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돈의 조형세계 ‘방법, 질료 그리고 변주의 미학’
신항섭(미술평론가)
한국 현대미술은 방법론이 대세를 이루어 왔다.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어떤 방법이 필요한가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현대미술의 입장이다. 표현하는 방법, 즉 방법론은 표현기법과는 다르다. 기법이 세부적인 기술에 관한 문제라면 방법은 기법을 아우르는 일종의 표현지침이나 방향 그리고 내용까지를 포괄한다. 따라서 미술에서의 방법론은 창작활동과 관련해 전개되는 표현과정의 일체를 뜻하기도 한다. 기법이 세부적인 표현에 관여하는 데 반해, 방법은 미학적인 의미를 함축하며 절차와 과정을 논리화하는 일이다. 이렇듯이 한국 현대미술은 방법론에 심취함으로써 독특한 조형공간을 만들어냈다. 바꾸어 말해 시각적인 이해 너머에 존재하는 표현과정을 포함하여, 미의식이나 감정 그리고 사상 및 철학에 관한 관심을 작업에 반영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한국현대미술에서 특별히 주목할 점의 하나인 단색화는 작업 과정과 함께 표현적인 매재로서의 물감이나 그를 대용할 수 있는 특정의 물질이 가지고 있는 성질, 즉 물성을 표현 방법에 합치시키는 데 집중했다.
이희돈은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독자적인 형식을 만들어냈다. 그 시발점은 미군용 냉장고 박스를 해체한 종이에 구멍을 뚫는 일이었다. 추상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오브제로 활용한 폐박스의 재료인 종이에 구멍을 뚫는 방식이 그 시초였다.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기보다는 무언가 새로운 이미지를 얻기 위해 실험적으로 시작된 구멍뚫기가 진행되면서 차츰 그의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방법론의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송곳과 같은 뾰족한 도구를 이용하는 구멍뚫기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은 초기에 집중하였고, 마대와 같은 다른 재료를 사용하면서 그 빈도는 점차 줄어든다. 그러한 변화는 구멍이라는 표현행위의 결과물이 물감이라는 질료에 의해 가려지게 시점에서 비롯된다.
작업 과정을 보면 폐박스에서 분리한 겉종이에 일정한 크기의 원형 구멍을 뚫어 규칙적으로 배열하면서 전체를 채운다. 이렇게 만들어진 구멍으로 이루어진 소지素地를 캔버스 위에 견고하게 부착한 다음, 한지를 비롯한 여러 물질을 혼합한 흰색 질료를 넓적한 붓에 묻혀 칠한다. 평붓을 사용하는 것은 구멍이 있는 소지 위에 골고루 질료를 입히기 위해서다. 이처럼 질료를 덮는 과정은 수십 차례 반복된다. 이 과정에서 순전히 수작업에 의존하는 구멍뚫기 주변에 돌출하는 종이의 흔적으로 인해 질료가 엉키는 등 불규칙한 모양새가 된다. 다시 말해 작품마다 표정이 생성하는 것이다.
구멍뚫기는 종이의 뒷면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앞면에는 구멍을 뚫는 과정에서 밀려난 종이의 돌출자국이 거친 모양새로 남는다. 질료를 덮어씌우기가 반복되면서 거칠게 튀어나온 부분에는 더 두텁게 엉키는데, 이로 인해 전체적으로 매우 불안정하고 불규칙한 상태가 된다. 하지만 거칠게 튀어나온 구멍 주변의 돌출 부분으로 인해 물성에 따른 독특한 표정이 만들어진다. 그 표정은 짐짓 단순하고 단조로운 듯싶으나, 구멍뚫기 작업 과정에서 가해지는 신체적인 힘과 방향 그리고 호흡으로 인해 구멍은 저마다 다른 모양새를 가지게 되고 최종적인 표정 또한 풍부하게 된다.
