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Lee, Dong H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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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외포리  65×90.5cm  캔버스에 유채 1977
무애의 삶과 예술 - 이동훈
 
이동훈의 호가 무애(無涯)다. 아호란 대개 그 주체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염두에 두면서 붙여진 이름이고 보면, 작가의 경우 그가 지향하는 예술관을 함축하는 의미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무애는 불가에서 쓰는 무애(無碍)와는 달리 ‘넓고 멀어서 끝이 없음’을 나타낸다. 이것이 좌우명으로 쓰일 때 인생이란 끝없는 과정의 연속이며 무한한 순간의 집합일 뿐이라는 철학적 의미가 된다. 관점을 달리하여 보면 무애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정진하는 구도자와도 같이 ‘중단 없는 모색의 삶’을 나타내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이동훈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와 후배 그리고 몇몇 비평가들이 남긴 글들을 보면 무애는 이동훈의 삶과 예술세계를 해석하기 위한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이동훈은 1903년 평안북도 태천에서 태어나 의주에서 농업학교와 사범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1934년 일본에서 짧은 체류기간을 거쳐 서울(1935)과 대전(1945) 그리고 다시 서울(1969)로 거처를 옮기며 화가와 교육자로서 일생을 살다 1984년 생을 마감했다. 그가 몸소 체험한 20세기의 80여 성상(星霜)은 일제 식민과 해방 그리고 동족상잔의 전쟁과 국토 재건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변기였다. 그리고 한반도에 밀려드는 다국적 집단의 외래 문화에 대응하여 민족 스스로의 존재의식을 추스려 나가야 하는 한국 근대문화의 형성기이기도 했다. 개인사적으로는 강점기 일제하에서 시작해 일평생을 교육자로 지낸 지식인이었고, 그가 선택한 예술의 노정도 일천한 역사를 지닌 서양화 군에 속해 있었다. 더구나 북한 출신의 지식인 화가로서 그의 삶은 적잖은 방황과 혼란의 시간으로 점철되어 있었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동훈이 몸담았던 해방 이후의 남한 화단 풍토도 국전을 둘러싼 아카데미즘과 개혁을 꿈꾸는 모던아트 진영으로 나뉘어 이원화 되고 있었으며, 화단의 헤게모니를 잡기위해 보수 세력과 개혁 세력이 서로에 대한 적의마저 품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여러 상황을 종합해 볼 때 화가 이동훈이 현실세계에 대응하는 방식은 세욕을 버리고 소박하고 관조적인 자세로 무애의 삶을 사는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평생 동안 몸담았던 교직에서도 교장직과 장학사직을 사양했다는 에피소드는 그가 추구했던 무욕과 무애의 삶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이 글의 의도는 이동훈의 삶과 그 예술의 가치를 동시대 환경에 비추어 살펴보려는데 있다. 작가는 일제와 해방 그리고 전쟁과 재건기를 살았던 서양화 1세대의 여느 작가들처럼 선전(鮮展)과 국전(國展)으로 이어지는 관학파들과 행보를 같이했다. 일제하에서는 선전에서의 입선을 통해 25세의 나이로 화단에 입문한 이래 계속해 선전에 출품했으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듬해에 선전의 뒤를 이어 탄생한 국전에도 첫회에서 1981년 30회로 막을 내릴 때까지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1949년 제1회 국전에서 특선,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재개된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문교부장관상 그리고 1976년 초대작가상을 받았던 그는 누가 뭐래도 국전의 후광을 받은 인물의 한사람이었다. 비록 일본의 정규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해외 유학파나 국전에 최고상을 받은 기라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이동훈에게 국전에서의 수상 경력은 그의 삶과 예술적 노정에 중요한 지반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주지하듯이 해방 후에 탄생한 국전은 첫 출발에서부터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범했다. 평론가 이구열의 지적처럼 ‘무자각한 시행착오’는 선전의 규약과 운영방법을 무비판적으로 물려받으면서 비롯된 것이었다. 