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 력
1961.∙국립 부산사범대학교 미술과 수석 졸업
1988.∙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교육학석사)
1968.∙부산고등학교 교사
1974.∙경기상업고등학교 교사
1979.∙영등포여자고등학교 교사
1984.∙서울특별시 교육청 장학사
2001.∙숭실대학교 인문대학 겸임교수(교육 방법)
2001.∙구일고등학교 교장
♠ 사회 활동
1975.·월간 ‘미술과 생활’ 주간역임
1976.∙서울특별시 교육청 지정 연구교사
1984.∙서울특별시 중등학교 교사임용 경쟁시험 출제위원
1985.∙한국청소년지도자협의회 회장
1986.∙문교부 교육과정심의회 미술과 심의위원위원
1992.∙서울특별시 중등학교 교사 임용시험 출제ㆍ면접위원
1993.∙교육부 미술과 교육과정 심의위원
1994.∙교육부 중학교 미술과 교과서 검정ㆍ심사위원
1995.∙현대미술대상전 서양화부문 심사위원
1995.∙한국 교육미술 연구회 부회장
2001.∙한국창의력교육학회 부회장
2003~2014.·서울중앙지방법원 조정위원
2003~2015.·퇴직예정공직자 사회적응연수 강사
♠ 연구 ㆍ 포상
1961.∙국립 부산사범대학교 미술과 최우수상
1966.·제1회 개인전(삼천포 제일화랑)
1968.∙대한민국 예술교육 문화상 미술 공로상
1968.∙제1회 동아국제미술전람회 서양화부문 입선
1969.∙제13회 전국 교육연구대회 문교부장관 표창
1971.∙계간 ‘예술계’ 미술평론 당선(미술 평론가)
1972.∙전국 ‘새마을 운동’ 현상 논문 당선(문교부장관상)
1972.∙서울신문 모집 ‘10월 유신’ 현상논문 당선(평론가)
1975.∙제24회 국전 서양화부문 입선 문공부 장관상
1978.∙한국 청소년 미술교육 논문 당선(서울미대학장상)
1980.∙서울특별시 학생종합학예발표 공로 교육감표창
1990.∙한국 현대미술 문화상 수상
2003.∙국민훈장 황조근정 훈장 수상
♠ 저 서
1988.《학생 미술백과》》- (공저:동아출판사)
1989.《실존주의 교육론》- (배영사)
1992.《미술교육 개론》- (미진사)
2000.《학생과 교육을 되살리는 길》- (한국창의력교육학회)
2002.《학부모는 아무나 하나요》- (공저:인간과 자연사)
2003.《민족의 진로와 교육》- (경지원)
동양 산수화의 현대적 조명
차 례
Ⅰ. 머리말
Ⅱ. 동양 회화의 특징과 미학적 가치
Ⅲ. 동양회화의 사고형태적 변용
Ⅳ. 동양화의 현대적 미학
Ⅴ. 맺는 말
Ⅰ. 머 리 말
오늘날 한국화단에서 동양화만큼 타개해야 할 과제가 많은 것도 없을 것이다. 그 만큼 우리의 동양화계는 새로운 시대가 요청하는 새로운 회화 양식과 내용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조선 숙종(肅宗) 때 화가들이 동기창(董其昌)의‘상남폄북론(尙南貶겗걩)’을 받아들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중심세력이 되어 온 남종화풍(南宗畵風)은 밖에서 들어온 미술사조에 밀리어 발전하지 못하고 침체되어 왔다.
그런데 동양미술의 주류를 이루어 온 산수화는 BC.2200년경에 중국 하(夏)나라에서 발생하였다. 이것은 서양의 풍경화보다 약 1,400년이나 앞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니까 동양인의 자연에 대한 미의식은 서구인들보다 14세기나 앞서 회화적 세계를 개척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산수화는‘오악(五嶽:중국의 신령한 산인 泰山, 華山, 衡山, 恒山, 嵩山)과 사독(四瀆)’의 자연 숭배사상에서 발생하였다. 그렇지만 산수화에 스며있는 초현실적이고 비합리적(非合理的:불합리가 아님)인 정신은 어디서 싹트게 되었는가? 그것은 인간은 원래 연약하므로 무위청정(無爲淸淨)한 생활을 하면 자연과 함께 오래 살수 있다는 도가(道家)의 사상과 유가(儒家)의 우주생성론인 태극도설(太極圖說)과‘천인합일(天人合一)’의 동양철학 사상에서 싹텄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동양 산수화의 정신과 전통을 오늘날까지 충분히 계승하지는 못하였지만, 그 조형언어(造形言語)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내장되어 있는 때매김(時制:tense)없는 언어로서 회화적 논리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 회화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회화 정신과 미적 양식이 그 속에 숨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날의 세계문화는 오직 글만 숭상하여 나약해져 버린 동양의 사회주의 사회가 서양의 정복문명에 무비판적으로 도취해 왔기에 그 고유한 전통문화를 망각하고 방황하여 온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동양화의‘근대적 양식’을 구명하고, ‘한국적 귀화(歸化)’를 위한 탐색을 꾀하는 일도 중요할 것이다. 여기서는 그러한 과정으로서 동양 산수화의 전통적 가치와 현대적 의미를 조명(照明)해 보고자 한다.
Ⅱ. 동양 회화의 특성과 미학적 가치
동양 미술의 특성은 회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중국의 회화 양식은 오랫동안 동양 회화의 주류가 되어왔으며, 그 중에서도 산수화는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회화의 주류를 이루어 온 것이다. 따라서 산수화는 동양 회화 사상의 주류로서 간주할 수 있고, 산수화가 동양화에서 차지하는 중요성과 미학적 가치는 매우 크다.
그러므로 동양화의 사상적 배경과 미의식의 정수는 산수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먼저 동양화의 특성을 몇 가지로 나누어 서양화와 비교해 보자.
첫째, 동양화, 특히 중국 회화의 정신적 배경은 유교의 정신적 도덕주의와 노장(老莊)의 도가사상(道家思想)인 이상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고의 대상도 유교의 현실적 인간 행위의 도덕과 수신(修身), 도가(道家)의 이상적 자연의 명상(瞑想)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래서 이론보다는 직관(直觀: 명상과 수신)을 중시하고 과학적인 분석보다는 중용적(中庸的)인 종합 정신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서양화는 유럽 정신, 즉 헬레니즘(Hellenism)의 물질적 개인주의와 기독교의 경신정신(敬神精神)을 핵심으로 논리적인 분석과 합리적인 인간정신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동양화와 서양화는 이미 서로 다른 인자(因子:factor)의 대립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동양화의 물질적 특성은 수묵을 주로 한 수채화구로써 화선지나 비단(silks) 위에 그리게 되므로 날카롭고 뾰족한 붓을 사용하게 된다. 이것은 오랜 농경생활을 하면서 물을 사용하여 요리할 수밖에 없는 식물성 음식을 주식으로 하였기 때문에 발생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비하여 서양화는 시대에 따라 그 재료가 변천해 왔으나 주로 유화구(油畵具)를 사용하여 캔버스 위에 그렸다. 따라서 편평한 붓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도 역시 서구인들의 오랜 유목생활로 말미암아 기름을 사용하여 요리할 수밖에 없는 동물성 음식을 주로한 기질에서 발생된 것으로 추측된다.