구멍뚫기는 폐박스라는 재료와 함께 그만의 개별적인 형식미학의 기반을 이룬다. 송곳과 같은 뾰족한 금속 도구를 이용해 반복적으로 구멍을 뚫는 행위 자체가 표현 방법의 하나이다. 어쩌면 무수히 반복되는 행위는 지루할 듯싶으나, 작업하는 순간에는 그 자체에 몰입함으로써 시간의 흐름조차 잊게 된다. 이 과정은 정신의 집중과 감정의 절제의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것이 관건이다. 행위 자체에 몰입하면 무료함이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정신의 집중으로 인해 의식은 맑아지고 감정은 평온해진다. 이는 수도자의 수행과 다를 바 없다. 이때 심신을 투척하여 구멍을 뚫는 행위에는 리듬이 실린다. 의식을 집중하는 가운데 일정한 호흡을 유지함으로써 행위 자체가 리듬을 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물감, 즉 질료를 덮어씌우는 행위가 진행되는 동안 질감과 두께가 자신이 원하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생각되면 작업을 멈추고 최종적으로 채색 물감으로 마무리한다. 초기 작업의 일부는 서로 다른 색깔을 차례로 덮음으로써 생기는 물감의 적층, 즉 여러 색깔이 겹쳐지는 다층구조였다. 처음에 도포했던 물감이 다른 색의 물감에 의해 덮이고, 그 위에 또 다른 색깔의 물감이 덮이는 식으로 이어진다. 작업이 끝났을 때는 맨 마지막에 선택된 물감의 색깔만이 온전히 남게 되고, 이전의 물감은 숨겨지는 대신에 물감층의 가장자리에 살짝 그 흔적을 남기는 정도이다.
작업 과정을 되짚어 보면 그만의 방법적인 비결이 드러난다. 우선 미군에서 쓰이는 폐박스, 즉 냉장고와 같은 대형 물품을 포장하는 데 쓰이는 폐박스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캔버스와는 다른 조형 개념을 탑재한다. 일반적인 종이류와도 다른 종이 재질로서, 그 물질적인 특징이 표현적인 이미지에 영향을 미친다. 일반적인 종이보다 두껍고 질긴 폐박스는 물에 불리고 떼어내 건조하는 과정에서 변형이 일어나 종이 면이 일그러진다. 이러한 상태의 종이에 뾰족한 금속 도구를 이용해 구멍을 뚫는 것이다. 이로써 캔버스와는 전혀 다른, 그리고 일반적인 종이와도 확연히 다른 독특한 소지素地가 만들어진다.
이렇듯이 그의 작업은 이전의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재질의 소지와 표현기법을 창안해 냈다. 폐박스라는 종이 재질이 이용되고, 구멍뚫기 기법이 강구되는가 하면, 한지가 포함된 질료를 만들어냈다. 이와 같은 일련의 표현 방식은 새로운 조형미와 개별적인 형식을 보장하는 첩경이다. 이렇게 해서 완성되는 작업은 추상적인 이미지로 귀착한다. 이는 구멍뚫기라는 독자적인 방식과 그 자신이 직접 연구해 만든 질료를 사용하는 데 따른, 새로운 방법론이자 형식미학이다.
2010년대에 들어와서는 구멍뚫기 기법과 함께 마대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성근 섬유질로 짜인 마대를 캔버스에 부착하고 그 위에 물감을 바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때 섬유질의 굵기와 간격에 따라 패턴이 달라진다. 작품에 따라서는 대마로 만든 실로 그물망과 같은 형상의 패턴을 만들기도 하는데, 격자무늬나 방사선 형태의 패턴이 이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마대의 굵고 거친 섬유질이 드러나는 패턴을 그대로 수용하는가 하면 임의적인 패턴을 만들기도 한다. 이는 특정한 패턴에 안주하지 않고 다양한 조형적인 패턴을 강구함으로써 조형적인 공간을 부단히 확장해나가겠다는 의지의 소산이다.
그의 작업에서 조형의 핵심은 질감을 형성하는 재료이다. 흰색의 물감으로 보이는 질료의 재질이 표현적인 이미지 전반을 장악한다. 질감 표현에 최적화된 질료가 가지고 있는 물성은 작품의 표정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재료가 조형적인 사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재료가 가지고 있는 물리적인 특성에 따라 형상이 달라지고 표정이 생기는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작품에 직접적인 표정을 부여하는 질료를 독자적인 방식으로 개발하기 위해 재료학을 독학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자신의 작업에 최적화한 물감, 즉 질료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질료를 평평한 붓을 사용해 도포한다. 물에 불려 떼어내는 과정에서 생기는 불규칙한 폐박스의 표면 그리고 구멍 주변의 거칠게 돌출된 부분으로 인해 도포된 질료는 균질하지 않다. 매끈한 종이나 캔버스와 달리 불규칙한 폐박스의 표면이 들쭉날쭉하거나 울퉁불퉁해 물감을 칠해도 매끄럽게 정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불규칙한 상태의 종이 표면은 자연스러운 표정을 얻는 데 효과적이다. 이처럼 구멍뚫기에 의한 패턴을 기반으로 하는 작업과 함께 마대를 캔버스에 부착하여 씨줄 날줄의 직물의 패턴을 살리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성글고 거칠게 보이는 대마의 직물 그 패턴 위에 물감을 반복해서 바르면 구멍뚫기 작업과 유사한 질감 효과를 얻게 된다.
