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한국서도협회 공동회장
(사)한국서도협회 경기지회장, 경기서도대전 운영위원장(2011~)
(사)한국문인화협회 감사, 이사, 운영위원, 심사위원 역임
(사)한국서가협회 초대작가, 이사 및 심사위원 역임
(사)해동서예학회 부이사장
한국100대 문인화작가선정 작품기증(한국미술관/월간서예문인화)
KBS 소품작가
사군자(四君子)에 대한 小考
- 차 례 -
1 . 들어가며
2 . 四君子의 種類
가. 梅
나. 蘭
다. 菊
라. 竹
3 . 마치면서
1. 들어가며
가. 사군자(四君子)의 소개(紹介)
예로부터 동양인들은 덕성(德性)과 지성(知性)을 겸비한 인격자를 가리켜 군자(君子)라 불렀다. 이러한 군자적 성품은 누구나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찬미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당시의 지적(知的) 엘리트였던 문인(文人) 사대부(士大夫)들은 실현해야 할 인생의 궁극적 지표로 설정하고 적극 추천했었다. 사군자라는 명칭이 생긴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명대(明代)에 이르러서이며 그 이전에는 개별적으로 기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명칭이 붙게 된 것은 수많은 식물들 중에서도 매화(梅花)는 설한풍(雪寒風)속에서 맑은 향기와 함께 봄을 제일 먼저 알리며, 난초(蘭草)는 깊은 산골짜기에서 홀로 은은(隱隱)한 향기를 퍼뜨리고, 국화(菊花)는 늦가을 찬 서리를 맞으면서도 깨끗한 꽃을 피우고, 대나무는 추운 겨울에도 푸른 잎을 계속 유지하는 등 그 생태적 특성이 모두 고결(高潔)한 군자의 인품을 닮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사군자화가 처음 그려진 시기는 고려시대(高麗時代)로 본다. 이어 조선초기(朝鮮初期)에도 사군자화가 계속 문인들 사이에 그려졌다. 중기(中期)의 사대부 화가인 이정, 오달제, 어몽룡 등은 조선시대 묵죽(墨竹), 묵매화(墨梅畵)의 양식적 전통을 수립하였다. 후기에 들어오면서 조선시대 사군자화 질적․양적인 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김정희와 조희룡을 정점으로 한 말기의 사군자화는 약간 수그러진 듯하나 김규진, 조석진, 이하응 등의 그림에서 새로운 구도와 필치에 의한 시대적 감각의 표현이 나타났다.
나. 사군자(四君子)의 의미(意味)
‘군자(君子)’란 명칭은 본래 재질(才質)과 덕(德)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덕이란 미덕(美德), 덕풍(德風), 지덕(志德) 등을 총칭해서 부르는 말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많이 유행하였던 말이다. 사군자란 말은 본래 회화에서 사용했던 말이 아니고 인물을 가리킨 말이다. 즉 전국(戰國)시대에 맹상군(孟嘗君), 평원군(平原君), 춘신군(春申君), 신능군(信陵君)등 뜻이 높은 인물 네 사람을 골라서 그들의 덕망을 높이 받들기 위해서 부른 이름이다. 회화에서 이 말이 쓰이게 된 것은 매(梅)․난(蘭)․국(菊)․죽(竹)이 고결(高潔)하고 지조(志操) 높은 기개(氣槪)가 있다고 하여 앞서 말한 인물들의 이름을 모방한데 연유한다. 식물에 있어서 매(梅)․난(蘭)․국(菊)․죽(竹)․송(松)을 오우(五友)라고 하는데 송(松)은 산수화에 많이 사용되고 또 화법(畵法)이 약간 특출하여 송(松)을 제외한 네 가지 고결(高潔)한 식물을 일컫고 있다.
사군자 그림은 바로 이러한 문인사대부(文人士大夫)들의 삶을 확충, 고양시키고 그 마음의 뜻을 표현하기 위한 매체로서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문인사대부들은 사군자를 사시사철 그리고, 감상(鑑賞)하면서 윤리적 규범을 함양하고 성정을 바르게 순화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자신(自身)들의 신념을 나타내고자 하는 등 자기계발과 자기표현의 긴요한 수단으로 애호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사군자 그림은 지식층을 중심으로 갖추어야 할 예술적 교양의 하나로 여겨지면서 시문(詩文), 서예(書藝)와 함께 일상 생활화되었으며, 이러한 풍조(風潮)는 시대가 내려올수록 더욱 확산되었다.
다. 사군자(四君子)의 사의성(寫意性)
군자에 대한 인식은 그 신분성보다는 고매한 품성에 의한 인격적 가치로서 존경되었기 때문에 사군자를 그릴 때에도 대상물의 외형보다 그 자연적 본성을 나타내는 것이 더 중시되었다. 그래서 문인사대부들은 사군자의 형상 너머에 있는 정신과 뜻을 마음으로 터득하여 마치 시(詩)를 짓는 기분으로 추상적인 구도와 모든 색(色)을 함유하고 있다는 수묵(水墨)의 표현적인 붓 놀림을 통해 진솔하게 그리는 경지를 높게 여겼다.
사군자 그림은 외형의 단순한 재현이나 형식의 답습(踏襲)이 아니라 대상물이 자라고 성장하는 자연의 이치와 조화의 정신을 깊이 생각하면서 느껴진 자신의 감정과 마음의 정서(情緖)와 뜻의 표출인 사의성(寫意性)을 통해 가치가 추구되었던 것이다.
사군자 그림은 동양화와 수묵화의 중심사상과 핵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사의화(寫意畵)의 정수(精髓)이면서 동양회화의 대종(大宗)을 이루었던 문인화의 대표적 화목(畵目)으로서 크게 성행했으며, 마음을 수양하고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매체로서 널리 다루어졌다. 이는 곧 사군자가 그림뿐 아니라 동양의 문화와 정신의 본질적 가치와 의의를 집약시킨 하나의 표상으로서 전개되어 왔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군자는 일반적으로 매(梅)․난(蘭)․국(菊)․죽(竹)의 순서로 소개되며 이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에 맞추어 배열된 것이다. 그러나 기법의 습득단계는 전통적으로 가장 단순하고 기초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난초에서부터 시작하여 대나무, 매화, 국화의 순서로 진행된다.
2. 사군자의 종류(種類)
가. 매(梅)
1) 매화(梅畵)의 기원(起源)
매화(梅畵)는 대부분의 산수화가 다 그렇듯이 당대(唐代) 이전에는 인물화나 영모화의 배경 처리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발달 과정이 서화(書畵)보다는 뒤늦은 것으로 생각된다.