셋째, 표현방법을 살펴보자. 동양화는 자연의 혜택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연을 바라볼 때 존재된 형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경향성(傾向性)으로 보면서 직관적(直觀的)으로 종합해 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상(對象)을 이동시키든지 아니면 작가의 위치를 이동시켜 가며 그림을 그리게 된다. 앞산을 보고 나서 다시 그 위에 올라가서는 그 뒷산을 보며, 또 그 위에 올라서서 뒷산을 ‘보아 가는’것이다. 이러한 산수화의 삼원법(三遠法)은 화면을 자연히 실체경적(實體鏡的)인 가로와 세로로 길게 그려지게 된다. 그래서 화면의 가로축이나 세로축이, 그리고 두루마리(卷軸:scroll)로 길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표현에 이르러서는 직관적인 감성으로 단번에 결정을 내려 그려나간다. 그러므로 자연히 대상으로부터 특수한 것을 추상하여 경향태의 근본양식인 선을 통하여 운동태(運動態)로 환원시키는 연역적(演繹的) 방법으로 그리게 된다. 그러자니 붓은 날카롭고 뾰족해질 수밖에 없다.
서양화는 모든 사고의 근본을 인간 자체에 두며 인간을 한 개의 완성된 존재태(存在態)로 보고 논리적으로 분석해 나간다. 그러므로 작가와 대상이 한 점에서 정지하여 투시 원근법적으로 대상을‘보고 있는’것이다. 따라서 화면은 조감도식(鳥瞰圖式)이 되고, 화면은 항상 정사각형에 가까운 직사각형으로 되기 마련이다. 표현에 이르러서도 논리적인 감성을 발휘하며 화면에 물감의 층을 만들어 나가는 구축적(構築的)인 방법으로 그리게 된다. 즉 존재태의 근본양식인 색면의 입체를 추구하면서 귀납적(歸納的)으로 칠해 나간다. 그러자니 붓은 자연히 편평하게 되는 것이다.
넷째, 대상과 작가와의 관계는 어떠한가? 동양화의 경우는 이 두 개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몰입하고 융화되어지는 관계이다. 그래서 표현은 평면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띠며 사의적(寫意的)이고 침묵을 암시하는 정적(靜的) 표현을 주로 한다. 따라서 선과 여백(餘白)의 공간감을 살려서 암시적인 함축성을 내장함으로써 감상자로 하여금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호소하게 된다.
그러나 서양화의 경우에는 작가와 대상이 서로 대립적인 입장에 맞서서 사색하고 분석해 간다. 그 표현은 입체적이면서도 구체적이다. 따라서 공개적인 동적 표현으로서 색채감과 입체감을 살려가며 과학적인 설명으로 감상자의 논리성에 호소하게 되는 것이다.
동양화는 서양화에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 다양한 대상이나 화려한 색채는 없다. 언뜻 보아서는 먹색을 주로 다루는 단순하고 상징적인 예술인 것이다. 그러나 종이와 붓의 기법과 함묵(含墨)의 정도와 농담이나 윤갈(潤渴)의 무궁한 변화에서 이루어지는 먹색미야말로 색채와 다른 차원에서 버금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먹에는‘오채(五彩)’가 있다고 하였다. 뿐만아니라, 점과 선의 길고 짧음, 굵고 가늘음, 곧거나 굽음, 강하거나 연함, 맑거나 메마름 등의 선질(線質)은‘일필삼채(一筆三彩)’라고 하는 명암과 요철과 원근을 이루어 낸다. 그러면서 여백에서 오는 미적 질서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실로 동양화야말로 선과 여백의 예술인 것이다. 이처럼 동양화에 있어서 여러 요소들이 다양의 통일을 가져와 혼연일체가 될 때 비로소‘기운(氣韻)’이 생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동양화의 이러한 화품은 단순히 표현 기법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숭고한 정신과 고상한 인격에서도 나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림의 품격에는 높은 인품을 제일로 들고 있으며 표현 방법을 다음으로 쳤던 것이다. 당나라의 손과정(孫過庭)도‘감흥과 심사로 말미암아 필의(筆意)와 서체가 달라지고, 수양과 연정(곟情)으로 말미암아 글씨의 품격과 높고 낮음이 생긴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화품의 경우와도 같은 것이다.
동양화의 미학적 가치는 이상과 같은 특성 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체로 동양화의 미적가치는 운동적 경향태의 근본 의식인 선과 암시적 함축성을 내포하고 있는 여백의 두 가지 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동양화의 선은 대상을 추상하여 운동태로 환원시키는 이른바 연역적인 방법으로 그려진다. 그러므로 선의 인식과정은 항상 시각적인 주의력으로서의 에너지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선의 세계를 대할 때는 그것이 연상작용(곛想作用)을 환기시키고, 또 여러 가지 운동을 암시해 주고 있음을 직감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양화는 다분히 인간적 체질감을 표현할 수 있어 작가의 에너지가 화면 전체에 약동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동양화와 서양화의 특징을 선과 색채의 기능적인 표현성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선위주의 회화는 상징적 경향을 띠고 있으며, 색채 위주의 회화는 다분히 사실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물론 서양화에도 모노크롬(monochrome:단색화)으로서의 데생이 있으며, 동양화에서도 채색을 위주로 하는 불화(佛畵)나 선과 색을 같이 쓰는 당화(唐畵)가 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서양화는 색채를 위주로 하였으며, 동양화는 선을 위주로 하여 시작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선과 색채는 각자의 표현 기능에 있어서 직접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동시에 물상을 암시하고 표상하는 이중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즉 선과 색채는 그 직접적인 표현성만으로도 독립적인 표현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선과 색채가 동시에 표현될 경우에 있어서도 자극적인 선은 자극적인 색채와 조화되어야 하고, 평정(平靜)한 선은 평정한 색채와 일치해야만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 선과 색채의 매개에서 이루어지는 감정의 톤은 그 표상의 감정과 조화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이들의 관계성이다. 그러므로 선과 색채는 그 이중의 기능이 조화를 이루는 동시에 회화의 기본원리인 통일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동양화의‘몰골담채법(沒骨淡彩法)’은 부드러우면서도 자유로운 필치와 낭만적인 습필(濕筆)로서 담채나 먹을 사용한 사의적(寫意的)인 표현법이다. 그러기에 자연히 습윤화아(濕潤和雅)한 남화적 감정과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쌍구농채법(雙鉤濃彩法)’은 굳세면서도 가느다란 갈필(渴筆)의 선과 짙은 색채나 먹을 사용한 사실적(事實的)인 표현법이다. 이것도 역시 깔깔하고 곧은 북화적인 감정을 고조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선과 색채의 관계성에서 미루어 볼 때 선의 미학적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선은 그 자체로서 독립할 수 있는 동시에 조화와 균형과 전개의 3양식에 따라 종합되는 것이다. 선이 반복되는 음율(音괹)은 화면을 구성하는 형식으로 흥미있는 것이다. 음률이 음악에 있어서는 청각을 통해서 느껴지면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지만, 조형예술의 세계에서는 시각에 호소하면서 사라지지 않고 눈앞에 남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실체경적(實體鏡的)인 산수화는 주로 삼원법(三遠法)에 의하여 표현되고 있는데, 거기에 표현된 복잡한 산의 능선이 이루어내는 선의 음율을 흔히 구름과 안개(여백) 속으로 사라지게 만든다. 특히 감필체(減筆體)를 이상으로 하는 문인화(남화)와 사군자가 추구하는 선의 묘미는 시(詩)·서(書)·화(畵)·전각(篆刻)이 이루는 사위일체(四位一體)적 예술미를 맛볼 수가 있다.
