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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수의 작품세계

글: 김순옥

도자기- 산

‌좌: 박영석  우: 김혁수

산악인 박영석 그랜드슬램 달성기념 김혁수 도예전

글: 김순옥(예술학박사)

“나는 왜 산에 오르는 가.
나는 왜 이토록 무모한 도전에 목숨을 거는 가.
(중략)
산이 좋기 때문이다.
산에 오르지 않는 나는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산이 있기에 내 삶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산을 오른다”
(박영석 저 ‘끝없는 도전’에서)

그 누구의 말이던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선 감동의 일성.
“여기는 정상
더 오를 곳이 없다
모두가 발아래 있다!”.

세계의 지붕 위에 무엇이 더 있을 손가.
모든 게 발아래 일 수밖에.
하지만 이 극적인 포효엔 인간의 오만함과 무례함이 어딘지 묻어난다.
마흔 둘 나이에 인류 최초로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박영석에게서는 그런 오만함을 찾을 수 없다.
박영석은 겸손한 산사나이다.
그는 산처럼 말을 아낀다.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뱉지를 않는다.
그저 산처럼 웃을 뿐이다.
에베레스트를 비롯한 8,000m 이상 14좌와 대륙별 최고봉 등정, 남극과 북극의 극지점 탐험이라는 대기록을 남긴 인물이라면 왜 드라마틱한 경험담이 없겠는가.
죽음의 틈새인 크레바스에 빠졌다던가, 아니면 유체이탈을 목도한다는 추락의 ‘죽을 맛’을 보았다든가….
자신의 청춘을 고스란히 산에 걸고 죽음과 맞선 이 위대한 산악인은 그러나 일반이 기대하는 그런 범상한 대답은 전혀 들려주지 않는다.
그는 산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본다고 했다. 히말라야 정복보다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말도 했다.
산악 그랜드슬램 기록보유자 치고는 평범한 수사들이다.
하지만 그를 찬찬히 보면 그것이 그의 매력이자 그가 오른 경지의 표현들이다.
그래서 박영석의 심심한 말들이 더 매력 있는지도 모른다.
에피소드 하나 더. 도예가 김혁수(51ㆍ단국대 교수)는 박영석의 자형이다.
김혁수는 항상 주머니에 공깃돌만한 돌을 가지고 다닌다.
박영석이 14좌의 마지막 등정지인 K2에서 주먹크기의 돌을 하나 가져다 잘라 지인들에게 나누어준 것이다.
위대한 기록보유자 치고는 규모가 너무 작다.
범인들이라면 산봉우리 하나를 앞마당에 옮겨 놓아도 시원치 않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오르는 산에 예의를 지킬 줄 아는 산사나이다. 풀 한 포기 돌 하나 함부로 하지 않는 인물이다.
경지에 오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일들이다.
그와 마주하면 그가 산인지 산이 그인지 모를, 높고도 깊은 ‘내공’의 소유자임을 금세 알 수 있다.
박영석의 산악 그랜드슬램 달성을 기념하는 김혁수 도예전이 7월8일~17일 서울 정동경향갤러리에서 열려 요산자(樂山者)들의 관심을 모았다.
산을 소재로 한 작품은 많지만, 인간의 운명과 삶의 가치를 이토록 가슴 아리도록 애절하게 표현한 산 작품은 많지 않았다.
박영석은 극지점 탐험 때 사용했던 썰매와 의류, 생존을 담보한 장비와 압축 식량, 14좌 등정 시 직접 촬영한 산 사진들을 김혁수 도자기와 어우러지도록 내놓았다.
김혁수는 고산의 웅장함을 도자기에 그대로 옮겼다.
인간의 범접을 허락하지 않는 설산의 위용이 때론 만년의 적설로, 때로는 모진 바람에 이따금 드러나는 속살로 비쳐진다.
또 어느 땐 빙벽의 이미지로, 또 어떻게 보면 신의 영역 같은 산의 정상부가 외로움과 다소곳함으로 도자기에 자리한다. 황금빛 찬란한 석양의 마나슬루가 표현된 망간 유약의 작품은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박영석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는 마나슬루다.
그런 사실적인 표현 외에 핀 꽂힌 형상 같은 추상적 표현에선 산에 대한 인간의 도전과 기록을 생각하게 한다.
김혁수는 처남처럼 고산엔 오르지 않았으나 산에서 느낄 수 있는 선(線)과, 낮선 산에 오르는 설렘 등 고산 등정자의 느낌은 모두 도자기에 담고 있었다.
박영석은 고산과 극지를 탐험하면서 새로운 길을 찾아 도(道)를 구하고 있었고, 그의 자형인 김혁수는 인간의 가장 큰 발명품 중 하나인 그릇, 즉 도(陶)에 처남의 도(道)를 창의적으로 표출하고 있었다.
산을 주제로 도(道)와 도(陶)가 만나는 전시였다.
차가운 설산을 불의 예술인 도자로 표현한 자체나, 만년설 속에 살아 숨쉬는 생명의 표현 등은 일상에 갇혀 사는 현대인의 지평을 넓혀주는 진한 감동과 영혼의 떨림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