매화(梅畵)뿐만 아니라 산수화의 발전으로 인하여 동양화가 새롭게 변모하는 과정에서 사군자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 매화(梅畵)도 수묵매화(水墨梅畵)의 발전을 보게 되어 급격히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북송(北宋) 중엽 이전의 매화(梅畵)는 화법상(畵法上) 대부분이 구륵진채법(鉤勒眞彩法)의 고화방식이었으며 전체적인 회화구도에서 살펴보면 인물화조화의 배경의 일부분으로 그려졌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매화(梅畵)가 완전히 독립된 제재(題材)로 발전된 것은 북송 중기 이후부터라고 하겠다. 이때부터 북송(北宋) 산수화의 발전과 함께 산수화와 배합되었고, 그 결과 묵매화 역시 일차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묵매화는 북송시대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여 남송(南宋) 문인화가들간에 급격히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12세기 중엽에 와서는 광대하게 발전되어 매화(梅畵)를 전문으로 하는 화가가 나타났다. 그 발전 상황은 양보지(揚補之)에 의하여 강남(江南)으로 발전되었고 송(宋)과 금(金)의 남북문화(南北文化) 교류(交流)에 의하여 중국 북방화단(北方畵壇)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아울러 우리나라 고려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어 동방전체에 전파되었다. 원대(元代)에 와서는 중국 전통 학문의 복고운동(復古運動)의 영향을 받아 문인들이 즐기는 흥취(興趣)로 새로운 발전을 보게되었다. 12세기와 13세기에 와서는 묵매화(墨梅畵)에 대한 여러 화법(畵法)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특히 중국 북방에서 일어난 요형식 구도법(堯形式 構圖法)이 유행하고 있었다.
2) 매화(梅花)의 특성(特性)
매화(梅花)는 추위를 이기고 눈 속에서 피는 강인하면서도 고귀한 운치(韻致)를 그 특성으로 한다. 살을 에이는 추위 속에서 풍기는 매화향(梅花香)은 맑고 깨끗한 인품으로, 눈 속에서도 아름다운 자태는 봄을 알려주는 선구자적인 뜻으로 표현되고 있다. 늦겨울 이른 봄의 추위 속에 피는 강건한 특성은 훌륭한 덕성(德性)을 지닌 군자의 절개(節槪)와 지조(志操) 및 세속을 초월한 은일(隱逸)로 상징되고 있다. 그래서 설중군자(雪中君子), 청향(淸香), 옥골(玉骨), 화어사(花御史), 청객(淸客), 세외가인(世外佳人) 등으로 부른다.
3) 매화기법(梅畵技法)의 도래(到來)
매화(梅花)가 재배(栽培)되고 시(詩)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매우 오래 전부터였으나 수묵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북송(北宋) 때였으며, 창시자(創始者)는 선승인 중인(仲仁)이었다. 그는 호남성 화광사(湖南省 華光寺)의 주지로 문인 사대부였던 소동파(蘇東坡), 황정견(黃庭堅) 등과 교유(交遊)하면서 매화(梅花)를 사랑하고 이에 대한 시를 읊고 지내다가 우연히 창문으로 매화나무의 성근 그림자가 빗겨드는 것을 보고 그 소쇄(瀟灑)한 맛이 너무나 좋아서 붓으로 그 형태를 따라 그리다가 묵매삼미(墨梅三味)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발생된 묵매화(墨梅畵)는 같은 선승인 묘고(妙高)에 의해 이론적 체계화가 시도되었으며, 남송(南宋) 때에는 꽃잎의 윤곽을 그리는 권법(圈法)이 완성되기도 하였다. 묵매의 이러한 전통은 원대(元代)에 와서 오태소(吳太素) 등에 의해 크게 성행되었으며 구도(構圖)에서 북방식보다 남방식인 관식(貫式)이 더 유행하였다. 명대(明代)부터는 화보(畵譜)등의 출현으로 다소 형식화되었지만 청대(淸代)에 이르러 금농(金農)등의 개성파 화가들에 의해 보다 담채(淡彩)가 많이 곁들어진 화사(華奢)한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매화(梅畵)는 묵죽(墨竹)과 함께 고려 중기부터 그려졌으며, 조선시대에는 각 시기마다 구도와 기법을 달리하면서 독특한 양식으로 전개되었다. 조선 초, 중기에는 선비들의 기상과 밀착되어 고담한 모습으로 그려졌으며, 후기에는 문인화의 담백(淡白)한 분위기가 강조되다가 말기에 이르러 조희룡(趙熙龍) 등에 의해 봄의 화사(華奢)한 계절적 정취와 함께, 보다 회화성(繪畫性)을 짙게 나타내었다.
4) 매화(梅畵)의 조형적 특성(特性) 및 구현(俱現)
난초(蘭草)를 곡선미(曲線美), 대나무를 직선미(直線美)로 본다면 매화(梅花)는 굴곡미(屈曲美)에서 그 조형적 특성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매화(梅花)를 그리는 데는 전통적으로 다섯 가지의 필수적인 방법(五法)이 있다. 뿌리는 서로 얽혀야 하고, 대목은 괴이(怪異)해야 하며, 가지는 말쑥하고, 줄기는 강건할 뿐만 아니라 꽃은 기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36가지의 병(三十六病)이 있다 하여 한 가지라도 잘못 그리면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기본수련의 중요성과 함께 매화(梅畵) 역시 높은 경지에 들기가 어렵다는 점을 말해 주는 것으로 문제는 형식의 충실한 모방이 아니라 이를 통하여 자신(自身)의 감성과 뜻을 얼마만큼 구현시킬 수 있는가에 참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필법(筆法)도 중요하지만 그 속에 담긴 정신세계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매화(梅花)의 품종(品種)으로는 백매(白梅), 홍매(紅梅), 주매(朱梅), 시매(時梅), 록매(綠梅), 천엽매(千葉梅), 구영매(九英梅) 등이 있다. 그리고 많이 다루어졌던 화재(畵材)로는 월매(月梅), 설중매(雪中梅), 노매(老梅), 나부매(羅浮梅), 서호매(西湖梅), 정매(庭梅), 묵매(墨梅), 야매(夜梅) 등이 있다.
