이선옥, 김정희, 정형민, 김영나, 정영목)

장욱진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연기군 연동면 송용리
1917년 11월 26일-1990년 12월 27일 (72세)
현대미술사에서 한국적 추상화를 확립한 거장 중 한 명으로 높게 평가 받는 화가이다.
그는 일상적 이미지를 정감 있는 형태와 독특한 색감으로 화폭에 그려냈다
생활의 주변 즉 마을·가족·가로수·건물·자전거·어부 등 동화의 이미지를 프리미티브한 생략법을 쓰는 작가이다. 

작품으로 〈들〉, 〈까치〉(1987), 〈두 아이〉, 〈집〉(1981)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