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두건
장두건은 우리 나라에선 드물게 보는 특이한 예술가이다. 그는 처음엔 미술을 공부했으나 이어서 법학을 연구했다. 말하자면 예술의 자율성과 법규의 규범성을 아울러 생각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30대 후반에 뜻을 굳혀 파리로 떠났고, 오늘날 그는 예술가가 되었다.
20대 전후에 그가 처음으로 대한 예술은 1930년대 후반기의 일본화단의 예술이었다. 당시의 일본화단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던 이제까지의 태도를 무너뜨리고 개성과 주관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한편 이러한 사조는 젊은 화가들을 날카롭게 자극하여 다만 격렬한 주관의 표출만을 강조하려는 폐단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즉, 일본에 있어서의 근대양식의 섭취가 시각조형상의 이해 면에서 처음부터 어떤 애매성을 띠고 있었다는 것이며, 자칫하면 개인의 책임이라는 개념이 무산해 버리는 징후를 나타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현상은 규범을 존중하고, 정돈된 외관, 그리고 신중함에 충실한 그의 기질하고는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잠시 미술계를 떠나 법률을 공부했다.
그러나 생태적인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다시 미술을 공부하게 되고, 유화구를 사용하지만 한국적인 감각이나 국민성을 생각한다. 지나친 주관의 표출도, 양식상의 새로움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도 삼간다.
장두건 예술의 유니크한 점은 그의 솔직 담백한 비전을 통해서 나타나는 미적인 소박성에 있다. 여기서 말하려는 소박성은 자위적인 것이 아니라 생태적인 것을 말하며, 때문에 참으로 소박한 것이다. 그리고 이 소박성은 그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 한국민의 마음하고 통한다.
한 예술가는 한 개인이지만, 그 개인을 초월해서 한 민족의 경험이나 기억들이 여느 서정적인 억양으로 메아리치는 것이며, 이런 메아리에 충실하려는 것이 그의 예술이었다.따라서 그의 예술에서 지나친 기교라든가 전문가적인 기질을 우리는 발견할 수 없다.
그는 사물을 지표의 높이에서 보려 하지 않고 그보다 위의 관점에서 보려는 경향을 나타낸다. 즉, 그의 모든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평면구도의 특징이 바로 이 점을 말해주고있는데, 이러한 시각은 전통적으로 동양적인 관점인 것이다. 이른바 동양화의 도면이 바로그것이다. 그가 이러한 시각에 자신의 예술을 설정한 이유는 특히 전통에 충실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따라서 그의 화면에선 공간원근으로서의 입체감이라든가 빛과 그림자의 로우컬 토운이 해소되면서 밝고 조용한 터치로서의 화면이 구성된다.
1958년, 이러한 그의 예술은 파리 르 살롱에서 은상을 받아 한국적 구상화가로서의 진면목을 드러냈다. 그는 4년간의 파리 체류를 통해 오히려 조국을 더 많이 배운 것이었다.
출처 : 유준상 (미술평론가)/ 한국예술디지털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