작업 과정이 반복되면서 물감은 두터워지고 돌출된 부분은 점차 커진다. 물감이 상대적으로 많이 달라붙기 때문이다. 따라서 크고 작은 돌출된 이미지로 화면은 꽉 채워지게 된다. 이러한 이미지는 전면회화의 속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규칙적으로 때로는 불규칙적으로 뚫린 구멍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전면회화의 패턴이다. 특정의 이미지가 존재하지 않고, 크고 작은 물감의 덩어리가 화면을 가득 덮는 상황이기에 그렇다.
그의 작업에서 질료의 점도는 표정을 결정짓는 요소로 작용한다. 질료의 점도가 떨어지면 흘러내리거나 질감을 만드는데 어려움이 생긴다. 반면에 점도가 높으면 표정이 거칠어져 부드러운 시각적인 이미지를 얻을 수 없다. 질료를 칠하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질감이 두터워지므로 적절한 농도, 즉 점질을 가져야만 질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질료 자체의 결속력이 강해야만 오래 보존할 수 있다. 한지를 물에 불려 섬유질로 되돌린 상태에서 아크릴물감을 비롯하여 다른 용재 몇 가지를 섞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질료를 사용하는 그의 작품은 표면의 인장강도가 높다. 다시 말해 화면 전체가 보이지 않는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의 섬유질로 덮이기 때문이다. 섬유질을 내포한 질료로 도포되는 작품의 표면은 단단히 결속되어 반영구적인 상태로 고착된다. 이러한 용도로 가공된 질료는 특허청에서 발명특허를 받았을 정도이다. 재료에 대한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아크릴물감은 화학적인 물질이다. 물론 그림이라는 특수한 용도를 위해 만들어지는, 조형 작업에 쓰이는 매재이다. 그러기에 그림 용도로서의 아크릴물감은 만들어지는 단계에서부터 그림이라는 조형의 세계를 꿈꾼다. 비록 자의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나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 그림이라는 이상을 가지게 된다. 이는 아크릴물감이 단순한 화학적인 물질만이 아님을 말해준다. 꿈과 이상을 지닌 물질, 즉 질료인 것이다. 아크릴물감은 수용성으로 물에 녹지만 일단 수분이 증발하고 안착하면 물에 녹지 않는 견고한 고형물질이 된다.
그가 만든 물감은 그 자체로는 질료일 따름이다. 다시 말해 어떠한 형상으로 발전하기 이전에는 한낱 특정의 물성을 가진 질료에 그친다. 하지만 작업이 진행되면서 형상에 대한 의지가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본래는 아크릴물감이라는 그림 그리기의 용도로 만들어진 재료이지만, 그의 작업에서는 그리는 용도가 아닌, 입체적인 질감을 표현하는데 효과적인 상태로 재가공된 질료이기 때문이다. 아크릴물감과 마찬가지로 그가 만든 질료 또한 형상에의 의지를 내재한다. 재가공하는 단계에서 이미 어떤 형상, 즉 어떤 이미지를 얻고자 하는 목적과 용도가 전제되는 것이다. 이는 질료가 가지고 있는 물리적인 성질에 관한 이해를 초월하는 철학적인 접근방식이다.
이로써 아크릴물감은 물감 본연의 물성을 잃고, 한지 및 접착제 등과 섞이면서 부조에 가까운 질감을 형성하는데 최적화한 새로운 물질적 가치를 가진다. 아크릴물감이라는 본래의 태態를 잃고 질감 표현에 적합한 상태로 그 물성이 바뀌는 까닭이다. 여기에서 아크릴물감의 물성을 변형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한지를 만드는 재료인 ‘닥’이라는 섬유질이다. 섬유질은 아크릴물감과 접착제 등 다른 물질과 혼합하면서 견고한 인장력과 결속력을 가진 강고한 물질로 그 형질이 바뀐다.
