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숙 Lee, Jin Sook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동양화과 졸업

개인전및 아트페어 6회
(성보갤러리,서울무역센터, 세종문화회관 홍익대 박물관),그룹전다수 

화수중,봉일천중,금촌초등,가람초등,미술,서예강사역임
대한민국서가협회 초대작가,갤러리 미래 운영위원
한국서가협회파주지부장,전국율곡서예대전 운영위원장역임.


한자교육연구회 파주지회장,
파주시 향토문화연구원

白河 尹淳의 書藝術 硏究

Ⅰ . 序言
서예는 조선조 이전부터 꾸준히 우리나라의 생활 속에 꾸준히 이어져왔다. 그것은 한글이 창제된 15세기이후에도 계속 되어졌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발전하여 하였다. 최근에 문화예술에 傳統繼承(전통계승)을 위하여 연구 가치를 높여가는 趨勢(추세)로 매우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명의 利己(이기)속에서 점차적으로 역사의 중요한 痕迹(흔적)이 살아져가는 현실에서 300여 년간 파주장단에 묻힌 백하 윤순 서예가의 生涯(생애)을 통하여 그 시대의 서풍과 그의 고유한 筆法(필법)을 드러내어 시대의 정신과 전통서법의 변화를 이어간 서예가들을 알아보고자 한다. 윤순은 소론에 속해 있어 정제두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반대하고 양명학을 주장 하였다. 이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세자 시강원시절 영조의 인연으로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노론의 비난으로 사직. 삭출을 거듭하여, 백하 윤순은 罷職(파직)될 때마다 경기도 장단 白鶴山(백학산)에 머물면서 친구들과 교유하였으며 만년에는 병을 이유로 出仕(출사)하지 않으려 세 번이나 거절했다가, 마지막에는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순시하던 중 벽동에서 유명을 달리 했다. 그의 단아하고 청빈함은 영조대왕이 인정할 정도로 정평이 나있다. “영조는 백하의 깨끗함이 지나칠 정도 였다”고 하였다. 평생 집 한 채가 없어 형 윤유가 장만해 주어 그의 淸貧(청빈)함을 말해 주고 있다. 따라서 첫째로, 본고는 旣存(기존)의 연구를 토대로 백하 윤순의 파주에 거주한 근거를 詩文(시문)을 통하여 把握(파악)해 보고, 둘째로 그의 서풍의 特徵(특징)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셋째로, 변화를 거듭한 書風(서풍)에서 백하 윤순은 한국적 특성이 어디에서 起因(기인) 하였는가 알아보고자 한다. 또한 그의 정신세계를 드러냄으로써 표면적인 형체의 서(書)가 아닌 그의 사상을 배워가는 繼起(계기)를 마련해 보고자 한다.

1. 朝鮮後期의 時代的背景과 白河의 生涯

1) 朝鮮後期의 時代的背景
조선후기의 사회는 전반적으로 성리학이 성행하던 때에 양명학이 뿌리를 내린 시기이며 우리 고유의 의식이 문화 예술에서도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양명학은 왕양명의 ‘마음이 곧 이치(心卽理)’라고 하여 마음을 벗어나서 이가 없다고 하였다. 또한 ”정제두를 필두로 성리학 이외의 학문을 무조건적으로 배척하지 않고 양명학, 서학과 고증학 등에도 관심을 가져와 ‘양지(良知)’와 ‘지행합일(知行合一)’ 등의 학설을 주장 하였다. 남언경(南彦經)·최명길(崔鳴吉)·장유 이황은 < 백사시교변 白沙詩敎辨 > < 전습록논변 傳習錄論辨 > 등을 지어 양명학을 비판하였다.
2) 서인정권의 일련으로 사회 전반이 혼란으로 개혁하는 雰圍氣(분위기)로, 현실속에서 실천적이고 우리고유의 眞景文化(진경문화)와 東國眞體(동국진체)로 이어가는 문화, 예술의 급격한 변화는 서예에도 玉洞 李漵(옥동 이서1662~1723)로 부터 시작된 조선 고유의 個性(개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조선 서예사의 일대 변화의 시기라 할 수 있겠다. 이 밖에 박세채, 한원 ,안정복, 정약용 등 성리학자들은 양명학을 선(禪) 불교라고 주장하여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로 여겨 배척하였지만 실학자들은 현실적으로 닥친 국고의 고갈과 민생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청나라를 왕래하며 다양하게 모색 하였다.“3) 미술에서는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1686~`1761) 등 진경산수화로 진경문화가 자연스럽게시작이 되었고 서예에서는 명필 옥동 이서의 시작으로 백하 윤순이 개성을 찾으려는 시도가 시작 되었다. 이러한 思想界(사상계)와 政戒(정계)를 주도한 정파가 다름 아닌 서인계열 노론세력이다. 이들은 농암 김창협과 삼연 김창흡을 주종하는 서울의 이른바 ‘백악시단’의 문사들로 개성주의적인 시문 풍으로 ‘진시‘를 주장 하였다.4) 또한 인맥과 학맥이 형성되는데 소론과 남인의 학계에서의 학통은 정제두와 이광려, 서명응홍양호 등, 남인은 허목 이익. 정악용등이 주체로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조선 고유의 진경문화를 전반적인 분야에서 도약의 문화를 이끌어 갔다. 이러한 사상의 변화는 각자의 시문이나 서예술. 회화에서 문학과 예술로 當代(당대)의 문인들의 전통주의적 사고와 新學文(신학문)의 對案(대안)을 제시 하려는 始睹(시도)로서 하곡 정제두를 중심으로 시작 되었다. 윤순은 하곡 정제두의 제자로서 양명학에 대한 이해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양명학의 정신을 자신의 삶속에서 구현 하고자 하였다. “윤순의 양명학적 사유는 그의 현실 인식과 경세원리 및 국가 운영정책들로 우선 윤순은 당시 사회 혼란의 원인을 노론과 대립하여 朋黨(붕당)을 짓는 의식[黨私]이 점차 고질화되고, 사의(私意)가 유행 하는 데서 찾는다. 그는 약명학을 심취하여 실학의 당위성을 주장 하였다. 실심(實心)·실견(實見)·실득(實得)·실정(實政)을 강조하고, 시정을 개혁할것을 주장하는 등 노론에 대항할 이론을 제공했다.”5) 따라서 윤순의 정치적 갈등은 심화 되었다. 그에 따른 정치적 번뇌가 파주장단에 머물게한 주요한 원인 이었으며 그로 인하여 작품을 구상하고 문신들과 교유하면서 시문을 통한 자신의 성찰로 돌아갔던 것이다. 