전통적인 동양화에서는 구체적인 조형성을 따지거나 색채의 조화에 신경을 쓰기 보다는 사군자나 화조화에서 보는 바와 같은‘생명의 리듬’을 더 예술의 특성으로 중요시한다. 그래서 묘사된 사물속에 생명의 연상이 들어 있을 것을 요구한다. 이를테면 선의 조형적 형식만을 내놓지 않고 연상적으로 덧붙여진 의미(over tone)를 원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동양화의 이상은 기운생동(氣韻生動)이며, 군자의 정신적 생명력인 기개(氣槪)까지도 그림속에 표현하려고 하였다. 그러기에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등의 사군자(四君子)의 먹선에서 그 감흥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둘째, 동양화의 여백(餘白)은 산수화에서 극치를 이루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여백은 감상자의 자유로운 상상력에 호소함으로써 화면에 암시적 공간감을 살려주는 동양 특유의 요소이다. 그것은 서양화에서 보는 회화적 공간과는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회화속의 공간은 물론 캔버스나 실내의 사실상의 공간은 아니다. 다만 2차원적인 표현을 통해서 3차원적 공간을 암시하는 착시(錯視)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동양화의 여백은 이러한 착시된 공간감에서만 그치지 않고, 우주 곧 자연이라는‘도(道)’와 연결되는 4차원적 세계를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여백의 조형사상이야말로 초현실적인 동시에 초감각적인 존재로서 막연하면서도 깊숙한 저‘무’와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무(無)’는 무형적인 무를 의미하는 것이지 결코 허무(虛無)나 순무(純無)는 아닌 것이다. 그 무 속에는 보이지 않는 형태가 존재해 있고 실체가 있는 것으로서 언제나 진실하고 진리 속에 묻혀있다고 한다. 이 사상은 동양화의 철학적 배경이 된 노장(老壯)의 도가(道家)사상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만물은 유에서 생겨났고, 유는 무에서 나오며, 그 무는 곧 천지가 생기기 전의 상태를 말한다. 장자(莊子)는 이 무로부터 유로 옮겨가는 것은 우주의 신비속에 감추어 져 있는, 생명과 물질, 실체의 원천이라는‘도(道)’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따라서 여백이라는 존재는 감각적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미묘하고 황홀한 것이로되 이성으로는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물심양면의 만반현상(萬般現象)의 본체가 그 속에 숨어있는 보편적인 존재인 도와 통해 있다는 것이다.
그림 속에 표현된 여백은 무한대로 확산되어 그림 밖 자연의 공간속으로 몰입해 들어가고 만다. 그러니까 그림의 액자(frame) 자체는 실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일부분이지만 여백은 그 액자의 틀을 초월한 채, 실제의 자연 공간과 무리없이 연결되어 그 분위기 속으로 섞여 들어가 고 만다. 이것이 이른바 신비롭고 상징적인 여백의 특성이라 하겠다. 그러기에 동양화의 액자나 족자는 유달리 매트(mat)가 강조되거나 비단 등으로 조화를 맞추어 자연 공간과의 중개역할을 해주고 있다.
회화상의 공간은 물체의 형체를 이루는 성질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 그래서 공간의 깊이나 넓이, 원근과 흩어져 있는 위치 등을 강조하면 할수록 도리어 형체를 만드는 성질은 사라지고 마는 성향을 지녔다. 그렇기 때문에 무(공백)의 여백은 그 밖에 그려진 형체를 오히려 강조하고 있는 것이 된다. 즉 이보 전진을 위하여 일보 후퇴하는 적극적인 표현방법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사정은 장자가 나무에다 빗댄‘무용지용론(無用之用걩)’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즉 도의 입장에서 본다면‘평범하고 속된 것들의 쓰임새는 어리석은 것이고, 쓸모 없는 것 중에서 오히려 크게 쓰이는 것이 있다’라고 말하는 장자 특유의 알레고리(allegorie: 비유)이다. 이처럼 여백은 표상(表象)에 있어서는 쓰임새 없는 공간같이 보이지만 전체를 통해 볼 때 크게 쓰이는 도와 연결된다고 비유할 수 있다.
회화의 감상 태도에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광선이나 공간 따위는 잠깐 등한시하고 먼저 화면의 물체를 개별적으로 보고 나서 전체를 보아 나오는 외향적(外向的)인 태도이다. 또 하나 는 역으로 광선과 공기로 구성되어 있는 전체 화면을 종합적으로 보고나서 개개의 물체를 보아 들어가는 향내적 태도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물체의 존재적 입장에서 보는 서양화적 감상이요, 후자는 우주(도)적 입장에서 보는 동양화적 감상 태도라 하겠다.
전체를 종합적으로 파악해 나가는 이 동양화의 경우에는 지나친 명확성이나 세부적인 묘사는 화면을 분산시키고 통일감을 저해시키며 미감을 감소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는 몰골담채(沒骨淡彩)의 남화와 서양의 인상파 회화에서도 적용되는 원리이다. 산수화에 있어서 화면의 통일은 선과 색채 등 회화의 요소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통일성이 아니다. 의미의 세계, 내용의 세계를 바탕으로 지극히 극적이며 상징과 암시의 세계인 것이다. 그 주요한 요소가 바로 선과 여백이 자아내는 조화의 세계이다. 그렇다고 해서 색채와 선에 의한 통일이나 그 표현적 우수성은 비록 제2의적(第二意的)인 것이라 할지라도 결코 무시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오늘날 동양화의 상황적 과제는 이러한 선과 여백의 미학적 의미와 전통미적 가치를 오늘에 구현시키는 것이라 하겠다. 그 과정에서 논해야 할 것은 선과 여백의 조형언어의 생성 과정과 그 정신적 바탕이 되는 사고 형태가 바뀐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Ⅲ. 동양 회화의 사고형태적 변용
고대 서양문화를 형성시키는 데 강한 힘이 되었던 스토아(stoa) 학파의 인간관을 살펴보면 자아 즉 자신속의 데몬(demon: 神靈)과 조화있게 삶으로서 우주와 조화있게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소우주이고 그 본질인 로고스(logos:굊性)는 우주의 본질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에 따르는 생활 곧 우주(자연)에 따르는 마음이 안정되고 흔들리지 않는‘아파테이아(apatheia:격정으로부터 벗어날 때 이상세계에 도달할 수 있음)’라는 현자적(賢者的) 생활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양의 도가들은 천지는 나와 같이 살고 만물은 나와 일체라고 하는‘만물일체론(萬物一體걩)’과 자연은 우주의 제1원리로서 완벽하고 조화있게 움직인다는‘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을 가졌던 것이다. 그들은‘사람은 땅에 따르고 땅은 하늘에 따르며, 하늘은 도에 따르고 도는 자연의 길에 따른다’는 신비로운 자연주의 사상에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우주의 일부로서 관련맺고 있으며 서로 몰입하고 있다는 이른바 장자의‘천인합일’의 중용사상(中庸思想)과도 상통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융화를 꾀하여 왔던 것이다.