한지를 만드는 ‘닥’楮(저)은 뽕나무과의 닥나무 줄기에서 채취한 섬유소로서 전통적인 종이 제조의 재료이다. 한지는 1천년 이상의 내구성을 가지고 있을뿐더러 미세한 섬유질의 조직으로 되어 있어 공기가 통하는 통기성이 특징이다. 그의 작업에서 한지는 한국의 전통문화의 뿌리로서의 상징성을 나타낸다. ‘닥’은 아크릴물감에서 질감이라는 기능적인 요소가 추가되는 새로운 물질, 즉 질료로 그 물성을 바꾸는 중요한 과정에 참여한다. 작품에 따라서는 질료를 바르는 과정에서 마치 실오라기 같은 이미지가 슬며시 드러나기도 하는데, 이는 ‘닥’의 섬유소가 자신의 존재성을 암시하는 일이다. 따라서 ‘닥’의 섬유소는 그 자체가 표현적인 이미지의 하나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닥종이의 섬유소는 단지 질감 표현이라는 효용성에 그치지 않고 표현적인 가치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한지를 녹여 아크릴물감과 혼합하는 것은, 질감 표현이라는 효과와 더불어 전통문화와의 정신적인 유대라는 의미를 내재한다. 한국인의 정서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인 겸손한 태도는 자신의 존재감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 감추려는 속성을 뜻한다. 달리 표현하면 자신을 낮추거나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겸양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정서와 그의 작업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내용상으로는 엄연히 존재하나 그 사실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다만 그 존재감을 은연중에 내비치는 것이야말로 겸양의 미덕이다.
그의 작업에서 한지라는 섬유질의 존재감을 슬쩍 드러내는 것도 이러한 정서와 상통한다. 작업의 가장자리에 실오라기처럼 드러나는 섬유질의 표현적인 이미지가 바로 한국인의 정서적인 특징의 한 단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확대경으로 화면을 자세히 보면 오톨도톨한 질감 사이사이에 작은 실선들이 무수히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실선들은 한지의 섬유질이 만들어놓은 숨겨진 흔적이다. 다시 말해 표면적으로는 질료가 만든 질감만이 보이지만, 그 안쪽은 무수한 섬유질이 엉킨 구조로 되어 있다. 이는 자신의 존재감을 마음속으로 다스려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즉 상대를 존중하는 겸양의 미덕과 유사한 표현방식이다.
이렇듯이 서로 엉키어 있는 섬유질의 구조는 무엇을 의미할까. 단순히 질료로서의 의미에 국한할까. 한지를 물에 녹여 풀어놓은 섬유질은 구조적인 결속과 질감을 강화하는 용도로 쓰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인연을 상징하기도 한다. 나를 중심에 두고 사방으로 뻗쳐나가는 인연, 그 연결고리가 한지의 섬유질이 만들어낸 의미이자 내용이다. 달리 생각하면 무수한 섬유질의 구조는 얽히고 설키는 인간사회의 복잡한 인연의 회로를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한편 그의 작업은 다채로운 색채이미지를 추구한다. 작품마다 고유한 색채이미지를 부여하고자 색채 선택에서 숙고한다. 색채이미지는 결과적으로 감상자와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작품의 얼굴이다. 그림의 얼굴에 대한 인상은 형태보다 색채가 우선한다. 색채이미지가 무엇보다 먼저 사람의 시각을 사로잡는다. 조형적인 요소 가운데 가장 자극성이 강한 것이 색채이듯, 작품의 얼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색채이미지를 단색으로 처리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그의 작업은 모노크롬 회화, 즉 단색화의 영역에 들어서게 된다.
그의 작업에 쓰이는 단색은 특정의 색깔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색채가 이용된다. 무채색에서부터 유채색까지 그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무엇보다도 중간색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단색이되 시각적인 자극이 약한 쪽을 선호한다. 미묘한 중간색이 지어내는 시각적인 이미지 및 정서를 표현적인 가치로 제시하는 것이다. 중간색은 시각적인 자극 및 감정을 요동케 하는 원색의 발색과는 다른, 미묘한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안정을 고려한 선택이다. 원색이 주는 강렬함에서 느끼는 힘과는 다른 중간색은, 자기 절제의 감정을 포함하여 심미적인 세계로 진입하는 데 유리하다.