5) 매화(梅花)의 형태(形態) 및 필법(筆法)
매화(梅花)의 형태는 매우 많다. 대략 그 형태를 살펴보면 S자형, Z자형, C자형, V자형 등이 있고 또 자태에 있어서도 성글거나 번거롭거나 늙었거나 왕성한 자태들이 있어 제 가끔 그 표현 방법이 다르다.
매화(梅畵)의 필법(筆法)을 약간 설명한다면 뿌리의 체세(體勢)는 서로 얽혀야 하고, 간(幹)은 괴이(怪異)하여야 하며 꽃은 기이(奇異)하여야 하는데 이것을 오요(五要)라 한다. 그리고 이것이 매화(梅花)를 그리는 데 가장 중요한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매화(梅花)는 끈기의 식물이기 때문에 화가는 먼저 의(意)를 세우고 그 자세가 엄숙하여야 하며 정숙하여야 하고 사화(寫畵)의 형세가 특수하고 사체(寫體)가 마음속에 확립된 후에 이른바 비전(飛電)같이 낙필(落筆)하여 간(幹)부터 지(枝), 화(花), 꽃술 등을 차례로 그린다. 물론 묵 (墨)의 농담(濃淡)을 잘 조화시켜 처리하여야 한다.
가지는 늙은 고목(枯木)의 형태와 연약한 형태의 분별이 있어야 하고 꽃술은 상하가 잘 조화되어야 하고 줄기는 장단(長短)의 도(度)가 있어야 한다.
꽃은 반드시 꽃잎으로 이루어지며, 꽃잎은 가지 위에 배치하고, 가지는 반드시 고목(古木)을 안고 있어야 하며, 고목(古木)에는 나무껍질이 있어야 하고, 껍질은 반드시 고절(古節)을 향해 있어야 하며 절(節)은 두 개가 나란히 있을 수 없고 삼화(三花) 또는 삼각구도(三角構圖)가 있어야 한다.
구분묵으로 지(枝)와 꽃받침을 이루고, 가지가 고목(古木)일 때에는 반드시 한가로운 뜻이 있어야 하고 가지가 굽어 있을 때는 반드시 고요하고 정숙한 뜻이 있어야 한다. 작가는 항상 마음을 온화하게 가져야 하고, 손놀림은 신속하여야 한다. 묵(墨)은 반드시 담기(淡氣)가 있어야 하며 붓은 건필(乾筆)이어야 한다. 꽃은 원형이되 국화를 닮아서는 안되고, 가지는 깡마른 버드나무를 닮아야 한다. 즉, 이와 같은 것이 매화(梅花)를 그리는 이론상의 화법(畵法)이다.
나. 난(蘭)
1) 난화(蘭畵)의 기원(起源)과 변천(變遷)
난초 그림은 처음에 화조화(花鳥畵)의 일부분으로 시작되었다. 송대말(宋代末), 원대초(元代初)의 사람인 정소남(鄭所南)에 이르러서야 묵난법(墨蘭法)이 처음으로 시도되었으며 그 때부터 점차 성행되었다는 기록이 많이 있다. 정소남을 시조로 해서 시작된 묵란은 원대(元代)의 조맹부와 그의 부인 관도승의 난화(蘭畵)가 더불어 발전을 보게 되는데, 점차 시대를 경과하면서 화풍(畵風)이 서로 다른 두 개의 파, 즉 문인기흥파(文人奇興派)와 규수전신파(閨秀傳神派)가 그것이다.
난초(蘭草)는 깊은 골짜기에서 홀로 고고하게 향기를 품고 있는 모습이 세속의 이욕과 공명(功名)에 초연하였던 고결한 선비의 마음과 같다고 하여 유곡가인(幽谷佳人), 유인(幽人) 또는 향조(香組), 군자향(君子香) 등으로 불리었다. 그리고 정절과 충성심의 상징으로 찬미되기도 하였다.
난초의 상징성은 초(楚)나라의 시인이며 충신이었던 굴원(屈原)이 난의 고결한 자태를 거울로 삼았다고 읊었듯이 이미 오래 전부터 형성되었다. 그러나 난초가 그림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북송(北宋) 때부터였으며, 처음에는 화조화의 일부분으로 그려지다가 미불에 의해 수묵법에 의한 독립된 화재(畵材)로 다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미불은 서예에도 뛰어났던 문인화가로 그의 난화(蘭畵)에 대해 비평가들은 잎이 서로 교차하는데도 혼란치 않고 실로 희대의 기품(奇品)이라고 찬탄(讚嘆)을 하였다.
이와 같이 화조화의 배경에서 하나의 화재(畵材)로 독立된 묵란(墨蘭)을 보다 사의적(寫意的)으로 발전시킨 사람은 정소남이였다. 그는 남송(南宋)이 원(元)에 망하자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면서 나라를 빼앗긴 울분(鬱憤)을 땅을 그리지 않음으로써 뿌리가 드러난 로근난(露根蘭)을 통해 토로(吐露)하였다. 그의 이러한 정신과 난법(蘭法)은 일대종사(一代宗師)로서 후인들의 규범이 되어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원(元)나라 때는 송설체(松雪體)로 유명한 조맹부(趙孟頫)와 설창(雪窓)등에 의해 산뜻하고 단아(端雅)한 모습의 묵란(墨蘭)이 유행되기도 하였으며, 특히 조맹부의 부인인 관도승(管道昇)의 맑고 수려한 난화는 마수정(馬守貞), 표표(表表) 등의 여류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쳐 이들을 ‘규수전신파(閨秀傳神派)‘라 부르기도 한다.
문인화가 널리 보편화되었던 명대(明代)에 와서 묵란(墨蘭)은 더욱 크게 성행하였고, 이러한 전통이 청대(淸代)에도 계속 이어져, 보다 다양하고 개성이 강한 화풍으로 발전하였다. 그 중에서도 명조유민화가(明朝遺民畵家)와 '양주팔괴(陽州八怪)'중 한 사람인 정섭(鄭燮) 등이 특히 뛰어났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묵란(墨蘭)은 고려 말기에 전래되어 조선 초기부터 그려지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에 이르러 대성되었고, 그 전통이 근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렇듯 묵란은 그 은은(隱隱)한 먹 향기와 수려(秀麗)한 곡선미와 청초(淸楚)한 분위기를 통해 고결(高潔)한 이념미가 역대의 뛰어난 문인화가들에 의해 계승, 발전되어 오면서 사군자그림과 문인화의 발달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사군자를 칠 때, 이러한 전통과 상징성을 지닌 묵란을 제일 먼저 시작하는 것은 난초의 생김새가 한자(漢字)의 서체(書體)와 닮은 점이 가장 많다는 데 있다. 난엽(蘭葉)을 그리는 것을 잎을 그린다고 하지 않고 잎을 친다고 하는 것도 글씨에서 삐치는 법(法)을 쓰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추사 김정희선생은 "난초(蘭草)를 치는 법(法)은 예서(隸書)를 쓰는 법(法)과 가까워서 반드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은 뒤에 얻을 수 있다."고 하여 이론적으로 서체훈련(書體訓練)이 회화기술(繪畵技術)의 기초가 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점은 묵난화가 문인묵객들이 즐겨 찾던 주재(主材)의 하나로서 시(詩), 서(書), 화(畵)에 능한 삼절(三絶), 특히 서예에 뛰어난 사람들에 의해 주로 그려졌던 사실로도 알 수 있다.