이러한 고대 동서의 두 사상은 사고형태가 발전적으로 바뀐 모습에서 가장 소박하고 원시적인 보편성을 띤 애니미즘(animism:生氣說)을 공통적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서양의 스토아 학파들은 인간의 입장에서 우주(자연)를 내다본 것이요, 동양의 도가들은 우주(도)적 입장에서 인간인 자신을 관조해 본다는 것이 서로 다르다.
그런 까닭에 서양의 풍경화는 풍경 자체보다도‘모나리자’에서 보는 것처럼 인물의 배경으로 흔히 취급되거나 건물의 배경으로 그려져 자연을 인간의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동양의 산수화에서는 자연을 인간의 기초로 보고 화가 자신까지도 그 산수화속에 점재(點在)시켜서 자연속에 침잠해 있는 것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그들은‘사람이 죽으면 혼백(魂魄)이 분리되어 혼(魂)은 하늘로 날아가고, 백(魄)은 뼈와 함께 땅에 묻힌다’고 생각했으며, 그림도 자연히 조감도적인 연산법(곞山法)으로 그렸던 것이다.
동양의 산수화가 17C 서양의 홉베마나 터너에 의하여 시작된 풍경화보다 1400년이나 앞서서 발생하게 된 원인도 이러한 근원적인 사상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고대 사상들은 미적 감각의 근원적인 형태를‘생명’의 감각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자연적 개체속에는 애니마(생명: anima)가 존재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애니미즘의 사고형태야말로 주체와 객체와의 오성적(悟性的) 분열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동양의 고대 산수화는 이 애니미즘 시대에 발생하였다. 그리고 동양화 이론인 육법화론(괯法畵걩) 중 기운생동(氣韻生動)은 이 애니미즘을 방불케 하는 대상(對象)의 생명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그림을 그리거나 감상할 때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또 대상생명의 정립이나 구조 파악에 있어서 애니마와 관련되는 발전적 과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산수화의 시조였던 고개지(顧愷之)는 대상을 묘사하는 난이(難굂)의 단계로서 인물, 산수, 개와 말, 누각이나 정자 등의 순으로 두었다. 이것은 대상에 존재해 있는 애니마의 많고 적은 단계를 뜻하는 것이다. 결국 대상의 생명력을 묘사해 내는 것이 회화의 근본적인 안목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현상 자체에 소박한 생명이 객관적으로 실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연의 외적현상은 내적 생명의 생동하는 형상에 지나지 않다고 인식하게 됨으로써 그 생명의 표현에는 소박한 사실주의가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는 것이다. 오악사독(五岳四瀆)의 자연숭배 사상에서 발생된 산수화의 기원도 이렇게 자연을 신령적(神靈的)으로 신비롭게 본데 있었던 것이다.
서양의 고전적인 형이상학(形而上學)이나 중세의 종교철학은 그 방법과 목표는 달랐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우주의 목적이며 또 세계와 인간을 지배하는 전체적인 어떤 섭리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은 공통된다.
그런데 인간이 이 우주의 중심이요 만물은 인간의 편익을 위해서 생겼으며 존재한다는 주장은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적 우주관 앞에서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이다. 여기서부터 인간의 오성적(悟性的)인 발전은 차츰 애니미즘을 허물어뜨리게 된다. 지금까지는 생명체로 보였던 산천수석(山川樹石)은 한갓 무생물로 인식되어감으로써 점점 생명이 없는 사물이 되고 마
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은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자연미는 오성적인 인식의 형상세계로 변해 왔던 것이다.
여기서 데까르뜨의 근대정신이 싹트게 된다. 즉 데까르뜨에 의한 근대적 합리주의는 지금까지의 종교적 권위나 피안적(彼岸的) 정신을 부정하는 현세적 인간주의였던 것이다. 자연의 인식에 있어서도 우주가 목적(가치)에 의하여 지배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모든 것은 무목적한 인과법칙에 따른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의 힘을 자기 목적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근대적 사상에서 사물(死物)이 되어버린 자연은 그대로 사물로서 버려질 것인가?
아니면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한갓 인간의 목적의 수단으로 밖에 쓰여질 수 없는 것일까?
금세기 최초의 10년간에 있어서 미술은 4차원 공간을 모색한 미래파와 입체파 등은 3차원의 형상에 시간성을 도입하였다. 계속해서 초현실주의는 현실의 이면에 쌓인 우울한 심리적 진실을 드러냈다. 그러한 유파의 예술가들은 언제나 창조적이고 공상적, 직관(直觀)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예술과 전후하여 발전한 과학의 세계는 드디어 4차원의 현실화에 구체적인 실적을 쌓아올렸던 것이다.
그 결과 최근 20년간에 있어서 인간 소외(疎外: alienation)의 과제는 가장 큰 것으로 대두되고 있다. 학자들은“소외의 원인이 기계문명의 파행적 발전에 있으며, 기계는 우리들에게 쓸데 없는 일에서 해방시켜 주었으나 동시에 그것은 인간 문화를 퇴폐로 이끌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예술창조의 이름 밑에서 모든 기성의 질서를 성급하게 파괴하는 표현이 횡행하고 파괴한 후의 책임은 아무것도 지지 않는 경향이 나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계가 인간을 소외로 이끈 것과 같이 예술이 제2의 퇴폐를 낳는 원흉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계문명이 만들어 놓은 인간소외 현상에 대하여 예술문화를 전면으로 밀고 나가는 휴머니즘과의 상호관계에 어떠한 다리를 놓는 문제가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사물이 되어버린 자연을 예술가의 손에 의하여 또 다시 소생의 길을 열어주는 일이다. 이렇듯 자연은 인간의 오성적인 인식으로 말미암아 그 생명이 엔트제렌(entseelen: 생명을 빼앗음)되었다가 또 다시 예술가의 감정으로 말미암아 베제란(beseelen: 생명을 줌)되는 사고 형태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의 사상이 나타내는 예술적 감성이라는 것은 결국 보는 사람의 주관적인 감정이 객관화됨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오성적인 인식으로서는 생명이 없는‘물결’이 주관적인 감정의 객관화에 의하여 바위를 부수는 힘을 가진 생명체처럼 느껴지고, 격노(激怒)의 감정으로 베제란되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형태의 발전적 변화에 따라서 자연미의 운명도 변용되어 가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애니마의 엔트제렌과 베제렌의 관계를 실증적으로 흥미있게 보여주는 예는 고대와 중세의 풍경화에서 찾을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의 분묘나 그리스와 폼페이의 벽화에서 부분적으로 볼 수 있는 고대의 풍경화는 애니마의 기복적인 과정이 존재한다고 보는 이가 많다.