2) 白河 尹淳의 生涯
“윤순은(1680∼1741) 숙종6년부터 영조17년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중화(仲和), 호는 백하(白下)이며 학음(鶴陰) 나계(蘿溪) 만옹(漫翁) 양수(讓馬)라고도 한다. 조선 중기의 명신 윤두수(尹斗壽1533~1601)의 5대손이며 부친은 사헌부 지평 윤세희(尹世喜)이고 모친은 명신 이수광(李邈光)의 증손으로 동규의 딸이다. 그는 이조 판서 윤유(尹游)의 동생으로 서울 출생이며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문신 서예가 이다. 그는 윤두수를 비롯한 대대로 명문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여려서부터 자질과 남 다른 특성으로 서예에 대한 자질과 가능성이 어려서부터 보였으며 글씨에 대한 관심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행장에는 겨우 말을 할때에 문자를 해석할 줄 알았으며, 손가락으로 획을 그어 글씨를 쓰면 능히 글자 모양을 이루었다. 3세에 이르러 出師表(출사표), 勝王閣序(승왕각서)를 수업 받았는데 한 두번 만에암기하였다. 5세때 병조 내직으로 있었던 아버지를 따라 갔다가 내한(內翰)으로 있던 정제태(鄭齊泰)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때부터 점지해 두었다고 한다. 6세에 처음 배움 과제를 내주지 않았는데도 잠심(潛心)하여 독서를 하였으며 일찍이 장난하며 놀지 않았다.‘나는 공자를 배우는 자이다’라고 하니 선생과 어른들이 자주 稱讚(칭찬) 하였다”
6)고 한다. < 槿域書畵徵근역서화징 >에 ‘내가 18세 되던 해 봄부터 비로소 글씨공부를 시작하여 37세 되던 겨울까지 해가 뜨면 쓰고 해가 지면 그쳐서 그렇게 족히 20년 동안을 공부 했으니, 대개 그 글씨에 대한 고질과 독실한 공부가 스스로도 옛날 사람보다 못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7) 이처럼 백하 윤순은 끊임없는 실천과 도전으로 글씨를 전통서법에서 창작의 서체를 구현하려는 힘을 다 했다. “10세 때 부친의 사망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36세에 진사시에 장원급제하고, 1713년 증광시에 문과병과(文科丙科)에 올랐다. 1716년 세자시강원 설서로 시작하여 정언 부수찬, 1718년 수찬으로 임직하다가 1719년 모친 사망으로 잠시 공직을 떠났다. 1721년 신설된 세제시강원 사서(司書)에 이어 교리 수찬 이조 좌랑, 1723년에 사은사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1724년 집의(執義) 사간(司諫) 수원 부사를 지냈다. 당시 소론임에도 불구하고 노소 양쪽의 잘못을 지적하고 붕당(破朋黨)을 주장하다가 배척을 당하기도 하였다. 영조때 병조 참지 승지 대사성 부제학을 지냈고 이후 소론 세력이 제거되는 1725년부터 사임 하였다가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부제학에 재기용 되었다 이어 대사헌 예문제학, 이조 참판을 지냈고, 이후 이조 판서로 지경연사 양관 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좌부빈객을 겸임하였다. 1728년 무신난(戊申亂) 때 감호제군사를 지냈고 동지 정사로청에 다녀왔다.”8) 이렇게 1731년과 1728년 두 차례 중국 청(靑)에 다녀왔다. “1928년부터 1939년 까지 경기 관찰사를 역임했고 재임 당시 이 지역 명사들을 위해 많은 비갈문(碑碣文)을 써주었다.”9) 이후 형조 공조 예조의 판서, 한성부 판윤과 함경도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하면서 지경연사 대제학 실록 당상관 세자빈객 등을 겸임하였고, 정1품 하계의 보국숭록대부에 까지 올랐으며, 그러던 중 1740년 평안도 관찰사의 명을 3번에 걸쳐 사의하였음에도 결국 병중의 몸으로 임지로 떠나 관내를 순시 하다가 1741년 3월 24일 압록강변의 벽동(碧潼)에서 운명 하였다 묘지는 파주시 장단에 있다. 윤순이 쓴 비갈로 경기도 강화의 「고려산적석사비(高麗山積石寺碑)」, 장단의 「참찬윤순지표(參贊尹順之表)」·「예참서문유비(禮參徐文裕碑)」, 양주의 「풍릉조문명표(豊陵趙文命表)」, 광주(廣州)의 「판서이현석비(判書李玄錫碑)」, 「이창발묘갈(李昌發墓碣)」, 「영상홍서봉비(領相洪瑞鳳碑)」, 「좌상이태좌표(左相李台佐表)」, 「호참송징은비(戶參宋徵殷碑)」, 「응교심유갈(應敎沈濡碣)」, 「기백윤훤표(箕伯尹喧表)」 등이 있다. 저서에 「백하집(白河集」,「白河墨妙帖」,이 10)전해지고 있다. 