2) 난초(蘭草)의 종류(種類)
난초의 종류는 상당히 많지만, 묵난화에서는 주로 춘란(春蘭)과 건란(建蘭)을 다룬다. 춘란(春蘭)은 초란(草蘭), 독두란(獨頭蘭), 유란(幽蘭)이라고도 하는데, 잎의 길이가 각각 달라서, 길고 짧으며 한 줄기에 한 송이의 꽃이 피는 것으로 일경단화(一莖單花)라하며 청의 정판교(鄭板橋)와 조선 말기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석파 이하응(石坡 李昰應),소호 김응원(小湖 金應元) 등이 잘 그렸다.
건란(建蘭)은 웅란(雄蘭), 준하란(駿河蘭)이라고도 했으며, 잎이 넓적하고 뻣뻣하며 곧게 올라가는데 한 줄기에 아홉 송이의 꽃이 피는 것으로 일경다화(一莖多花) 또는 일경구화(一莖九花)라고도 한다. 복건지방(福建地方)이 명산지인 이 난(蘭)은 청(淸)의 오창석(吳昌碩)과 조선 말기의 운미 민영익(芸楣 閔泳翊)이 특히 잘 그렸다.
3) 난화(蘭畵)의 기법(技法)
가) 난화(蘭畵)에 대한 이해(理解)
난은 원래 심산유곡(深山幽谷)에 홀로 피어있는 고고한 식물로서 고대(古代)의 시경(詩經)과 초사(楚辭)에서도 볼 수 있는데, 예로부터 사람들은 ‘유미인(幽美人)’, ‘군자가패(君子可佩)’, ‘왕자지향(王者之香)’, ‘향초(香草)’ 등으로 지칭하며 그 청초(淸楚)한 기상과 그윽한 향기를 사랑해왔고, 특히 문인묵객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었다. 난화(蘭畵)는 사대부들이 즐겨 그린 문인화파, 즉 청객파(淸客派)와 직업화가인 화공(畵工)들에 의하여 전래된 속파(俗派)로 나눌 수 있는데 객관적인 외형을 주시하던 속파(俗派)들의 채색난화(彩色蘭畵)보다 주관적인 몰골기운(沒骨氣韻)을 중요시하며, 난이 내포하고 있는 수려한 아름다움의 정신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지닌 높은 인격과 철학을 가미하던 사대부들의 수묵난화를 한층 더 격조높이 인정해왔다. 서예의 학습에 있어서는 고정된 문자를 옛사람들이 활동하던 법첩(法帖)과 탁본(拓本)에 의하여 오랜 기간 하나하나 익히고 연구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작가의 개성에 따른 독특한 서풍의 창작이 가능하지만, 난화(蘭畵)에 있어서의 운필(運筆)은 서법(書法)에 따르되 식물체를 대상으로 그 모양을 비슷하게 나타내려는 생각은 떨쳐버려야 한다.
나) 난엽(蘭葉)에 대한 이해(理解)
난(蘭)은 잎을 그리는 것이 순서이므로 먼저 붓을 맑은 물에 씻은 후 붓촉을 잘 조정하여 진묵(眞墨)과 수묵(水墨)을 적당히 섞는다. 몸의 균형을 바르게 취한 후 붓끝이 종이에 닿을 때 가볍게 역입(逆入)해서 붓이 나아갈 방향으로 약간 비스듬히 기울이되 붓끝이 긋는 선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하여 팔과 함께 오른편 혹은 왼편으로 그어 올라가는데 이때 선은 굵고 가늠이 교차되어야 한다. 시각이 윗부분에서 굵어지게 하여 사마귀의 배모양 같다하여 당랑복(螳螂腹)이라 부르며, 붓을 들어 가늘어진 부분을 경제(輕提)라고 하여 잎이 방향을 바꿀 때 보이는 옆모습을 표현하는 것이다. 다시 붓끝에 약간 힘을 주어서 굵게 그은 부분을 압제(押提)라고 하면서 잎의 정면을 나타내는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붓을 가볍게 끌면서 쥐꼬리와 같이 자연스럽게 붓을 떼는데 이것을 서미법(鼠尾法), 곧 발출(撥出)이라고 한다.
실제 난 잎을 관찰해 보면 긴 잎은 두, 세 번 정도 방향이 바뀌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을 화법상(畵法上)의 용어로 ‘삼전지묘(三轉之妙)‘라 하는데 난의 생태학적 특성을 살려 그 부분에 흐르는 심기(心氣)를 표현하려고 한 것이며, 또한 그 묘출(描出)이 곡선자체의 변화와 필력(筆力)을 얻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이 삼전의 묘를 외형상으로 너무 가시화시키는 것보다는 내면의 기운을 구하는 편이 좋다. 한 잎이 완성되면 두 잎, 세 잎 차례로 그려 나간다. 이때 유념해야 할 점은 굵은 부분 혹은 가는 부분이 서로 겹쳐서는 좋지 않다는 것이다. 굵은 부분끼리 겹친 부분은 더욱 투박하여지고 가는 부분끼리 겹친 부분은 더욱 나약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 잎이 엇갈리며 그려진 상태를 봉안(鳳眼) 혹은 상안(象眼)이라 부르고 그 사이를 지나면서 세 잎 째를 그린 상태를 파안(破眼) 또는 파봉안(破鳳眼), 파상안(破象眼)이라 부르며 난화(蘭畵)의 기본으로 삼는다. 이와 같이 단순한 선 세 개에서도 사물의 위치, 즉 원근법이 나타난다. 그것은 첫째 잎보다는 둘째 잎, 둘째 잎보다는 셋째 잎의 출발점에서 볼 수 있고 또 선이 겹친 부분에서도 느낄 수 있는데, 이러한 느낌이 부족한 난화(蘭畵)는 결코 성공적인 작품이라 할 수 없다.