그런데 중세 기독교 시대에 들어가면서 자연에 대한 생명감은 사라지고 풍경화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마는 것이다. 그 원인은 중세에 있어서는 오성적 인식만이 문제의 중심이 된 나머지 감성적인 인식 따위는 문제 밖으로 돌려졌기 때문이다. 설사 거기에 풍경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감성을 초월한 것이며 하나의 파라다이스의 모습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는 아직도 인물화의 부수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다시 풍경적 요소가 등장하였으니‘모나리자’의 배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사물이 되어버린 자연은 오로지 화가의 감정만이 그것을 베제렌 시킬 수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자연의 새로운 생명을 되찾게되고 근대적 의미의 새로운 산수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서양미술의 바르비종이나 인상파에의 길이 열린 것도 이점에서 의의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특히 유의해야 할 것은 자연이 그 바탕의 생명을 상실하고 또 다시 예술가의 감정에 의하여 새로운 생명이 베제렌되어 가는 것이 근대적 의미에 있어서 산수화가 성립하는 조건이라고 본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전술한 바와 같이 소박한 자연의 생명이 그 자체 속에서 객관적으로 실재한다는 생각에서 제작되는 모사주의적 산수화는 진실한 의미에서 근대적 산수화라고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근대적 의식은 서양화에서는 19C 파리 근교 퐁텐블로 숲속에서 풍경을 그리던 바르비종(Barbizon)파나 인상파에 와서야 나타났었다. 그렇지만 동양화에서는 이미 7∼13C 당나라나 송나라시대에 베제란된 사고형태가 나타났던 것을 볼 수 있다. 즉 화가의‘주관적 인내성’과 그 표현이 중요한 과제가 된 것이다. 이를테면 기운(氣韻)을 존중한 남화의 산수화는 바로 이러한 의식에서 발흥한 예술적 형식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사군자’나 세한삼우도(歲寒三友圖)에 그려진 매화와 난초, 국화와 대나무, 소나무들은 모두 그 식물적인 모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풍설우상(風雪雨霜)의 염세 밑에서도 변하지 않는 군자의 고결한 절개로 배제 된 되는 것이다.
여기서‘현대에 와서 동양화의 시대적 양식을 어떻게 모색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대두하게 된다. 현대미술은 그 표상의 특징과 성격이 현대의 정신적 상황을 반영해 준다. 현대 회화의 성격을 특징 짓는‘구성’의 역할이 대단히 크다. 여기에는 불교나 그리스 사상 및 근대‘신은 곧 자연’이라는 스피노자(Spinoza)의 사상에서도 엿보이는 범신론과 세잔느의‘모든 자연은 공과 원뿔과 원기둥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분자론(分子걩)이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이다.
피카소는 이러한 세잔느의 지론을 실현하였고 초기의 입체파는 색채보다는 선에 더 치중하여 기하학적인 구성을 해갔다. 이 입체파적 경향에 색채를 가미한 오르피즘(orphism)이나‘변증법적(辨證法的) 조형의 기본관’을 갖고 대위법(對位法)에 의하여 기하학적 구성을 시도한 현대추상회화의 창시자 바세렐리의‘OP Art’는 현대미술의 한 조류가 되었다. 이 조류는 시간과 공간을 융합하여 프로이드적 무의식의 세계를 추구하는 비합리성을 강조하게 된 초현실주의와 함께 현대미술의 2대 조류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미술의 조류는 중세미술이나 원시미술, 혹은 동양미술의 재인식을 요구하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대미술의 표상속에는 동양미술의 시원에서 추구하였던 표상적 특징이 다분히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금세기 전반기의 세계전쟁은 인간의 정신을 뒤흔들어 놓았다. 마침내 현대의 작가들은 왜곡과 변형과 불안속에서 자기 실존의 참모습을 찾아 헤매게 되었다. 그리하여 분석과 왜곡, 변형으로 대표되는 현대의 조형 언어 속에 현대의 진실을 담으려고 애썼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동양화의 가치는 어떻게 조명(照明)할 수 있는가?
첫째, 동양화의 생략과 과장법은 그것이 극단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결국 서구의 현대 회화처럼 완전한 추상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비례를 상실하지 않는 중용(中庸)의 정신으로 구상적 요소와 추상적 요소가 융합된 세계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양화에 있어서 대상의 관조(觀照)는 흔히 현실로부터의 도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않다. 경우에 따라서는 풍자나 아이러니로 모습을 바꾸어 현실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려는 관조인 것이다. 그러므로 화면에는 대립이 없는 조화의 세계, 이른바 엑스타시(exctasy)의 세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정소남(鄭所南)이 노근란(露根갿)을 처음으로 화폭에 그렸더니 사람들이 그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가 답하기를‘내 난초의 뿌리를 감추어 숨길 땅이 없노라’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 말은 원나라 시대의 외로웠던 자신을 풍자한 것이다. 여기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노출된 난초의 뿌리를 통해서 작가의 풍자적 기지(氣智)를 발휘한 것은 동양화의 정신적 일면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양 예술의 본질이라고 할 도(道)는 완전한 진테에제(synthese:綜合)의 세계이다. 서양철학의 테에제(these:命題)와 안티테에제에 비교할 수 있는 동양철학의 음과 양의 상호작용은 결코 2개의 상반되는 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서양의 대립에 대하여 서로 협조하고 융화하려는 보완적인 의미를 지닌, 도에 이르는 것이다.
또 동양 예술의 근간이 되어온 도가의 유(有)와 무(無)의 구분은 서양예술의 근간이 되어온 그리스 철학의 존재와 부존재의 구별과 비교된다. 그러나 유와 무는 서로 대립된 개념이 아니라‘도’라고 하는 같은 근원을 가진 창조의 2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동양철학은 이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윤리적인 것이면서 형이상학적인 것의 혼합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비롭고 초현실적(타계적)인 겉모습을 가진 도교(道敎)는 항상 유교의 현실적인 휴머니즘과 대립되어 왔다. 수 세기에 걸친 두 사상의 대립은 극단간의 상호작용을 도모하여 서로 보완한다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이 동양 회화를 이해하는 데 꼭 기억해야 할‘종합’의 정신이요, 중용의 정신인 것이다.
동양 산수화의 삼원법(三遠法:원근법)은 자연의 대상 형식을 의도적으로 해체하여 다시 타계적(他界的)인 안목으로 관조해서 재구성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인 생명감을 나타내려는 의도로서 어느 면에서는 대상을 해체하여 재구성함으로써 종합적‘동시성’을 표현하는 입체파의 이론과도 통하는 데가 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입체파의 오성적(悟性的)인 방법이 아니라 감성적인 방법으로 어디까지나 대상 자체를 다치지 않고 존중한다는 것이 동양 독특한 양식이다.