2. 白河 尹淳의 書藝觀
윤순의 글씨는 왕희지의 글을 따랐다고 했다. 따라서 왕희지의 서예 관념에 대하여 언급 해보고자 한다. 왕희지는 “한자를 쓰는 데는 몇 가지 形을 생각한다. 그러므로 먼저 어떻게 쓰면 좋은가를 熟考(숙고)한다. 마음에 天地(천지)의 萬物(만물)과 古今(고금)의 모든 것을 생각하여 각 각 깊이 沈着(침착)한 기분과 힘차고 의욕에 충분한 기분을 가지게 하여 물고기나. 새 .動物(동물)이나 植物(식물). 山이나 河川(하천)의 뛰어난 형을 모방하여 빠른 지필(淽筆)< 疾淽질지 >에 의하여 문자를 쓰는 모든 법칙(팔법)을 충분히 驅使(구사)하여 음의 표현과 양의 표현에 의하여 春.夏.秋.冬의 변화에 충만한 분위기를 가지도록 한다면 새로운 內容(내용)과 뛰어난 形(형)이 자연히 생겨난다”고 11)기록하고 있다. 이 논고에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의 천도(天道)의 자연의 원리 즉 사물(事物)의 근본(根本)이 되는 원리(原理)와 만물(萬物)이 처음 생겨나서 자라나 삶을 이루고 완성(完成)하는 春夏 秋 冬의 우주의 생명을 이어가는 것을 우주의 순리로 글씨의 생명력을 이어가는 의미가 주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백하 윤순은 이러한 원리에 의하여 왕희지의 본을 받았다. 또한 이 시기에는 송설체와 조선 중기에 혜성같이 나타난 한호 석봉체가 조선후기 서풍 이었다. 그러나 기상이 부족하다하여 조선성리학을 바탕으로 조선 고유의 진경 문화를 詩文, 書, 畵에서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으며, “시에서는 槎川 李秉淵(사천 이병연 1671~1751)과 순암 이병성(順菴 李秉成)형제, 그림에는 관아제 조영석과 겸재 정선과 교유하였고, 관아제 역시 송시열 제자인 지촌 이희조(1655~1724) 평생을 함께 한다.12)이들 이외에도 농암 문하의 담헌 이하곤(李夏坤 1677~1724),서암 신정하(恕庵申靖夏 1680~1715)는 시문과 감식이 뛰어났고 이들과 친분이 있던 공재 윤두수(1668~1715)와 그 이질인 백하 윤순은 그림과 글씨에 이들과 공명하고 있었다. 시는 성당(盛唐)때의 것을 공부했고 서예는 동기창(董其昌)의 글을 좋아 했다고 전해진다.”13)라고 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1725년관아제가 40세에 파주에 공릉의 직장으로(종7품)보임 되었을 때 파주에서 백하 윤순과 공명하고 있었다는 것은 서로 시문과 그림으로 서로 교유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백하 윤순의 배경에는 윤두수와 친분이 있었던 옥동 이서의 영향과 하곡 정제두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으니, “심중시론(心重視論)’이다. 이는“‘주체적 자아’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작가의 창작의지와 관련해 진정한 예술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한다.14)” 또한 “옥동 이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예이론인 비평서 < 필결 >(筆訣)’을 남긴 선구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 필결 >은 ‘완물상지(玩物喪志)’라 해 서화를 말기(末技)로 간주하던 당시 도학자들의 시각에서 보면 매우 혁신적인 일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의 < 필결 >을 통해 서예를 ‘역리(易理)’와 도학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은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書家錄의 < 尹淳條 >에 백하의 글씨가 세상에 유행하게 되면서 사대부는 물론 閒巷 (한항)鄕曲(향곡)의 사람들까지도 한결 같이 추종 하였다. 이름하여 詩體(시체)라 하였다. 과거 시험장에서도 이 서체가 아니면 자신을 드러내 세울 방법이 없을 정도였다. 이리하여 < 遺敎經유교경 >과<  黃庭經황정 >은 값이 온 나라에서 중시 했다.”15) 이는 백하 윤순이 조선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추앙을 받았는지 짐작이 갈 일이다. “옥동 이서의 가르침은 ‘글씨는 심법을 궁구해야지 자획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글씨의 외양만 본뜨려는 태도를 경계했으며 특히 심획을 강조하였다.”16) 외형적인 균제미에 만 치중하는 조맹부의 송설체와 관청의 서사정식으로 표현된 석봉체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 이었다. 이처럼 윤순의 5대조인 윤두수의 영향과 정제두 그리고 옥동 이서의 서예 의 계승은 그가 18세부터 36세까지 끊임없는 노력과 조선사회를 지배했던 성리학을 배제
하고 양명학을 접하면서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실천인 사고로 누구보다 열정적인 삶을 토대로 서예에 이상을 갖게 되어 자신의 백하체를 구사하게 되었다.



Ⅱ. 白河 尹淳의 作品世界

1. 白河의 詩文
백하 윤순은 사직과 삭출을 거듭 할 때마다 경치가 아름답고 한적한 파주의 백학산을 자주 머물렀던 집이 있었다. 물이 흐르는 백학산 아래 외로움을 달래가며 시문과 글씨로 상심한 마음을 달랬으리라. 아마 내 집이라 표현했던 것을 보면 잠깐 다녀 간 것이 아니라 그의 집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백하 윤순과 교유했던 담헌이하곤의 시문과 스승인 하곡 정제두의 시문을 살펴보고자 한다. “舊隱衡門倚白河(구은형문의백하) 백학산 밑 허술한 대문 숨어사는 내 집에 來泉水活客還家(내천수활객환가) 나갔다 돌아오면 물이 솟는 샘이 있었네.“ 와 “니집이 白鶴山中(백학산중) 날차즐이 뉘 이슬이/ 내집이 백학이 사는 산중의 나를 찾을 사람이 뉘 있을까” 라고 표현 했듯이 윤순이 백학산을 소재로 시를 지은 시문을 보면 알 수 있다. “< 해동가요 >에 백하 윤순의 시조 한수가 전하고 있다. 니집이 白鶴山中(백학산중) 날차즐이 뉘 이슬이/ 내집이 백학이 사는 산중의 나를 찾을 사람이 뉘 있을까 入我室者 (입아실자) 청풍(淸風)이오/내방에 들어오는 것은 맑은 바람 이오 對我飮者 (대아음자) 명월(明月) 이라/ 나와 술을 대작하는 것은 밝은 달이라 庭畔鶴徘徊(정반 학배회)한이 긔벗인가 하노라/뜰가에 학이 날으니 그것이 내 벗인가 하노라”
17)

白河集 卷1 倚杖(의장)
藜羹飽後氣方舒 (려갱포후기방서) 나물국을 배불리 먹은 후 기운이 퍼지니
倚杖柴門月上初 (의장시문월상초) 처음 달 뜰 때 지팡이에 의지하여 사립문을 나서네
暮犬吠人秋稅急 (모견폐인추세급) 저물녘 개가 사람을 보고 짖으니 가을 세금 급하고
孤鴻啄雪野田虛 (소홍탁설야전허) 외로운 기러기 눈을 쪼니 들판이 비었네
東都骨育書難得 (동도골육서난득) 동국의 골육상잔 글로 표현하기 어렵고
北極風雲夢已疎 (북극풍운몽이소) 북극의 풍온은 꿈에서 이미 멀어졌네
梁甫吟時眞樂在 (양보음시진낙재) 양보음을 읊을 때 참 즐거움 있었으니
孔明何事出茅盧 (공명하사출모노) 공명은 무슨 일로 뉘 집을 나왔던가 
18)

지팡이를 의지하고 밖을 나갈 정도로 몸이 쇠약 했던 그는 명아주 국을 먹은 후 기운이나 새롭게 심신을 달래보지만 옳고 그른 당쟁에 표현하기가 힘이 소진한 듯하다. 민생들의 세금을 걱정하는 따뜻한 마음이 시문에서 묻어 나온다. 건강했던 때 시상을 떠올리며 교우들과 즐거웠던 한때에 제갈량의 시 ‘양보음’을 읊었던 그리움과 외로움이 더 애초롭다.