단색조의 색채이미지에는 시각적인 이미지의 명확성 및 단조로움이 함께한다. 단조로움은 의식 및 감정의 흐름을 느슨하게 만들어 시각적인 안정감을 준다. 반면에 단색이 주는 이미지의 명확성 및 선명성은 작품에 대한 강한 인상으로 바뀐다. 그런데도 패턴이 없는 평면적인 단색의 경우는 지루하고 단조로워 시각적인 즐거움이 반감한다. 반면에 그의 작업에서 볼 수 있듯이 중간색의 단색조일 경우에도 패턴이 함께 함으로써 시각적인 즐거움이 따른다. 단색과 형상이 결속하는 그의 작품이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색채심리학에서 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작업 초기에는 단색에만 집중하고 패턴의 정형화를 지향함으로써 질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적인 분위기로 채워졌다. 이후 패턴 위에 다양한 형태의 기하학적인 이미지를 도입하면서 동적인 이미지로 바뀌어 간다. 기하학적인 이미지의 도입은 예술 단자론에 입각해 작품 하나하나에 개별성을 부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구멍뚫기라든가 정형화된 패턴이 무한히 반복될 때 지루함을 피할 길 없고, 자칫 자기복제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이 문제를 일찍이 간파한 그는 동어반복의 함정을 돌파하는 방안으로 조형의 변주를 획책했다. 설령 구멍뚫기 기법이나 마대의 패턴, 또는 대마 실로 직접 패턴을 만드는 방식을 통해 다양성을 추구하고 있으나, 이 역시 계속되면 동어반복의 함정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그래서 패턴 위에 다양한 형태의 이미지를 넣는 방식으로 조형의 변주를 도모한다. 작품에 따라서는 패턴 자체에 변화를 주기도 한다. 대마 실을 불규칙하게 배열한다든가, 합죽선의 대나무 살처럼 방사선 형태의 패턴을 만드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알록달록한 여러 색깔로 막대나 띠 그리고 바둑판 형태의 기하학적인 이미지를 넣는 등 전통적인 오방색의 개념을 도입하는가 하면, 시각적인 즐거움을 고려하기도 했다. 뿐더러 면을 분할하여 한쪽에는 패턴을, 다른 쪽은 평면적인 이미지를 배치하여 대비시키는 등 다양한 형태로 조형의 변주를 즐긴다.
또한 최근에는 캔버스의 테두리를 빈 상태로 놓아두기도 한다. 패턴이 화면 전체를 빈틈없이 채우는 전면회화방식에서 패턴을 캔버스 안에 가두어 놓는, 일종의 또 하나의 프레임을 만드는 식이다. 이러한 패턴의 변화 또한 조형의 변주를 의미한다. 패턴을 유지하되 부분적으로 이미지의 변화를 모색함으로써 작품 하나하나에 예술 단자론에 입각한 개별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조형의 변주는 동어반복 또는 자기복제의 함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 더구나 조형적인 상상의 폭을 넓혀줌으로써 폭넓고 자유로운 조형공간을 소요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그의 작품 그 전모를 살펴보면 얼마나 다양한 조형의 변주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쉽사리 파악된다.
따라서 다양한 조형의 변주로 인해 시각적인 즐거움은 배가된다. 단색조의 단조로운 색채이미지에 형상이 끼어들고, 채색이 덧붙여지며, 요철의 형태가 나타나는 등 풍부한 시각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까닭이다. 구체적인 형태가 드러나지 않을지언정 단색조의 화면 위에서 무언가 추상적인 형상이 만들어짐으로써 시각적인 이해가 좀 더 수월해지고 있다. 눈으로 읽히는 이미지가 존재함으로써 단색조의 권태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아울러 화려한 원색적인 색띠나 바둑판 문양, 여기저기 산개한 넓은 구멍 그리고 기둥을 닮은 직선적인 형태의 동적인 이미지 또한 시각적인 즐거움을 야기한다.
특히 폭이 넓고 평평한 붓으로 단숨에 내리긋는 듯싶은 직선적인 이미지는 신체적인 운동감 및 속도감을 드러냄으로써 시각적인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물감을 듬뿍 묻혀 내리긋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일련의 작업은 붓 자국에 남겨지는 힘과 속도감에서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된다. 거침없이 단숨에 내리긋는 평붓의 그 호쾌한 움직임은 단색조의 정적인 이미지를 깨뜨리는 의외의 반전인데, 여기에서 미적 쾌감이 발생하는 것이다.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단색조의 이미지는 동적인 형상의 개입으로 인해 돌연 활기가 넘친다. 이는 신체를 사역하는 미의식 및 미적 감정이 어떻게 시각적인 이미지로 변환하는가 하는, 일련의 과정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조형이란 형태를 만드는 일이다. 그것이 구체적인 형상이든 추상적인 형상이든 시각적으로 인지되는 사실이 시각예술의 근간이다. 다시 말해 그게 구체적이든 비구상적이든, 아니면 순수추상이든 눈으로 인지되는 사실이야말로 시각예술의 본질이다. 눈으로 확인하고 거기에 표현된 이미지를 통해 작품에 은닉된 메시지나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시각예술이다. 그의 작업은 어떤 경우에도 시각예술이라는 사실을 부단히 상기시킨다. 개념적이고 관념적인 작업일지라도 시각예술로서의 본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 한마디로 궁극적으로는 그게 어떤 형태의 미술이든 아름다워야 한다. 그는 이처럼 원론적인 과제를 부단히 의식하면서 작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