이러한 동양 산수화의 표현법은 신선사상(神仙思想)을 비롯한 동양 철학적인 사상에서 싹튼 결과인데, 이른바 이것은 불교적 선미(禪味:priestcult)를 낳기도 하였던 것이다.
둘째, 동양의 반주지적(反主知的)이요, 비합리적인 신비주의와 서양의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인 초현실주의는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서양화는 프로이드의 ‘무의식’에 의한 인간의 내심의 조용한 소리를 듣자는 것인데 비하여, 동양화는‘도’에 의하여 우주의 제일 원리인 자연의 모든 현상에 따르자는 것이 다르다.
그래서‘우리는 우리가 아는 만큼 행동할 수 있다'는 베이컨의 주지주의적 말은 전적으로 옳다고는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그 이상도 행동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서적 행동이라는 비합리성 때문이기도 하다. 본능적이며 육체적인 표출을 수반하는 희노애락의 감정으로서의 정서는 새로운 사건에 대한 지식이 결여된 인간 반응이다. 하지만 이 불충분하고 불만족스러운 감정이 바로 창조로 이르게 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주지적 합리주의만으로 동양화를 해석할 수는 없다.
시모노브에 의하면‘예술이 비합리적인 가설(假說)을 세우고 과학이 그것을 구체화하듯이, 비합리적인 정서가 고차적인 정신활동의 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자연현상을 예술로 승화시킬 때는 곧 정관(靜觀)하는 태도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정관은 상상을 동반하게 되고 그 상상의 부조(扶助: 미적직관)에 의해서만 자연이나 사물은 비로소 미적 표현이 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작가에 의하여 과장된 자연은 현실보다 심각한 인상을 느끼게 한다. 이렇듯 예술은 탈현실함으로써 구성되고, 초현실적인 존재로 상상화할 때, 자연미의 가치를 얻게 된다고 볼 수 있다.
19C말 서양의 인상파를 비롯해서 이론 색채학의 발달은 외광 속에 번득이는 대상의 찰나적인 인상을 포착함으로써 사실주의의 직사적(直寫的) 묘사법을 버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대상의 형태나 의미나 표출은 개의치 않고 관능적인 묘사를 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주관적인 고호와 형상적인 세잔느, 그리고 장식적인 고강의 예술이 현대 회화의 전기(前期)를 빛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비하여 남화의 산수화는 이들과는 이미 10여 세기나 앞서서 그러한 의식형태가 발흥하였던 것이다. 그 의식형태라는 것은 외형이 아니라 그 속에 생명과 의지가 응축된 형태이다. 그러므로 그 형태의 표현은 자연히 추상적인 선으로 집약되거나 파묵(破墨) 등으로 스며들기 마련이다. 동양화의 정신은 사의(寫意)에 있으며 이는 곧 자연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외형의 음영이나 원근만을 묘사하는 일은 어리석은 것임을 19C인상파나 입체파 화가들이 깨닫기 이전에 동양 산수화가들은 이미 작품으로 나타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왜곡과 변형, 굵은 선과 색이 강렬하게 충돌하는 서양의 야수주의(野獸主義)는 이지에 의해서 관념된 바를 구상화하는‘이지적(굊智的) 직접성(直接性)’에 중심을 두었다. 이것은 동양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다양한 필선이 목적이고 형상이 부수적인‘도석인물상(道釋人物像)’이나 다분히 추상적인 동기창(董其昌)의 표현기법, 먹색과 필선의 묘미를 노린 추사의 세한도(歲寒圖)에서 여실히 나타나 있다. 특히 추사(秋史)의 글씨와 산수화의 세계를 넘나드는 서체와 화법의 융합은 사경산수(寫景山水)로서 추상화를 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파격적인 추사의 수법은 당시 대중적인 산수화가들이 계승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서양 입체파 회화의 특징인 추상적 동시성 표현은 이미 산수화의 조감도적 삼원법이나 그 산수속에 점재(點在)해 있는 화가 자신의 인물에서도 그 상통하는 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러한 동시성의 표현은 현상이 시공간적으로 상인상존(相因相存)하는 존재라고 하는 장자의 만물일체론과 공자의‘천인합일사상(天人合一思想)’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심묵정사(深默靜思)를 주로하여 사물을 분석적으로 보는 것 보다는 종합적으로 보아서 원만을 기하려는 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상적 관념(觀念)인 것과 현실적(실재)인 것의 융화, 인간을 우주의 일부로서 보고 서로 완전히 몰입한다는 것이며, 딜타이(Dilthey)의 외적으로 표현된 것에서 내적인 것을 이해하려는 해석학(解釋學)과도 상통하게 됨을 알 수가 있다.
이처럼 동양화, 특히 산수화가 지니고 있는 새로운 가치가 현대의 시대적 상황과 사상에 어떻게 통하고 있는지를 비교해 봄으로써 동양화의 현대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Ⅳ. 동양화의 현대적 미학
동양화가 지닌 전통적인 조형 요소로서의 먹선의 농담과 여백을 통한 반주지적 비합리의 길이 현대미술 내지는 현대 조형의식과 어떻게 상통하고 있는지 그 가치를 구명해 보기로 하자.
수묵화는 그 먹색의 감각 상징이 그 자체 속에서 우리들의 주의력을 할애하지는 않는다. 오직 선과 농담과 여백의 경영위치(經營位置)와 기운생동(氣韻生動)을 강화하는 데 있어서 효과적인 은폐와 변형을 영위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선은 흔히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색채의 존속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선은 색채와는 관계없이 독자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다. 선의 생명은 동세적 운동성을 지니고 기질과 성질을 나타내며 감수되는 완전한 모습으로서의 특질을 가진 이중 복합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이든 상징이든 간에 색채와 선의 이중적 기능과 그 기능의 통일과 조화는 전적으로 무시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현대 동양화의 하나의 과제가 색채의 탐구에 있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발레리에도 현대회화의 서광이‘색채의 환희’에 있다고 말했듯이 오늘날 동양화의 쌍구농채법(雙鉤濃彩法)과 수묵담채법(水墨淡彩法)은 현대적 각광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작가가 하나의 광경에 대하여 비교할 수 없이 독특한 반작용을 시도할 때에는 언제 든지 사실적인 사물의 어느 한 부분적인 성질을 데포르마숑하는 데 필요한 선과 색을 과감하게 사용하게 된다.