浿營志感(패영지감)
王節三辭地(왕절삼사지) 옥절을 세 번이나 사양했던 고을
君恩四命申(군은사명신) 임금님은 은혜롭게 네 번이나 명을 내리시네
棠陰慙朝武(체음참조무) 나의 공적은 조상에게 부끄럽고
棣아感前塵(체아감전진) 형제는 속세에 나감을 한 하네
白髮今非舊(백발금비구) 흰머리 지금 옛날과 다르고
浮榮老更新(부영노갱신) 덧없는 영화 늙을수록 다시 새로워지네
羅幃秉孤燭(라위병고촉) 휘장을 두르고 외로운 촛불 잡으니
城角一聲春(성각일성춘) 성의 화각소리 한 줄기 봄 이로다 
19)

그의 시문을 보면 1740년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였는데, 백하는 병으로 인해 관직을 떠나려 세 번이나 사양했던바 더 이상 거역 할 수 없어 네 번째 병중의 몸을 이끌고 부임 하였다.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지은 < 패영지감浿營志感 > 이라는 시를 통해 그의 심경을 吐露(토로)했다. 형제 윤유(1744~1737)도 아우의 몸이 성치 않으니 挽留(만류) 했으리라 위 글에서도 이미 많은 꿈을 접어가고 인생의 허무함과 병의 악화로 외로움이 묻어 있지만 군(君)의 은혜로 거역하지 못하고 책임을 다하는 淸貧(청빈)한 모습이 역역하다.


歸白河(귀백하) 백악산
舊隱衡門倚白河(구은형문의백하) 백악산 밑 허술한 대문 숨어사는 내 집에
來泉水活客還家(내천수활객환가) 나갔다 돌아오면 물이 솟는 샘이 있었네
城西小院猶秋夢(성서소원유추몽) 성 서쪽 작은 원은 아직도 가을 꿈이 남아
種菊三年不見花(종국삼년불견화) 국화를 심고도 삼년이나 꽃을 보지 못 했네
20)

백하 윤순의 위 시문은 장단 백악산(지금은 백학산) 아래 그의 집에는 신기한 샘이 있어 주인이 집에서 떠나면 샘이 마르고 다시 돌아오면 물이 솟아올라 사람들이 그 집을 ‘來泉’이라 불렀는데 이곳에서 지은 시조라 한다.


臘月(납월) 섣달
臘月靑江曲(남월청강곡) 섣달 맑은 강 굽이에
寒梅一樹開(한매일수개) 찬 매화 한 그루 피었네
陽和從此達(양화종차달) 따스함이로 초차 나와서

春氣滿天廻(춘기만천회) 온세상 봄기운 돌아오리 21)

추운 겨울 속에 매화꽃을 통해 봄기운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온 세상이 봄 기운이 도는 것처럼 땅속 깊숙한 곳에서 움츠리고 있었던 생명들이 기지개를 키듯 어지러운 민생들이 안정된 세상으로 오기를 간절한 희망을 주는 노래이다.

陽和春氣(양화춘기) 봄기운
長江曲曲繞平沙(장강곡곡요평사) 긴 강 굽이굽이 평사를 감도는데
窈窕淸江曲(요조창강곡) 깊고 그윽한 청강의 굽이로세
羽旄遵江曲(우모준강곡) 깃발이 강굽이를 쫓아갔고
陽和定全復(양화정전복) 따뜻한 봄기운을 완전히 되찾으리니
陽和政屬三春晩(양화정속삼춘만) 화창한 계절은 삼촌의 저물녘에 속하였고
陽和鋪遠邇(양화포원이) 화창한 봄기운 원근에 두루 퍼지니
群物熙春氣(군믈희춘기) 봄기운에 환희하는 만물의 모습이여
獻歲發春氣(헌세발춘기) 새해 되어 봄기운이 일어나건만
春氣肆和(춘기사화) 새 봄기운 따사롭고
江邊春氣煙非煙(강변춘기연비연) 강변의 봄기운은 연기인지 아닌지 
22) 

새해의 봄을 만끽하며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강 어구의 모습이 굽이 굽이 봄을 느끼게 해주는 江邊의 봄기운의 모습이다. 이밖에 백하윤순은 이하곤(李夏坤 1677~1724) 송인명(宋寅溟). 송진명(宋眞溟)형제 조현명(趙顯命) 조문명(趙文命)형제 정석삼(鄭錫三)이광덕 이광덕(李匡德).박문수(朴文秀) 서명균(徐命均) 오명항(吳命恒 등과 시서로 교유하여 상심하고 외로웠던 마음을 달래어 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혜음령 (惠陰領)
이하곤(李夏坤 1677~1724)
丘馬惠陰領(구마혜음령) 말 몰아 혜음령에 오르니
今年似昨年(금년사작년) 금년이 마치 작년과 같구나
荒荒窮峽色(황황궁협색) 깊은 골짝의 산색은 황량하고
悄悄數村烟(초초수촌년) 몇 몇 촌락의 연기 쓸쓸해라
菜女分溪坐(채녀분계좌) 나물 캐는 아낙은 시냇가에 앉아 있고
田翁抱日眠(전옹포일면) 늙은 농부는 햇살 받으며 졸고 있네
憐渠茅屋下(연거모옥하) 가련타 저 띠 집 아래
鷄犬亦蕭然(계견역소연) 개와 닭도 쓸쓸 하겠구나 
23)

“惠陰院(혜음원)은 동문선(東文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의 사료에 김부식이 찬(撰)한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가 있다.” 또한 혜음령은 고양시 고양동에서 고개를 넘으면 도달하는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하곤은(1667~1724)은 윤순과 친밀했으며 그의 글 두타초(頭陀草)에 총18책. 1650편중에 詩와 書가 실려 있는데 그중에 윤두서의 자화상과 화첩에 대한 화평을 썼다.24) 이에 윤순과도 친밀한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시에 ‘今年似昨年(금년사작년) 금년이 마치 작년과 같구나’ 혜음령에 한두번 온 것이 아니라 자주 방문한 시문이다. 