봉안이나 상안이란 말은 두 난 잎이 교차하며 이룬 공간의 모양이 흡사 봉(鳳)의 눈이나 코끼리의 눈, 즉 눈꼬리가 위로 치켜진 것과 같다하여 붙여진 미칭이고 파안, 파봉안, 파상안 등은 그 모양을 깨어준다는 뜻으로 쓰인 말인데 이러한 기본필법을 배울 때 각 잎의 시작 부분이 서로 너무 떨어져있어 산만해 보이지 않도록 익혀야 한다. 처음 기수(起手), 봉안(鳳眼), 파봉안(破鳳眼) 순으로 난 잎을 연결하여 익히고, 용묵(用墨)과 운필(運筆)이 숙달되면 여러 촉의 난을 엮어 나가는 연습을 한다.
다) 실물난초(實物蘭草)와 문인화(文人畵)에서의 난(蘭)에 대한 이해(理解)
난초(蘭草)의 실물을 보면 그 영양상태가 좋은 것은 한 촉에 다섯 잎까지도 자라지만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두 잎 밖에 나지 않으므로 여러 촉을 연결해서 그릴 때는 촉마다 반드시 네 잎, 혹은 다섯 잎을 그리지 않아도 된다. 길고 짧은 잎이 여러 개 서로 걸쳐지면 뒷 잎이 앞 잎을 겸하기도 하고 짧은 잎이 뻗어나가 길게 보이기도 하므로 모든 잎들이 적당한 방향으로 뻗어나가 지면(紙面) 전체의 짜임새에 맞아야 한다. 이때 운필은, 서법에서 행서(行書)나 초서(草書)가 굳이 해서(楷書)의 고정된 법칙에 구속되지 않듯이 자연스럽고 경쾌한 필치(筆致)로 엮어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난 잎을 칠 때 다음과 같은 금기사항(禁忌事項)이 있다는 것을 유념하여야 할 것이다. 즉, 제장(薺長), 미자(米字), 십자(十字), 정자(井字) 등이 그것인데 제장(薺長)이라 함은 같은 방향으로 길이가 같은 두 잎이 나란히 뻗는 것을 말하며 정자(井字)는 네 잎이 서로 겹치면서 그 사이로 마름모꼴이 생기는 것을 말하며, 미자(米字) 또는 수자(水字)는 세 잎 또는 네 잎이 같은 부분에서 교차되며 겹치는 것이고, 십자(十字)는 한 잎이 여러 잎 위로 꿰듯이 지나가면서 많은 십자(十字)를 만드는 것을 말하는데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특히 이러한 금기사항을 염두에 두면서 익혀야 한다.
실제 난초를 기르다 보면 위와 같은 현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나 그림으로 그렸을 때는 그와 같은 모양이 아주 보기 흉하기 때문이다. 특히 여러 포기의 난을 옆으로 혹은 길이로 엮어 나아가야 하는 원란(苑蘭)이나 한쪽으로 쏠리게 그리는 풍란(風蘭), 또는 거꾸로 매달린 듯 자라는 현애도란(懸崖倒蘭) 등을 그릴 때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면 특히 보기 흉하다. 그러나 어느 정도 운필이 손에 익숙해진 후에는 위의 금기사항에 너무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다. 국화(菊花)
1) 개요(槪要)
국화(菊花)는 사군자에서 가을을 대표하는 꽃으로서 그 형태와 종류가 많다. 그리고 꽃의 크기와 색깔의 종류도 다양하다. 꽃의 크기는 대략 대. 중. 소가 있으며 색에도 백색(白色), 황색(黃色), 주색(朱色), 자주색(紫朱色) 등이 있으나 오행에 의한 색채의 배열에서는 중앙에 황색을 놓고 동쪽에 청색, 남쪽에 적색, 서쪽에 백색, 북쪽에 흑색을 두게 됨으로써 중앙에 황색을 가장 바른 色(正色)으로 여기어 왔기에 황국(黃菊)을 가장 소중히 다룬다.
국화는 서리(霜)가 내리는 계절이 되어도 추위를 무릅쓰고 꽃을 피우기에 '상하걸(霜下傑)', '오상지(傲霜枝)'라는 별명도 있다.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장수(長壽)를 바라는 사람들이 중양절(重陽節[陰曆 9月 9日])에 국화주(菊花酒)를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 한다. 그리하여 9月을 국추월(菊秋月) 이라고도 한다.
2) 국화(菊畵)의 기원(起源)
진(晋)나라의 시인 도연명(陶淵明(365~427))이 국화를 찬양한 시에 "채국동리하 유연견남산(彩菊東籬下 悠然見南山)"이라는 귀절(句節)이 있는 바, 국화의 별칭으로 ‘동리만향(東籬晩香)’이 되었다. 그 후 국화에 매혹된 문인들이 군자와 같은 향기 높은 꽃이라 하여 사군자로 격상시켰다고 한다. 그러므로 국화를 그릴 때는 청고(淸高)한 품격의 자세를 가슴속에 품어야 한다.
국화의 시조는 송대(宋代)의 범석호(范石湖), 유준호(劉俊湖)라 할 수 있으며, 그 후로 표현양식에서 두 개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강한 색조의 채색구륵법(彩色鉤勒法)으로 송대(宋代)의 황전(黃筌)을 비롯하여 조창(趙昌), 등창우(藤昌祐), 구경여(邱慶餘), 황거보(黃居寶) 등이 있으며, 또 하나는 필묵의 수묵몰골법(水墨沒骨法)을 개발한 북송대(北宋代)의 서희(徐熙)를 비롯하여 원(元), 명대(明代)에 이르러서는 조이제(趙彛濟), 이소(李昭), 가단구(柯丹丘), 왕약수(王若水), 성설봉(盛雪逢), 주저선(朱樗仙) 등과 청대(淸代)는 도청격(圖淸格), 명화상(明和尙), 금농(金濃), 근대(近代)로 오창석(吳昌碩)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국화를 화조화의 일부소재로 취급하다가 조선시대 후기에 묵국(墨菊)이 나타나면서 이산해(李山海), 함제건(咸悌健), 류환덕(柳煥德)등이 알려져 있다.
