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생명감(生命感)의 예술(藝術) - 윤중식
그림은 「침묵의 소리」(앙드레?말로)라고 한다.
소리내어서 말하지 않으면서도 이미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조형언어(造形言語)란 말을 쓰고 있다.
언어가 하나의 메세지이듯이 조형(造形)도 하나의 메세지이다.
그 자체로서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라는 측이 없으면 존재의
의미가 없어진다.따라서 그림은 이러한 관계에 의해서만이 참다운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말이 어떤 약속에 의해서 이루어지듯이 조형언어도 공통된 약속 하에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분명한 전달로서의 구체성을 지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말이라도 그것을 구사하는 사람에 따라서 달리 나타나듯이 그림도 그것을 구사하는 사람에 따라 전연 달리 나타나게 된다.이 달리 나타나게 하는 구체적인 요인은 다름아닌 그 사람만이 지닌 총체적인 방식 때문이다. 우리가 예술작품을 평가하게 될 때 그 가치기준은 당연히 이 총체적인 방식에다 두게 된다. 말하자면 이 총체적인 방식은 크게는 작가의 세계관이라든가 우주관으로도 확대할 수 있을 것이며, 작게는 화면상에 나타난 구체적인 표현의 방법으로 집약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림을 보는 사람은 화면이라고 하는 가장 구체적인 매개체를 통해 작가와 만나게 되고 그의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자기생각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는 자체가 굉장히 추상적이어서, 전달로서의 언어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련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며, 설사 전달로서의 언어성을 획득했다고 해도 그것이 얼마나 독특한 것이냐는 문제가 남게 되며, 여기에서 조형언어로서의 가치평가가 이루어지게 된다. 예술의 이해와 평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독특한 언어성이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윤중식씨은 우리 미술계에 많지 않은 독특한 조형언어를 지니고 있는 작가의 한 분이다. 이미 그의 세계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의 영역을 확대해가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아낌없이 받고있는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언제나 보아도 이제 막 대한 듯한 새로움을 주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자기예술에 대한 애정의 끊임없는 확신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공감대 (共感帶)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 올수록 그의 작품은 더욱 넘치는 생명감으로 덮여가고 있다. 밝고 건강한 색채와 더욱 양식화되어진 구성의 밀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생(生)의 희열과 긴장을 동시에 가져다주고 있다.
예술은 어떤 의미에서는 生을 노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의 세계야말로 생의 찬미로 이루어진, 예술의 어느 본질을 밝혀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기에서 그의 자기예술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의 확신은, 그 자신의 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바로 우리의 것으로 확대되어짐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의 예술을 통해 나타난 생의 찬미는 우리들의 그것으로 훌륭히 탈바꿈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침묵의 소리」로 남아있지만, 이제는 그와 우리 모두가 함께 부르는 합창이 된다.
출처 : 미술평론. 오광수 / 현대화랑 / 윤중식(尹仲植) 유화전 / 1978.10.2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