霞谷 鄭齊斗(1649∼1736) 
草亭新居(초정신거) 풀 정자에 새로 살며
新居一鑿小如舟(신거일착소여주) 새로 머문 한 뚫음 작기 마치 배
平野微茫枕鉅流(평야미망침거류) 너른 들 조금 아득 큰 흐름 베개
戶氣長連蓬海闊(호기장련봉해활) 문 기운 오래이어 틘 봉래 바다
簷雲遙際岱岑浮(첨운요제대잠부) 처마 구름 먼 사이 태산 떠있어
乾坤合近先天運(건곤합근선천운) 하늘땅 붙어 곁 해 선천의 운에
萬象涵虛太始秋(만상함허태시추) 모든 본뜸 젖어 빈 태초의 가을
但見白鴟何浩蕩(단견백치하호탕) 다만 봐 하얀 솔개 어찌 큰 흩음
正知吾道更悠悠(정지오도갱유유) 바로 알아 우리 도 다시 아득해 
25)

이 시문에 보면 ‘乾坤合近先天運(건곤합근선천운) 하늘땅 붙어 곁 해 선천의 운에’는 선천의 운에 하늘과 땅이 붙어 있었을 때(대대로 권력의 운이 있었지만)와 개혁을 시도하려 애쓰지만 솔개 같은 큰 흐름을 막을 길이 없이 쇠퇴해가는 운명을 알았던 것인가? 윤순의 스승이었던 하곡 정제두의 시에도 조선사회의 노론과 소론의 政爭(정쟁)에서 오는 무개(重)를 느낄 수 있다.


2. 白河 尹淳의 書.畵
백하 윤순의 몇 몇 작품을 토대로 內包(내포) 되어있는 精神性을 고찰 해보고 그의 서법을 살펴보고자 한다. 백하는 시문은 물론 작품이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그림과 
도3)글씨에도 능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평양의 연광정의 ‘第一江山’ 편액은 바로 미원장(米元章)의 석각서를 탑본하여 판각한 것으로, 그 중 ‘江’자는 본래 없어서 주지번(朱之蕃1595~?)의 글씨로 채웠으나, 둔열하여 썩 어울리지 않았다, 백하(白下)가 이를 바꾸어 썼으나, 오히려 주지번 보다 못하니 애석한 일이다.” 주지번은 호가 난우인 명나라 때의 유명한 서화가이다. 연광정도2) ‘第一山’의 글씨는 중국 태산의 ‘第一山’ 미불의 글씨이다. 당대의 누군가가 중국에 갔다가 비석에 있는 것을 임모해온 것으로 제작한 것이다. 이 현판의 ‘第一山’은 미불의 석각서 탁본이고, ‘江’자는 윤순의 글씨이다. 미불의 ‘제일산’과 윤순의 ‘강’자가 이 현판에서 만난 것이다.26) 도1)

< 연광정의 ‘江’자 윤순의 글씨 석야 신웅순글에서 옮김 > 도1)

< 연광정 겸재그림 성베네딕토회 수도관수도원고직석신부 겸재화첩감상 옮김 >
도2)

< 윤순의 그림 네이버에서옮김 >도3)

조선 최고의 솜씨를 지닌 겸재도 조선제일 천하제일의 경치를 화폭에 담았다.도2) 겸재의 낙관 옆에 쓰인 < 해동제일승 제일필 >(海東第一勝 第一筆)이라는 글귀가 그 뜻이다. 27) 練光亭(연광정)에 주지번이 너무 아름다워서 일필휘지로 천하제일강산으로 써서 붙였지만 어울리지 않아 제일강산으로 미불의 글씨와 윤순의 글씨를 합하는 인연을 갖게 된 겸재 그림이다. 윤순이 글씨도 능하였지만 그림 도3)역시 남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題跋(제발)에 쓰여진 곳에 안개의 표현과 동자와 말은 조형의 미를 더해 주고 있다.

1) 白河의 書法 理解
윤순은 왕희지 필법과 미불의 미남궁체를 따라 붓에 있어서 中鋒(중봉)을 중시하였고 萬毫齊力(만호제력)과 心劃(심획)을 주장 하였다. 붓끝의 획을 통해 생동과 변화를 자연스런 운필로 자유로운 필치로 심획으로 옮겨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송나라 때 어떤이가 미불(米芾)에게 필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미불은 이 사람에게 가서돌아오지 않는 것이 없고 뻗었다가 다시 거두어들이지 않는 것이 없다 (無往不復, 垂不縮)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모든 필의 사용은 起筆(기필:필의 시작)과 行筆 (행필:필의 진행) 그리고 收筆(수필:필의 마감)하며 이러한 동작에 의해 서로 필의 사용은 서로 다른 필의 효과가 나타나게 된다는 뜻이다.
28) 따라서 미불은 정봉, 장봉, 노봉 등의 필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였고 법도가 정연하여 자기만의 독특한 품격을 이루어낸 대표적인 작가이다. 소식이 말하길 “미불 평생의 서예작품은 沈着痛快(침착통쾌)하여 바야흐로 종요(鍾繇151~230)와 王羲之(왕희지302~?)와도 병행 한다”29) 하였고 서예가들도 한 字 한 字에 새로운 뜻과 법도를 지키면서 자기만의 정신을 품고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윤순은 왕희지와 미불의 진실된 의미를 더욱 뚜렷이 부각하기 위하여 그와 같은 법도를 기본의 절차를 구현하고 창의적 필법으로 자연스럽게 예술활동으로 표출된 것이다. 윤순은 “글자에 있어서는 그 짜임새 사이에 겨우 머리털 하나쯤 들어가게 되어서 아름답고 묘함으로써 주장을 삼으니, 이것이 바로 비속하여 족히 일컬을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 획을 행하여 짜임새를 만들 적에 먼저 등급을 뛰어 넘을 생각을 버리고 매양 그 경지 안에 들어 갈 것만을 생각하고 글자를 만들 때에 먼저 창경함으로써 근본을 삼는다면 그것이 성공하는 날에 자연히 濃熟(농숙)하게 되어서 힘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아름답고 화려한데 이르게 될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윤순이 순수하게 황희지의 서첩인 < 遺敎經유교경 >과 < 黃庭經황정경 >을 임모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임모한 서첩은 어느 것이 왕희지의 글씨이고 어느 것이 그의 글씨인지 분별 할수 없을 정도였다”30) 는 말은 얼마나 치밀하게 임서하여 공부 했는지 알 수 있다.