3) 국화(菊花)의 특성(特性)
국화는 다른 꽃들이 만발하는 계절을 참으며 서리 내리는 늦가을에 그 인내(忍耐)와 지조(志操)를 꽃피운다. 만물이 시들고 퇴락(頹落)해 가는 시절에 홀로 피어나는 이러한 국화의 모습은 현세를 외면하며 사는 품위 있는 자의 모습인 오상고절(傲霜孤節)한 군자를 연상케 한다.
그래서 옛부터 국화(菊花)는 만향(晩香), 오상화(傲霜花), 선선상중국(鮮鮮霜中菊), 가우(佳友), 절화(節華), 금화(金華)등으로 불리면서 정절(貞節)과 은일(隱逸)의 꽃으로 알려져 왔다.
국화도 다른 사군자와 마찬가지로 북송대(北宋代)부터 문인화의 성격을 띠고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묵국만을 전문으로 다룬 화가는 매우 드물었으며 청말기(淸末期)에 와서 오창석(吳昌碩) 등에 의해 회화성(繪畫性) 강한 채국(彩菊)이 많이 그려졌다. 우리나라에서도 묵국화는 그다지 성행하지 못했고 조선말기(朝鮮末期) 이후에 오히려 화화(花畵)로서 보다 많이 다루어졌다.
4) 국화(菊畵)에 대한 이해(理解)
국화의 종류도 상당히 많지만 그 중 빛깔에서 황국(黃菊)을 으뜸으로 친다. 국화는 단독으로 그려지기보다 다른 초화(草花)나 괴석(怪石)과 함께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국화 전체 모습의 운치(韻致)는 꽃이 높은 것도 있고 낮은 것도 있으면서 번잡하지 말아야 하며, 잎은 상하, 좌우, 전후의 것이 서로 덮고 가리면서도 난잡(亂雜)하지 말아야 한다. 국화의 꽃과 꽃술은 덜 핀 것과 활짝 핀 것을 갖추어서 가지 끝이 눕든지 일어나 있든지 하여야 한다. 활짝 핀 것은 가지가 무거우므로 누워있는 것이 어울리고 덜 핀 것은 가지가 가벼울 수밖에 없으므로 끝이 올라가는 것이 제격이다. 그러나 올라간 가지는 지나치게 꼿꼿해서도 안 되고 누운 것은 너무 많이 드리워서는 좋지 않다. 국화의 잎의 형태는 다섯 갈래로 갈라지고 파진 곳이 네 군데가 있어서 그리기가 어렵다. 이를 나타내는 데는 반엽법(反葉法), 정엽법(正葉法), 권엽법(捲葉法), 절엽법(折葉法) 등의 네 가지 화법(畵法)이 있다.
그러나 국화는 늦가을에 피는 서리에도 오연(傲然)한 꽃이다. 그러므로 섬세(纖細)하고 화사(華奢)한 봄철의 꽃과는 특성이 다르다. 그림이 종이 위에 이루어졌을 때 만절(晩節)을 굳게 지켜 그윽한 향기를 풍기는 국화(菊花)를 대하는 느낌이 들어야 하는 것이다.
라. 죽(竹)
1) 개요(槪要)
죽도(竹圖)는 대나무를 소재로 한 문인화이다. 대나무야말로 역경의 모진 바람에 아무리 낮게 구부러질지언정 꺽이지 않는 고결(高潔)함을 지닌 유연(柔軟)하면서도 강한 군자의 상징이다. 대나무의 뿌리는 굳고 그 줄기는 곧으며 그 속은 비었으니 허심(虛心)하고 그 마디는 굳건하여 절개(節槪)가 있고, 그 기개(氣槪)는 청렴(淸廉)하여 벽옥랑우(碧玉琅友)의 산뜻한 모습은 고아(高雅)하여 군자에 비유한다. 유연한 우아(優雅)함을 지닌 줄기와 날카로운 칼끝 같은 잎들은 붓의 특성을 발휘할 수 있는 완벽한 소재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먹으로만 그리는 죽도(竹圖)는 화가들이 예술 가운데 가장 어려운 서예에 가장 밀접하게 접근시켜주는 것이었다. 대나무를 그릴 때는 잎과 줄기 그 하나 하나의 모양과 위치를 분명하게 그려야 한다. 어색한 이음새들이 산수화에서처럼 안개 속에 감추어질 수는 없다. 가까운 잎의 농묵(濃墨)으로부터 먼 곳의 담묵(淡墨)으로 변해 가는 것이 정확하게 처리되어야 하며, 줄기와 잎, 잎 과 텅 빈 공간의 균형도 완벽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것을 대나무의 나긋나긋한 움직임을 나타내야 한다. 위대한 죽도(竹圖)란 높은 경지의 원리를 터득한 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2) 죽도(竹圖)의 기원(起源)
이러한 예술이 성행하게 된 것은 육조시대(六朝時代)였는데, 당시에는 아주 작은 소품(小品)을 제외하고는 줄기나 잎의 윤곽을 먹으로 그리고, 그 안에 짙은 색을 칠해 넣은 것이 관습처럼 되어 있었다. 이렇게 많은 정성을 요구하는 기법은 주로 서원화가(畵園畵家)들에 의해 이어져 내려왔지만, 송대(宋代)의 최백과 왕연도 때때로 이 기법을 사용하였다. 당대(唐代)에는 죽도(竹圖) 유행이 다소 수그러진 듯 하지만, 송대(宋代)에는 널리 인기를 얻게 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 소동파(蘇東波)가 있다. 원대(元代)에는 몇몇 화가들이 대나무를 먹으로만 그리는 방법을 완성하였는데 특히, 예찬과 조맹부가 유명하며, 중국의 여류화가중의 한 사람인 조맹부의 부인 관도비는 어려운 대나무 그림의 기법을 터득하여 남편과 함께 어깨를 견줄만한 경지에 이르렀었다.
대나무는 예로부터 문인사대부들의 가장 많은 애호를 받으면서 사군자의 으뜸으로 꼽혀 온 것이다. 그것은 대나무의 변함 없는 청절(淸節)한 자태와 그 정취(情趣)를 지조(志操)있는 선비의 묵객(墨客)들이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늘 푸르고 곧고 강인(强忍)한 줄기를 가진 이러한 대나무는 그래서 충신열사(忠臣烈士)와 열녀(烈女)의 절개(節槪)에 비유되기도 하였다.
