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한 사회의식, 새로운 예술의지 -김기창
예술가의 어떤 숭고한 사회의식의 행동적 실천은 한국에서는 극히 드문 일이다. 만인이 눈길을 보낸 감복의 사례가 별로 없는 것이다. 미술계의 경우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이제 미술계는 한 뚜렷한 사례를 감복과 경의의 눈으로 보게 되었다.
전통화단의 거인 운보 김기창 화백의 한국 농아복지회를 위한 온갖 성력(誠力) 지원이 그것이다. 운보 자신, 절망적 농아의 운명에서 위대하게 그를 극복한 빛나는 본보기의 화가이다.그가 스스로 이룩한 정상급 화가로서의 작품 수입을 대폭 할애하여 암담과 절망의 극한이었던 그의 과거의 현실적 상황인 많은 농아들의 존재 지원에 적극 나서기 시작한 것은 1980년에 한국 농아복지회 회장에 추대되면서부터였다.
그것은 지난날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해 준 또 다른 운명신에 대한 사명적 헌신으로 보게 한다. 칠순 고령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그의 작품 열정과 최초의 새로운 시도까지도 접함으로써 운보의 풍부한 세계와 경지와 특질에 또 한번 이끌리며 감명하게 될 것이다. 사회적인 의도의 이 작품전은 1970년대 후반부터의 운보 예술의 새로운 작품의 통칭 '바보산수' 및 '청록산수' 계열과 최근 청주에 낙성시킨 별저(別邸)에서 또 달리 노익장의 실험 적 창작 정신을 발휘하고 있는 특이한 현대적 서상도(瑞祥圖)가 중심이다. 노년의 운보 심경을 반영하고 있는 바보산수 연작은 민화 수법을 빌은 자유로운 화취와 무격식의 분망한 필의로 한국의 풍정과 화조를 주제삼은 독특한 화면이다. 반면, 청록산수 에서는 과거의 전통적 본색과는 달리 이 역시 운보의 화법이다.
짙은 청록 색조가 전체 화면을 지배하는 하경산야(夏景山野)를 배경으로 소등에 올라타고 피리를 불며 가는 시골 소년의 평화로운 정경, 혹은 깊은 자연 공간을 날고 있는 들새의 생명감을 그리는 향토적 관조의 화의(畵意)이다. 한편, 최근의 새로운 시도인 서상도(瑞祥圖)들은 바보산수와 연결되면서도 한층 파격적 단순화와 현대적 표현 의식으로 전개된다. 붉은 해와 회색의 반달 또는 초생달, 그 가까이에는 상징적인 오색의 서운(瑞雲)과 학의 비상, 그리고 그 밑으로 청록의 삼신산(三神山)과 그 밖의 심산선경(深山仙境)이 나타난다.
그 심산경(深山景)에는 사슴이 달리고, 다른 십장생의 존재로서 소나무·불로초·거북 등이 그림의 형상으로서가 아니라 채필(彩筆)의 글씨로 시사돼 있다. 이러한 형식은 물론 과거의 전통 회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대적 발상이다. 운보에게서 독자적으로 시도된 이 낱말 글씨의 회화적 기호화는 대단히 묘미있는 암유(暗喩)로 발언한다. 이는 스스로 안주하려 하지 않는 운보의 부단하고 진취적인 정신적 기질과 의욕의 단면이다.
출처 : 한국예술디지털아카이브
이구열/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