2) 白河 尹淳의 創意力 思考
“서예는 예부터 육예인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가 심신을 연마하는 고도의 수양이라 할 수 있다. 이로 장법(章法)을 터득하여 수련과정과 온 마음이 일체를 담아야만 예술의 경지를 이루는 것이다 , 또한 서예는 점과 획(劃) 장단(長短), 필압(筆壓)의 강약(强弱)·경중(輕重), 운필의 지속(遲速)과 먹의 농담(濃淡), 그리고 문자의 비례와 균형이 사람의 마음을 먹 선과 또한 글로서 마음을 사로잡는 微妙(미묘)한 造形美(조형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윤순의 글씨는 아름답고 묘함은 훈련을 통한 能熟(능숙)한 필치와 그의 審美的(심미적) 예술 활동으로 이루어낸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31) “윤순은 마음속 깊이 사모했던 검무로 유명한 밀양 기생 운심 있었는데 이 운심의 춤을 보고 초서의 영감을 얻었다 한다. 어느 날 윤순이 밀양 기생에게 춤을 추기를 청하였다. “운심은 윤순에게 대감의 글씨를 한 점 간직하는 영광을 주신다면 기꺼이 춤을 보여 드리겠다”고 한다. 춤을 추었더니만 윤순은 바로 글을 써주지 않았다. 어느 가을비가 내리는 날 낙엽을 바라보면서 윤순이 홀로 있을 때 운심이 홀연히 술을 가지고 와서 권주가를 불으며 술을 권한다. 윤순이 술이 약간 취하자 붓과 벼루에 눈길을 보내니 운심이 눈치 채고 비단 치마를 벗어 앞에 펼쳐 놓으며 말한다. ‘대감께서 지난날의 약조를 잊지 않으셨겠지요?’ 윤순은 단숨에 붓을 휘둘러 도연명의 歸去來辭(귀거래사)를 써주며 함부로 아무한테나 보여주지 말라고 당부 하였다. 그런데 운심은 얼마 후 조현명에게 이 일을 발설하여 그의 소유가 되었다 한다. 운심은 죽을 때까지 이 일을 한스럽게 여겼다 한다”.32)

< 윤순의 興盡帖 경남대 박물관소장 >도4)

이와 같이 운심의 춤을 보며 쓴 초서체는 춤을 추는 것처럼 부드럽고 運動感(운동감)과 律動感(율동감) 生動感(생동감)으로 소용돌이치듯 자유로운 筆力을 求師(구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찬은 대나무를 그릴 때 一筆草草(일필초초) 하게 자유분망한 필치로 쓱쓱 그려낸 것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가슴속의 빼어난 기운(胸中逸氣흉중일기)을 쏟아내었다”33)한다. 윤순 역시 예찬의 대나무를 그렸던 것처럼 글씨를 마음에서 전해져오는 붓 끝이 자유롭고 거침없이 쏟아낸 혼연일체의 서 예술인 것이다.

< 미불글씨燭素帖위키백과 >도5)

< 윤순의 고씨서축 중앙박물관소장 >도6 한국학중앙연구

미불의 글씨와 자형을 보면 그만의 특징이 독특하다. 윤순의 글씨는 결구가 일정하며 물이 흐르는 듯 자연스럽고 강약이 잘 어우러지고. 획의 굵기와 크기에 적절하고 자형이나 결구에 생동감과 리듬감을 주어 변화를 더하였다.