국전에 대한 병폐는 미술의 개념이나 형식의 차원을 넘어 조직과 운영방식의 구태의연에서 운명적으로 물의를 일으켰으며, 구태의연의 조직과 운영방식은 곧바로 보수적 미술의 보루와 동일화되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비평활동이 직업적인 비평가 중심으로 본격화되기 시작한 1960년대초에 이르러 관학파로 명명된 국전파의 미술경향을 터부시 하는 경향이 심화 되었으니 그 앞날이 결코 평탄치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제5공화국의 시퍼런 정치적 서슬아래 1980년 국전은 짧은 호흡을 멈추고 역사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국전의 파국은 이동훈에게 영향을 끼쳤다. 국전에 대한 평가절하와 더불어 이동훈의 예술에 대한 가치평가도 아카데미즘의 범주에서 다루어지게 되었다. 이동훈 예술에 스민 가치를 전위와 추상으로 대변되는 모더니즘 비평의 잣대로 측정함으로서 그의 예술세계는 한동안 구태의연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아카데미즘 뿐만 아니라 모더니즘에 대한 반성과 함께 전후 구상미술의 성과와 미술사적 자리매김에 관심을 갖는 신세대 비평가들이 나타나면서 한국 근대미술의 가치평가에 대한 견해들이 전과 다르게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들의 관점은 형식주의 미술비평에서 벗어나 형식의 주체로서 인물과 그 인물을 둘러싸고 있던 환경에 대한 연구에 기초하고 있다. 인물미술사 연구를 둘러싼 새롭고 다양한 관점은 개화기 한국화단의 제1세대 작가들에 대한 가치를 폭넓게 측정하는데 점차 기여했으며 이들이 채택한 평가의 기준들은 이동훈의 삶과 예술을 재정립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다.화가 이동훈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기준은 교육자로서의 활동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동훈의 제자로 알려진 조각가 최종태는 자신의 스승에 대한 회고의 글을 통해 이 땅에 미술의 개화기를 맞게 된 것은 마땅히 제1세대의 업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이른바 김환기, 이중섭, 장욱진, 박수근, 김종영 등에 의해 도달한 한국미술의 개화기는 이동훈을 비롯해 이종우, 도상봉, 김주경, 오지호, 이마동, 이인성, 박영선 등의 서양화계 제1세대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개화기만 보고 있고 그 시대를 있게 한 전시대에 대해서 연구가 아직도 부족하다’는 최종태의 주장은 따라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이들 제1세대들의 일구어 놓은 화업들은 동시대의 시대적 환경과 그 환경에 대한 치열한 대응의 산물로 다루어질 때 한국미술에서 새롭고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미술 교육자로서 후진 양성과 화단 형성에 기여한 업적도 크게는 한국 미술문화의 활성화라는 범주에서 그 가치가 인정되어야 한다. 예술은 결국 인간이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화가로서 갖추어야할 인격과 사상을 몸소 실천하거나 교육하는 일을 누가 중요치 않다 할 것인가.
 
 
출처 :  김영호 / 서울아트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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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1903-1984)

 
학력
평안북도사범학교졸업
 
■경력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충남문화상 심사위원, 한국미술협회 충남지부장
수도여자사범대학교 강사
이동훈미술상 제정(대전문화방송 주최, 2003)
 
■전시
1928-40 조선미술전람회
1953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1973 한국현역작가 100인전, 국립현대미술관
1979 한국현대미술-1950년대의 서양화전, 국립현대미술관
1981 한국미술 81전, 국립현대미술관
1985 국가기증작품전, 국립현대미술관
1986 유작전, 국립현대미술관
1997 한국근대미술-근대를 보는 눈, 국립현대미술관
1998 중원미술의 향기, 대전시립미술관
2001 한밭미술의 여정, 대전시립미술관
2002 이동훈 탄생 100주년기념전, 국립현대미술관
2003 탄생 100주년기념 회고전, 대전시립미술관
 
■수상
1928-40 조선 미술전람회 8회 입선
1949 제17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특선
1953 제2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문교부장관상
1958 제2회 충청남도 문화상
1960 대한민국 녹조소성훈장
1963 대한민국문화포장
1968 한국미술교육공로상
1976 제25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 초대작가상
1985 제20회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