대나무가 그림의 소재로 등장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였으나 수묵화의 기법과 밀착되어 문인사대부들의 화목(畵目)으로 발달시킨 사람은 북송(北宋)의 문동(文同)과 소동파(蘇東波)이었다. 문동(文同)은 '호주죽파(湖州竹派)'를 형성하여 묵죽화의 성행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소동파(蘇東波)는 특히 그리고자 하는 대나무의 본성을 작가의 직관력으로 체득하여 나타낼 것을 주장한 '심중성죽론(心中成竹論)' 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남송(南宋) 때에 이르러 묵죽은 더욱 유행하였고 원대(元代)에는 문인사대부들의 저항과 실의의 표현방편으로 성황을 이루기도 하였다. 원대(元代)에는 문징명(文徵明), 서위(徐渭) 등의 명가(名家)들이 나와 가늘면서 굳센 묵죽화풍(墨竹畵風)을 형성했으며, 이러한 전통(傳統)이 명대(明代)에 자연미와 이념미가 융합되면서 청대(淸代)로 계승되었다.
3) 죽도(竹圖)에 대한 이해(理解)
죽(竹)을 그리는 데 묵죽을 기본으로 삼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으나 묵죽 이전에 사죽(寫竹)과 채색죽(彩色竹)의 방법이 이미 있었음을 기록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사죽(寫竹)은 사생(寫生)에 의한 대나무의 묘사방법이고 채색죽(彩色竹)은 윤곽을 선묘(線描)로 두르고 안에 칠(漆)을 하는, 이른바 채(彩)의 방법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대나무는 수묵법과 결부됨으로써 비로소 동양회화의 중심적 창작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기운(氣韻)과 정신(精神)의 주관적 표현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묵(墨)이란 선(線)으로서 작용할 뿐 아니라 색채(色彩)를 대신한 면으로서도 작용한다. 문동(文同)이나 소동파(蘇東波)에 의해 처음 시도된 묵죽은 바로 대상물의 외형적 사생(寫生)을 떠난 정신의 실천적 방법으로 죽(竹)을 그린 것이 되며, 이 때의 묵(墨)은 현상세계 너머의 조화력을 암시하는 것으로 묵선(墨線)이나 묵면(墨面) 모두 그 기운(氣韻)을 담는 형식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묵죽과 동양회화가 지니고 있는 사의정신(寫意精神)은 이러한 창작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묵죽(墨竹)도 묵란(墨蘭)과 마찬가지로 서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찬은 서법 없는 묵죽은 병든 대나무를 보는 것 같다고 했으며, 어떤 이는 서법과 죽법은 동체라고 하였다.
묵란이 짧고 긴 곡선의 반전 등을 통해 풍부한 변화를 보이는 데 비해 묵죽은 직선이 위주이며 그 구도에서도 보다 다양한 것이 특색이다.
묵죽을 그리는 절차와 방법이 있는데, 줄기(幹)와 마디(節), 가지(枝)와 잎(葉)마다 그리는 순서가 있다. 먼저 죽간(竹竿)을 그리고 다음에 가지를, 이어서 방향과 필법을 변화시켜 잎을, 마지막으로 마디를 그리는 것이 청대(淸代) 이후 확립된 죽화법(竹畵法)이다.
이 순서는 시(詩)에서의 기승전결(起承轉結)과 같다. 이러한 붓질의 흐름은 사군자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지만 그 중에서도 죽(竹)의 경우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묵죽을 그리는 것이 다른 사군자에 비해 어렵게 여겨지는 것은 대나무의 형태 자체는 단순하지만 일기(日氣)와 계절적 정취(情趣)에 따른 변화가 다양하고 미묘하기 때문이다.
대나무는 이러한 기후와 자연적 정경에 따라 청죽(晴竹), 앙죽(仰竹), 로죽(露竹), 우죽(雨竹), 풍죽(風竹), 설죽(雪竹), 월죽(月竹) 등의 화재(畵材)로 다루어졌는데 대가(大家)들조차 50年을 그린 후에야 비로소 그 경지가 터득되고 마음에 드는 죽화(竹畵)를 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곧 묵죽의 높은 경지와 깊은 맛을 시사하면서 이러한 사군자그림들이 결코 본격적인 회화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기초 내지는 예비단계의 차원이 아니라 동양회화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의의를 내포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4) 죽(竹)의 표현기법(表現技法)과 회화정신(繪畵精神)
대나무 잎의 묘사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경아식(驚鴉式), 개자식(字式), 분자식(分字式), 파분자식(破分字式) 이다. 〈풍죽도(風竹圖)〉에서는 바람을 맞이하는 쪽의 대나무 잎은 사필경아식(四筆驚鴉式, 네 잎을 까마귀가 놀라 날개를 펴고 달아나는 모양으로 그리는 방식)을 구사하였고, 그 반대쪽 대나무 잎은 첩분자식(疊分字式, 한자의 分字를 여러 개 겹친 모양으로 그리는 방식)과 삼필개자식(三筆个字式, 个字를 풀어 쓴 방식)의 형식을 취하였다.
아래에 소개하는 것은 제1절의 내용이다.