Ⅲ. 朝鮮後期書藝 白河尹淳의 影響

조선시대의 서체는 “안진경체(顔眞卿體)와 달리 왕희지(王羲之)에서 출발하는 원나라 말기와 청나라 때 조맹부의 규각(圭角)이 없는 세련된 서체는 명나라 초기의 문인 학자들 사이에 유행하여 이른바, 한림원체(翰林院體)라 하여 판본(板本)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세종 때 서예가는 안평대군(安平大君)으로서 그의 서풍은 조법(趙法)을 잘 체득하여 그 연미(軟美)하고 넉넉한 품(品)이 당시에 따를 이가 없어 조정에서도 높이 평가하자 전국에 성행하게 되었으나,” 
34) 그는 정계의 혼란으로 짧은 생의 마감했다. 중종 때에는 김구(金絿)는 종왕의 서체를 배워 인수체, 명종 때의 양사언(楊士彦)을 숙종때 옥동 이서 정조때 윤순은 이름난 서예가로 송나라 미남궁체(米南宮體)를 완전히 터득했다.“趙龜命(조귀명)은 < 題從氏家藏遺敎經帖제종씨가장유교경첩 >에서 우리나라의 書法(서법)이 대략 크게 세 번 변 했다고 했다. 國初(국초)에는 蜀體(촉체), 즉 松雪體(송설체) 선조. 인조 이후에는 石奉體,(석봉), 숙종 대 이후에 와서는 王羲之體(왕희지체)를 배우고 있어 規(규)와 矱(확)이 점점 나아지나 骨氣(골기)는 모자라게 됐다. 요즘 쓰는 晉體(진체)는 변화를 모색하여 이뤄진 것으로 얼핏 보면 중국과 닮지 않음이 없는 듯 하지만 그 실제 모습은 눈썹과 머리칼만 흉내 낸 것이다.”라고 하였다.35) 이처럼 당시에 왕희지 법첩을 학습하면서 서체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 하였는데 특히 백하는 글씨를 변화시킨 선구적인 진체(眞體)로 변화시켰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원교 이광사를 배출하여 동국진체의 진수를 보게 된 것이다. 그의 글씨는 단연 조선 후기 대표하는 명필로 왕희지체와 우리나라 역대 명필을 배우고 나아가 당. 송. 원 명 명필들로 글씨를 소화하여 특유의 백하체를 이루었으며 특히 송나라 불의 미남궁체로 터득 하였다. 그는 글씨에 있었서 연미(姸美)함을 배제하고 장경 발속할 것과 만호제력의 중봉법을 지론으로 삼아 우리나라 역대서법과 중국서법을 두루 익혀 백하체의 한국적 서풍을 일으켰으며 옥동 이서(李漵1662~1763)통하여 동국진체 시조를 이어 주었고 그의 문하 원교 이광사를 배출 하였다. 그는 이밖에도 산수 인물 화조를 잘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김정희(金正喜)는 < 완당집(阮堂集) >에서 ‘백하의 글씨는 문징명(文徵明)에서 나왔다."고 주장하였다.” 이같이 그는 옛사람의 서풍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대가의 역량을 지녔다. 특히, 행서는 각가(各家)의 장점을 조화시켜 일가를 이루었다. 원교 이광사는 “내가 30세 이후로 고인의 필법을 전적으로 학습하였지만 필의(筆意)를 깨닫게 된 바는 백하에게 서였다” 36)라고 하였다. 원교 또한 스승 백하의 글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우리나라 글씨의 누추함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진(晉)․ 당(唐)의 획과 서법을 얻은 자는 실제로 백하니, 가히 백년 만에 장님의 눈을 틔워 주었다고 이를 만하다. 백하가 세상에 늦게 나서 홀로 중국의 획법를 얻어서 체격(體格)이 새롭고도 묘하고 재주가 공교하고 아름답게 되어서 우리나라의 더럽고 용렬한 태도를 깨끗이 씻어 내었다.37) 옥동이서와 백하 윤순으로 인하여 서예 이론이 저술이 간행되었다. “이광사의 「書訣」은‘字書源於心術,意致生於識量(자서원어심술,의치생어식량)이라는 서예관에 대해 저술하였고, 김상숙의「筆訣」은 ‘心正手熟(심정수숙)’의 창작관을 ,김정희의「書論」은 ‘文字香·書卷氣(문자향·서권기)의 서예 정신을 중심으로 저술한 대표적인 이론서이다.38) 백하 윤순은 문예적 교유관계에 사천 이병연(1671-1751 겸재 정선(1676-1672)는 三雄(삼웅)있었으며 관아재 조영석도 교우하였음은 폭 넓은 인관관계를 내포하고 있었음이다. 이광사의 글에 “내 나이 스물에 성교서를 임서한 것을 보시더니 만약에 이것을 새길 것 같으면 앞을 구별치 못할 것이라 하셨다 늘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무개의 글씨는 우리나라 수 천년 이래로 없던 바일 뿐 아니라, 중국에 있어서도 마땅히 위진에 비길까? 당(唐)이 하로는 겨룰게 아니라’ 하셨으니” 39)이처럼 이광사을 아끼고 칭송하여 그의 글씨의 뛰어남을 인정하여 동국진체를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백하윤순은 이광사 와 統營(통영)하여 새로운 필체를 연구 몰두 할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었던 것이다. “白下가 禮曹判書(예조판서)로 있을 때의 일화가 李奎象(1727-1799)의< 幷世才彦錄 병세재언록 >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備局(비국)의 書史車逵(서사차규)가 와서 말하기를 ‘회상컨대 옛날 영조 때 판서 具聖任(구성임)에게 특별히 統制使(통제사)를 제수하고 統營(통영)의 弊瘼(폐막)에 대해 장계를 올리라고 명 했다. 구성임이 통영에 도임하고 6개월 만에 비로소 狀啓(장계)를 올렸는데 대략 여섯 사람의 등짐 분량이나 되었다. 임금이 삼정승에게 명하여 3일 안에 稟議(품의)하여 회계 하라 하였다. 당시 領議政(영의정)은 李光佐(이광좌)였고 左議政(좌의정)은 閔應洙(민응수)였으며 右議政(우의정)은 宋寅明(송인명)이었다. 이정승은 종일토록 장계를 살펴보다가 정신이 피로해 그만 두니 처리된 장계가 한 짐 분량에 가까웠다. 민정승은 처음부터 가망하지 못해 3일 기한 중에 2일이 되었을 때 송정승이 비로소 열람하게 되었다. 그는 급히 牌(패)를 내어 예조판서 윤순을 들어오게 하는 한편, 장계 가운데 例題(예제)로 처리할 만한 것을 가려내어 담당 아전에게 주어 例題(예제)하게 하고 다만 긴요한 것들만 자신의 눈을 거치게 하였다. 이때에 3일의 기한이 이미 닥쳐왔다. 中使(중사)가 연달아 회계를 빨리 하도록 재촉 하였다. 송정승은 윤판서에게 가서 계문을 쓰도록 시키면서 한편 눈으로 살피고 한편 입으로 불렀다. 윤순의 붓대를 곁에서 바라보니 마치 구름이 흘러가는 듯하였다. 해가 甲時(갑시)에 이르러 다섯 짐 분량의 장계에 대한 회계를 마쳤다. 윤순이 처음 붓대를 잡았을 때 매번 문서의 글을 살펴본 후에 송정승 앞으로 보냈는데, 좌우에게 원장과 대조해 보게 하니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송정승이 말하기를 ‘예조판서의 붓이 아니면 누가 이 화급함에 부응할 수 있었으리오’라 하니, 윤순이 답하기를 ‘대감의 눈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이 화급함에 부응할 수 있었겠습니까?’라 하였다.”40) 위의 기록을 통해 백하 윤순은 조정에서 관료로서의 能力(능력)과 文筆力(문필력)등의 卓越(탁월)한 才能(재능)과 책임감을 따를 자가 없음을 알 수 있다.

< 윤순의 글씨 행장네이버 >도7)

백하의 초서는도7) 거침없이 물 흐르듯 춤을 추듯이 써 내려가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인데 그의 글씨는 < 대학 >에 보면“ 誠於中(형어중)이면 形於外(형어외)”라 마음에 내적인 성실함이 있으면 그것은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41) 윤순은 그 만큼 심취한 마음이 그대로 卓越(탁월)한 能力(능력)이 글씨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고려산 적석사비 >도8)

< 고려산적석사비의일부 >도9)

