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사고와 작업에만 성실하고 탐구적인 고독한 내공형의 작가 -문학진
문학진은 필자와의 대화에서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파가 전개시킨 지적 구성작업, 그 중에서도 브라크의 정신적 형상사고에서 감화와 영향을 받은 면을 시인한 적이 있다. 그는 또 초현실적인 키피코의 예술에도 각별한 관심을 가졌었다고 한다. 그것은 1950년을 전후로 한 시기, 그러니까 그가 미술학교 상급반이던 무렵부터 국전 등 주요 전람회에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던 시기를 말하는 것이다. 8·15 민족 해방과 더불어 국내에서 처음으로 서울대학교에 미술전공과가 생기자(후에 미술대학으로 발전) 문학진은 그 1회 입학생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대학에서 그를 지도한 어떤 교수나 국내의 다른 어떤 화가에게서도 특별히 깊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미술학교를 채 졸업하지 못하고 6·25의 참변과 전란을 경험한 그는 새로운 지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그의 예술사고를 전위적인 방향으로 몰고 갔다. 그는 8·15 이후 제1세대의 신예화가로서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 예민한 감성과 혁신적인 작품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 한 예로서 1953년의 제3회 국전에 출품하여 문교부장관상을 획득했던 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참신하고 혁신적인 화면구성이었다. 그것은 다분히 입체파적인 작업이었다. 그리고 1958년 작품인 < 자전차에 부딪친 운전수 > 등이 모두 1950년대의 문학진 예술의 실험기를 말해 주는 작품들이다. 앞에서 작가 자신이 밝혔듯이 이 시기의 작품들은 입체파와 초현실파에 대한 이 작가의 적극적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1950년대 중엽은 한국 화단에서 유럽의 새로운 전후미술이 소개되면서 일부 젊은 세대들에게 강한 영향을 주고 흔히 추상으로 지칭되는 전위적인 미술 운동이 고개를 들던 시기였다. 지적 감성면에서 문학진은 그 추세에 공명하던 젊은 신예였다. 그러나 그는 떠들썩하게 그 전위대열에 가담하여 열기를 토하고 시위를 보인 적은 없었다. 비사교적이고, 말이 없고, 내성적인 그는 오로지 자신의 사고와 작업에만 성실하고 탐구적인 고독한 내공형의 작가였다.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문학진은 1950년대의 실험기를 자신의 체질과 성숙한 자신의 미의식으로 극복하기 시작한다. 브라크의 정신적인 표현세계를 소화한 듯한 일련의 정물화와 피카소의 지성적인 조형감각이 문학진 자신의 것으로 빚어져 나오는 일련의 여인상에서 우리는 문학진 예술의 정리된 기반과 개성적인 내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한 작업은 1970년대에 와서도 큰 변화없이 계속되고 있으며, 다만 주제의 구성적인 전개와 색채구사 면에서 정신적 또는 감각적 심화가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100인선집 문학진 >, 이귀열(미술평론가), ‘구성과 형태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