예술 작품에서 현실 이탈성과 변형은 독특한 미적 효과를 마련하는 표현법이다. 서양에서는 세잔느가 시작하여 큐비즘과 표현주의에서 사용하였다. 만약에 우리가 욕망한다면 가령 물상의 실제적인 색채를 완전히 무시하고 표상의 목적을 위해서는 선에만 모든 것을 의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색채는 오로지‘표현적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동양 산수화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오래전부터 시도해 왔는데 특히 수묵 담채화와 동양의 판화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중국 회화의 전통을 지켜 북종의 원체화(院體畵)풍을 이룬 쌍구농채법(雙鉤濃彩法)의 구륵진채법(鉤겇眞彩法)이나 남종의 감필체(減筆體) 예술에 연결되는 짙은 묵선의 백묘화법(白描?法) 등의 선묘법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경향은 곧 동양의 산수화가들이 자연의 도를 추구하고 자신의 미적 이상을 창조해내기 위해서 자연을 수정하고 변형하는 이른바 표현주의적 태도를 취해온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작가적 태도를 레이놀드는‘화가는 자연의 불완전한 상태를 자신의 완전한 상태로 수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원형보다 더 완전한 형태의 추상적인 관념을 그려내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서양의 추상주의는 미래파 및 표현주의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런데 그 표현주의는 형식보다 주관을 강조함으로서 대상을 가장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추상적인 것으로 이끌어낸다. 물론 그 목적은 내부 생명의 표현에 있으며 색이나 형은 결국 영적인 약동 그 자체의 표현이라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는 도가의 신비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경향이 짙게 나타나 있다. 표현주의 회화에 있어서는 대상 형식을 파괴하거나 극단적인 치우침과 개인적인 독단성이 지배하는 수가 많다.
이러한 경향을 동양화에서 찾아본다면 방종자일(放縱自逸)하고 자유분방한 의지력과 해방된 감각으로 독창적인 개성을 표현한 양주팔괴(楊洲八怪)들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명대의 서위(徐渭)나 청나라 초기의 팔대산인(八大山人), 석도(石濤) 등의 차원 높은 화격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회화 일반의 조형 이념인 기운생동이란 단순한 형사적(形似的) 표현이 아니다. 형상을 통하여 그 형상의 배경에 숨어있는 신령의 존재적인 표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쉴러가 말했듯이‘회화는 생명과 형태와의 가장 완전한 합일’이라는 한 개의 생명체로 취급된 것이 다. 이러한 의미에서 산수화는 실로 신령의 예술이요 생명의 예술이라고 하겠다.
‘사군자(四君子)’는 매화·난초·국화·대나무의 사실적인 표현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군자의 기개를 표현하기 위한 조형언어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동양의 사대부들은 색채를 무시하고 선의 필세와 필맥(筆脈) 및 비백(飛白)으로서 현실의 오욕(五慾: 색과 형)에 현혹되지 않는 군자의 고상한 절개를 표현하였던 것이다. 까닭에 색은 무시되고 형은 변형된 채 표현되게 마련이다.
소동파(蘇東坡)가 붉은 먹으로 대를 그렸을 때, 사람들이‘세상에 붉은 대도 있더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에‘그러면 세상에 검은 대는 어디 있더냐?’고 반박하였다고 한다. 또 청좌당서론(靑左堂書걩)에‘희기(喜氣)로 사란(寫갿)하고, 노기(怒氣)로 사죽(寫竹)하라’고 심리적 지시까지 한 것은 소동파의 기지와 함께 고대 동양예술의 정신을 갈파한 일화이다. 이것은 형과 색을 떠난 사의(寫意)와 시적(詩的) 상징을 뜻하는 현대 예술, 특히 표현주의 이후의 추상파나 초현실주의의‘주관적 내면성’과‘표현의 주관화’에 일치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사군자가 서예처럼 하나의 법첩(法帖)에 따라 기법을 얻어서 종국에 가서는 자기의 인품과 감정을 표현하게 된다. 법첩상의 매화와 난초와 국화와 대나무는 식물의 형상을 통해서 ‘군자도’를 시각화(視覺化)한 것이다. 사군자는 회화적 형식을 규정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법첩을 통해서 그 도를 터득하려는 모사 과정도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또 육조시대에 시작되어 당나라시대 오도자(吳道子)와 왕유(王維)에 의해 본격적인 양식이 갖추어진 산수화는 실제 경치를 사생하는 실경산수(實景山水: 진경산수)와 사경산수(寫景山水: 관념산수)로 대별할 수 있다. 그런데 전통적인 산수화란 경치만을 뜻함이 아니라 이상향이나 이상적인 세계를 그렸으며 실경은 취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산수화가는 먼저 산수의 이상적인 표현 방법을 습득한 후에 다시 실경을 보고 습득하는 법칙을 준수하였었다. 이것은 서예의 법첩이나 체본(體本)이 필요함과도 같고, 시조(時調)의 작법에서 운(韻)의 격식에 맞추려는 것과도 같다. 그것은 양식상의 규준이 아니라 이상적인 산수의 정신적인 도를 체득하는 규준이며 임모(굢模)와는 엄연히 구별되는 것이다.
동양화에서는 먹색 하나로도 오채(五彩)를 낼 수 있으며 붓 한번 그음에도 삼채(三彩)를 표현할 수 있다. 이렇듯이 동양화의 본질적인 요소로 중시되는 먹의 농담은 물체의 명암과 원근과 질량 등의 표현과 작가의 감정을 나타낼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다. 먹 예술의 기본 요소로서 단순성과 상징성, 그리고 자연성을 들 수가 있다. 즉 호담하고 풍만한 먹색의 획에서부터 변화 많은 억양(tone)과 정밀하고 자세한 모선(毛線)에 이르기까지 붓의 성질과 두텁거나 얇은 종이의 질에 따른 흡수력 및 먹의 질과 기법 등에 따른 무궁한 변화는 동양화의 독특한 장점으로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동양화의 중요한 묘법 중에 묽은 먹으로 된 화면을 진한 먹으로 분할해 가면서 대담한 필치로 그려가는 파묵법(破墨法)이 있다. 그 외에도 윤곽을 그리지 않고 수묵 혹은 채색의 면으로 대상의 형과 명암을 그리는‘몰골담채법(沒骨淡彩法)’이 있다. 이것들은 선이 가지는 의지적인 힘은 없으나 부드럽고 풍만한 감정의 표현과 탄력성이 있는 기법들이다.
이것은 형을 본뜨기보다는 작가의 신운(神韻)을 중시하는 화풍으로서 주관적이고 사의적인 표현을 주로하는 남종산수화에 많이 쓰이는 묘법이다. 그러므로 이 묘법은 수묵화의 대표적 이론가 형호(荊浩)가 말한‘심수필운취상불혹(心隨筆運取象겘惑)’(筆法記)이나 소동파가‘논화형사견여아동인(論畵以形似見與兒童굜)’이라고 말한 형사(形似) 배척론에 바탕을 두고 있는 현대적 기법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동양화의 여백은 서예의 비백(飛白)이나 창(唱)에 있어서 고조음의 절정에 가서 한 두 박자 쉬는 침묵의 상태, 혹은 고전 무용에서 동작이 이루어진 다음 잡아챌 때에 잠깐 멈추는 정지 상태와도 같이, 우리들의 상상에 호소하여 보다 강한 동감을 자아내어 주는 것이다.
이 여백을 무라고 했으며 유가 무에서 나오고 그 무는 도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도가들은 생각하였다. 그 무는 결코 허무나 순무는 아니며 현상상의 무인 것이다. 그래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무위는 도리어 유위(有爲)를 위한 것이라는 데 근원을 두고 있다고 하였다. 부드럽고 약한 것은 굳세고 강함을 위한 것이요, 이보 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하는 적극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충만의 교리는 도가의 상대론적 상인상존(相因相存)에서 싹튼 이다.