Ⅳ. 結 言

白河 尹淳의 학문은 5대조 윤두수의 영향과 정제두(鄭齊斗)로 부터 양명학에 접하였으며 글씨는 연미(姸美)함을 배제하고 창경발속(蒼勁拔俗)할 것과 만호제력(萬毫齊力)의 중봉법(中鋒法)을 持論(지론)으로 삼았다. 이 밖에 시문은 물론 산수. 인물. 화조에도 능하였으며 정치적으로도 많은 교우들을 통하여 폭넓은 관계를 이루었다. 노론과 소론의 당쟁으로 배척을 받아 困辱(곤욕)을 받기도 하였다. 백하 윤순을 연구한 결언(結言)은 첫째로, 왕희지와 미불의 美南宮體(미남궁체)를 기본적 至論(지론)으로 삼았고, 선조의 명필들을 따라 대를 이어 받았으니, 당(唐), 송(宋), 원(元), 명(溟)등의 명필 글씨를 소화하여 양명학의 영양으로 우리 고유의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고 특유의 백하체(白下體)를 이루게 되었다.‘ 둘째로, 시문을 통하여 살펴 본 바와 같이 파주장단에 기거 하면서 많은 교우관계로 실력을 연마하고 민생들 深意(심의)를 마음에 담는 淸廉(청렴)하고 能力(능력)있는 관료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주변의 많은 관료들과 교유 하였다. 또한 송시열의 수제자 심사정(1707~`1769) 과 간암 이희조(李喜朝1655~1724)가 있었는데 그중 간암의 제자 관아제 조영석이다. 관아제 33세 때 파주 장릉에 참봉(종9품)을 1725년 40세때 파주에 있는 공릉의 직장(종7품)에 보임된다. 이때에 백하 윤순은 1728년부터 1739년 즉 48세에서 59세까지 11년간 경기도 관찰사로 역임했다. 따라서 윤순은 경기도 관찰사를 두루 거치면서 간암과 관아제등 폭 넓은 교우관계임을 알 수 있었다. 이로 인하여 윤두수 그리고 정제두와 이서로부터 시작하여 백하 윤순에게 이어져 원교 이광사를 배출 되었다. 그는 당파에 관계없이 성리학을 주장하는 학파나 양명학을 주장하는 학파나 인맥과 학맥을 뛰어넘어 정치적인 관계를 이어 갔던 폭넓은 문장가요, 예술가임을 알 수 있다. 셋째로, 그의 글씨는 단정하고 단아한 글씨였지만 그는 정치적인 타파에도 당파에 굴하지 않는 志操(지조)와 思想(사상)을 지니고 있었으며 한국적 특성이 內在(내재)하는 그런 글씨를 創作(창작)한 그는 천재적이고 獨特(독특)한 特性(특성)의 所有者(소유자)이다. 그 어려운 난관 속에서도 스승인 하곡정제두의 양명학의 知行合一說(지행합일설)의 실심(實心)을 그대로 실천하였다는 것을 그의 生涯(생애)를 통하여 알 수 있었다. 이로 인하여 그의 정신이 어디에서 起因(기인)하였는지알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과 끈기 인내함으로 重厚(중후)한 문화를 遺産(유산)으로 남겼는지 肅然(숙연) 해진다. 그의 글씨를 보러 강화도 고려궁지의 명위헌(明威軒)을 탐방하고 강화도 고려산(436m) 적석사에 올라보니 적석사비는 세월의 흔적이 역역하여 남아 있었다. 高麗山積石寺碑(고려산적석사비)
도9) 라고 단정하고 단아하게 비석은 마모된 흔적이 있지만 金石文(금석문)으로 또렷이 남아 있었다. 깊이 새겨진 머리글은 몇 백 년이 지난 오늘도 蒼然(창연)히 빛나고 있었다. 다만 작은 글씨는 흔적만 남아 哀惜(애석)하다. 또한 이 비문이 누가 썼다는 내용이 입구에 안내되어 있지 않아 積石寺(적석사)도8)를 방문하는 관광객과 그 곳 사람들도 조선시대의 윤순의 글씨라는 것을 거의 모르고 있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오늘날 진정한 문화 保存(보존)을 위해서는 지난 2015년 10월28일 전시로 동국진체를 꽃피운 호남의 (서맥. 뉴스투데이)와 같이 역사와 전통을 알리는 投資(투자)와 硏究(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새로운 감각과 전통문화 繼承(계승)이 단 시간 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文化保存(문화보존)의 가치는 후손들의 곧 길잡이로 연결되어지는 關係(관계)로 보다 세심하게 觀察(관찰)하고 保護(보호)해야 함을 잊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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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坡州禮讚 (사) 한국문인협회 파주지부 이동륜 2013
18) 백하집(의장)-
19) 백하윤순서예술연구 2012경기대학교 미술.디자인대학원 전통예술학과 서예문자예술전공 장순영p
20) 坡州禮讚 (사) 한국문인협회 파주지부 이동륜 2013

21) 22) 고전번역자료- 정민 한시의멋에서 옮김)
23) 坡州禮讚 이동륜2013. p284
24) 세계미술용어사전
25) 우리나라한시 조영철글에서옮김
26) 석야 신웅순글에서 옮김 네이버
27) 성베네딕회관 수도원자 고진석신부 겸재 화첩감상에서옮김
28) 동양화의 이해 p118 진조복 1995
29) 美芾에 대하여 배경철 p1
30)31)39)경기대학교미술.디자인대학교전통예술학과장순영p14,p12.p33
32) 청성잡기-이동륜 글에서 옮김
33) 20세기중국회화의 거장 푸바오스 안영길 2013
34) 원교이광사의 서예술에 관한연구 호남대학교대학원 미술학과 서예전공 김명숙 2010
35) 38) 40)백하윤순서예술연구 2012경기대학교 미술. 디자인대학원 전통예술학과 서예문자 예술전공 장순영 p9. p8. p6
36) 37) 원교이광사 서예술에관한연구 호남대학교대학원 미술학과 서예전공 김명숙 2010 p28. 29
41) 오주석의 한국미의 특강오주석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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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董其昌의 畵眼 2003동기창
6) 두산백과(네이버)
7) Daum 사전


< 參考圖表 >
도1) 연광정의 ‘江’자 윤순의 글씨 서야 신웅순에서 옮김
도2) 연광정 겸재 그림 성베네딕토회 수도관 수도원 고진석신부 겸재화첩 강상에서 옮김
도3) 윤순의 그림 한국지식백과에서 옮김
도4) 윤순그림 흥진첩 경남대 박물관소장
도5) 미불글씨 촉소첩 위키백과
도6) 윤순의 고씨서축 중앙박물관소자 한국학중앙연구
도7) 윤순의 글씨 행장 네이버
도8) 고려산적석사비
도9) 고려산적석사비의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