저쪽 기수 후미를 보아라 (첨피기오瞻彼淇奧)
푸른 대나무는 청초하고 무성하니 (록죽綠竹)
고아한 군자가 거기 있네 (유비군자有匪君子)
뼈와 상아를 다듬은 듯 (여절여차如切如磋)
구슬과 돌 갈고 간 듯 (여탁여마如琢如磨)
정중하고 너그러운 모습이여 (슬혜혜瑟兮兮)
빛나고 뛰어난 모습이여 (혁혜혜赫兮兮)
고아한 군자가 거기 있네 (유비군자有匪君子)
결코 잊지 못하겠네 (종불가終不可)
< 기오 >는 기수(淇水) 가의 대나무를 위(衛)나라 무왕의 인품에 비유하여 읊은 시(詩)로, 모두 3절(節)로 되어 있다. 3절을 통하여 '비군자(匪君子)' 라는 말이 다섯 번 나오는데, 모두 대나무를 의인화해서 비유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 詩經(시경) > 이후 대나무와 군자 사이가 가까웠던 때는 선비들의 풍류로 유명한 중국 육조시대(六朝時代)이다. 죽림칠현(竹林七賢)들이 대나무 숲을 은거처로 삼아 군자를 자처하며 풍류를 즐긴 것이라든지, 왕희지(王羲之)의 아들 왕휘지(王徽之)가 대나무를 가리켜 "차군(此君)없이 어찌 하루라도 지낼 수 있느냐"고 하였다는 일화가 이를 입증해 준다. 대나무에 대한 이와 같은 정서는 "내 벗이 몇인고 하니 水石과 松竹이라"고 읊은 윤선도의 < 오우가(五友歌) >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선비화가들은 대나무 등 사군자를 그림에 있어서 작화(作畵) 태도의 확립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그 때문에 사군자를 그리는 사람은 예술의 기법에 앞서서 문학의 교양을 필요 불가결한 것으로 여겼다. 서권기(書卷氣)가 바로 그것이다. 서권(書卷)의 기운(氣韻)이 없고서는 대나무건 난초건 그 격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였다. 선비들은 그래서 단순한 기예(技藝)는 서권(書卷)의 기(氣)를 구비하지 못한 교묘(巧妙)한 손재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문인화의 기본 정신은 인품(人品)과 서품(畵品)을 동일시하는 데에 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대나무 그림이 마치 아무나 손쉽게 기법을 습득해서 그릴 수 있는 화목(畵目)인 것처럼 착각(錯覺)되고 있는 느낌이 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 풍죽도(風竹圖) >는 오늘날 잘못된 사군자 그림의 추세에 많은 점을 깨우쳐 주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3. 마치면서
예술(藝術)이란 작가의 감성작용과 다양한 사회적 기능이 내포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에는 그 시대와 사회의 사상 등을 포함하며 어느 민족, 국가, 더 나아가서는 인류문화유산으로 남게 된다. 따라서 예술작품 통하여 그 시대상황, 사회, 민족특성을 규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매(梅)․난(蘭)․국(菊)․죽(竹)의 각기 다른 아름다움과 특징을 사랑해서 "사군자(四君子)"라 칭하였다. 사군자는 아주 오래 전부터 회화작품으로 그려져 왔으며, 문인사대부들이 즐겨 그렸던 화목(畵目)이라 해서 넓은 의미의 문인화의 범주에 넣기도 한다. 이와 같이 사군자는 문인사대부들의 정신적 표현수단으로써 사랑을 듬뿍 받으며 발전되어왔다.
하나의 문화가 출현하여 사회적․역사적 승인을 받게 되면 그것의 바탕인 사회적․역사적 상황이 바뀌어도 문화는 그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펼쳐 나간다. 이러한 문화현상을 우리는 보통 “전통(傳統)”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문화층을 형성했던 왕공사대부(王公士大夫)들의 빈번한 중국 왕래로 자연스럽게 그들의 문화를 접하고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중국에서 문인화가로 상당한 이름을 날리던 문동(文同)․소동파(蘇東坡) 그리고 조맹부(趙孟頫) 등과 교류하면서 영향을 상당히 받았으며, 특히 소동파(蘇東坡)에 대한 열기가 높아 그의 문인화(文人畵)와 서화일률론(書畵一律論) 같은 문인화) 이념의 수용에 적극적 자세를 취해 12C 고려화단(高麗畵壇)에 전래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조선시대는 회화가 가장 발달한 시기로 문인사대부를 비롯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특히 묵죽을 좋아하는 화목(畵目)으로 즐겨 그리면서 한 시대를 풍미(風靡)했었다.
조선시대는 고려의 군자사상과 유교정신에 바탕을 둔 왕공사대부(王公士大夫)들의 기호(嗜好)로 감상화(鑑賞畵)가 발달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사회적․정치적으로 많은 전란과 당쟁으로 매우 혼란했던 조선중기는 어려웠던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명말(明末)․청초(淸初)의 절파화풍(浙派畵風)이 도입되고 겸제 정선(謙齊 鄭敾)의 새로운 화법(畫法)을 과감하게 시도한 회화(繪畵)의 혁명기라 할 수 있다. 묵죽화 또한 탄은 이정(灘隱 李霆)을 비롯하여 많은 문인화가들의 활동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조선후기는 영(英)․정조(正祖)년간에 문인사대부들이 성리학(性理學)을 비판하고 실학사상을 받아들이는 문예부흥기로 미술인들의 지위가 향상되면서 새로운 경향의 회화가 탄생하였다.
새로운 오파학풍(吳派畵風)과 사의적(寫意的)이고 서예성이 강조된 남종화론(南宗畵論)의 대두와 함께 한국적 화풍(畵風)이 풍미했던 시대로 류덕장(柳德章), 강세황(姜世晃), 신위(申緯) 등 많은 화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여 많은 작품이 제작되었다.
현재와 가장 가까운 근대라 할 수 있는 조선말기는 전(前)시대에 유행하던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이 더욱 보편화되고 추사 김정희의 영향으로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의 이념미가 중시된 한국적 문인화풍을 토착시킨 시기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문인화는 고려 및 중국에 바탕을 두고 발전했지만 시대적 상황과 작화자(作畵者)의 신분과 수요에 따라 회화의 역사가 꾸준히 변화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역사는 절대자의 섭리(攝理)아래 인간을 통해 주도되고 변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고도의 정신성과 창작을 요구하는 예술에 있어서는 더욱 속도가 빠르게 변화되고 있지만, 한 가지 변할 수 없는 사실은 미(美)의 추구정신(追求精神)이다. 이러한 추구정신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창작의욕(創作意慾)을 불러일으키게 하며 이러한 창작활동은 인간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사군자는 예로부터 문인사대부들의 심정(心情)을 표출하는 정신적 수단 또는 동양회화의 차원 높은 예술로써 역사를 결정짓는 중요한 문화요소로 공헌을 해왔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현대를 살아가면서 조금 더 지나면 이미 우리는 옛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문인화의 정체성(正體性)을 찾고자 노력하는 수많은 선진(先進)들의 노력으로 문인화의 소재(素材)는 더욱 더 다양해 졌으며, 또한 우리 삶의 주변에 널리 퍼져있다.
담묵(淡墨)으로 처리된 작품이 각 공모전(公募展)의 문인화부(文人畵部)에 나타났다고 해서 문인화의 범주(範疇)에 넣을 것인지는 작화자(作畵者)의 심중(心中)에 먼저 물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点이다.각 시대는 그 시대양식과 작가의 개성이 작품을 통해 표출됨을 잘 알 수 있다.
계속적인 창작의욕(創作意慾)과 사회․역사의식 속에서 수용(收用)과 배척(排斥)을 반복하면서 다른 예술분야와의 교류 및 접목 등을 통해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고 또한 계승되어 갈 수 있는 것이 예술의 역동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전통계승(傳統繼承)과 발전에 대한 책임(責任)과 과제(課題)가 우리의 몫으로 남게 된다.
參 考 文 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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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雜誌
"문인화정신의 표상" 「아트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