이러한 여백의 표출은 서양화가 배경을 어둡게 하고, 전경을 점점 밝게 처리하는 명암(원근)법을 쓰는데 비하여, 동양화에서는 가까운 것을 진하게 하고, 멀어질수록 묽게 처리한다. 그 묽은 것은 점점 옅어져서 여백에 일치시키는 비합리적인 파묵법을 많이 쓰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선염법(渲染法)이나‘퍼짐’의 수법으로 그려, 물체의 중앙을 옅하게 하고 주위를 점점 진하게 처리하는 서양화적 명암법이 아니다.
가까운 것이거나 밝은 것을 진한 먹으로 처리하고, 멀거나 어두운 것을 묽은 먹으로 처리하는 독특한 파묵법을 즐겨 쓴다. 이것은 바로 사진의 네가티브(negative: 음화)와 같은 원리이다.
음과 양‘이기(二氣)’의 상인상존에서 나온 원리이며, 자연을 과학적 차원에서 새롭게 발견한 고차원적 표현법이라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현대 동양 회화의 활로를 이러한 면에 착안하여 개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서양화는 현상적으로 대상의 물체에서 우주적 실재인 전체로‘보아 들어가는’실증적인 포지티브적 수법이다. 그러나 동양화는 관념적으로 우주의 원리인 도에서 물체를‘보아 나오는’ 표현성인 네가티브적 수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현상계를 서양이 긍정적이고 실증적으로 본데 비하여 동양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으로 본다. 그런 까닭에 동양화는 다분히 상징적이요 정신적인 것이 주가 되고 현대의 비구상 회화의 정신과도 만나게 된다.
캇시러가 말한‘인간은 심볼(상징)을 사용함으로서 구체적인 존재만의 현실 세계의 관념을 뛰어 넘어서 세계의 전체적이고 입체적인 시야를 얻을 수 있다. 그리하여 이상을 바라보면서 추상의 세계에 노닐 수가 있는 것이다’라는 말은 이러한 현상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천지가 길고 오래감은 스스로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에 장생하듯이 자기 현시(現示)가 아니라 자기 부정·무욕에서 만물이 생동한다. 이러한 여백의 공간은 현대 서구 추상화의 공간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 공간은 무한한 다유(多有)를 암시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맑고도 고요한 것이다. ‘청정(淸靜)은 천하의 정이다. 허(虛)를 이룸이 극하고 정(靜)을 지킴이 두터우면 만물이 생동한다’는 도가의 사상이다. 상대적으로 정중동(靜中動)이요 허중실이라 만물이 고요 속에서 태어나는 신비적인 명상(瞑想)의 세계에서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산수화의 수평선이나 지평선은 그 경계가 구분되지 않은 채 여백속에 숨어 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하늘과 물이 일체가 되어 상인상존된 채 아스라하게 심오한 경지를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진위양행론(眞僞겱궋걩)’과‘만물동체론(萬物同體걩)’의 시공적(時空的) 항구성, 즉 도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비과학적이고 불합리한 것은 아니다.
지평선(수평선)은 언제나 인간의 눈의 높이에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볼노우가 말했듯이, 그것은 인간이 두 발로 수직의 자세로 일어서는 순간 비로소 존재하게된 공간이다. 인간은 그 지평선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이 우주 공간의 중심, 무한한 원의 그 중심점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기에 지평선은 인간을 현실의 중심에 있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평선의 의미는 그것이 모순되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지평선은 울타리와 같은 한계선을 그어 놓으면서도 인간은 평생을 걸어도 이르지 못한다.
가도 가도 새로운 지평선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계를 가진 것이면서도 동시에 영원한 것이다. 이 지평선을 향한 시선을 언어로 바꿔 놓은 것이 시(詩)다. 현실의 언어이면서도 언제나 현실을 뛰어 넘는 높이와 영원성을 지닌 언어, 이것을 조형언어(造形言語:그림)로 바꿔놓은 것이 여백이다. 즉 현상학적 허구성을 지양하고 존재의 진실을 표현한 리얼리티다.
콜룸부스(Columbus:신대륙의 발견자)적 견지에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우리들이 바다의 수평선에서 볼 수 있듯이 지구 표면상의 둥근 수면은 우주의 공간속에 실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수평선(지구의 외곽)을 넘어서면 또 수평선이 나타나고 또 그것을 넘어가면 상대편에는 우주공간으로서의 하늘이 상존해 있는 것을 배를 타고 항해해 보면 느껴지는 현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2차원적인 경계선(수평선)을 그어버린다는 것은 우주적 실재와는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현상학적 차원에 머무는 서양화의 단점을 지적하는 것이 된다. 현상적으로는 경계가 나타날 수 있으나 관념적 존재론적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화는 어느 한 곳에서 작가가 머물러 보아들어 가면서 그리나, 동양화는 대상속을 거닐면서 그려가고 대상을 봐 나오면서 그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백의 공간이란 실재적 공간을 암시하는 3차원적인 것이 아니라 4차원적인 세계(공간+道心的인 관조)인 것이며, 화면구성에 있어서도 서구적 통일의 균정(均整)과 평형(平衡)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차라리 긴장과 긴장의 융합에 근거를 두고 조화를 꾀하려는 데 관심을 두는 공간이다.
Ⅴ. 맺는말
실로 수묵화의 선과 농담과 여백은 현대 과학적 소인(素因)을 많이 지니고 있으며 서양화의 문제점까지도 고차원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미술의 활로를 거기서 발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현대미술의 정신적 상황은 시대정신에 동화되어 가고 있는 경향이 있다. 기계와 기술이 모든 분야를 섭렵하고 있는 오늘의 상태가 언젠가는‘치명적인 전복’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되고 있는 것이다. 니이체가‘신은 죽었다’고 울부짖은 이후 우리는 무엇인가 잘못된 현대의 한계상황(限界狀況)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동서미학의 상대주의적 발전(화학변화)을 위해서는 어차피 전통의 계승과도 관련된 복고적(復古的) 단계를 거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참다운 복고는 화학변화에 대한 요해성(괓解性)이 전제될 뿐만 아니라 동양화의 근본 요소인 선과 여백과 농담, 그리고 표현 양식과 수법 등은 이미 현대 회화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갈등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 과학성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서 한국 동양화단의 상황적 과제는 무엇일까? 오늘날의 과제는 과거 지향적 전통 묵수주의나 미래 지향적 개혁주의 및 현실의식적 도식화 등이 난무하는 혼란된 상황을 극복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될 것이다. 그것은 또‘기존 미학의 가설을 표상하는 기능공으로 전락하느냐?’아니면‘감성적 정열과 예지를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미학의 정원사로서 자신의 동산을 조원(造園)하느냐?’라고 하는 결단과 선택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고루한 전통이나 안이한 현실보다는 현실 타개를 위한 비판적인 창조와 개혁작업을 수행하는 일이다. 이것이 오늘날 동양화단에 주어진 시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 작업은 이상에서 논술한 바와 같이 동양화의 전통적인 가치와 현대적인 의미를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시대적 양식을 수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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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서울신문사 신춘문예 미술평론 투고, 서울농대병설중학교 교사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