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2년 현대미술 12인의 작품평론집 『현대미술의 위상』출판과 함께 평론활동 시작, 1991년 『구상 미술에의 초대』로 두 번째 평론집을 냈다. 2007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장, 2019년 이중섭미술상 심사위원장을 역임했고, 2010년 제2회 한국미술평론가협회상(평론부문)을 수상했다. 현재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원, 글로벌 사진 스톡회사[Getty Images] 전속으로 있다. 사진전으로는 2010년 상해 무린화랑과 2011년 인사동 토포하우스, 2019년 부산 아스티갤러리, 서울 인사동 갤러리인덱스에서 모두 4회의 개인사진초대전을 열었다. 그 밖의 저서로는 명시 감상문 『나를 울린 시』, 우화집 『나비꿈』이 있다.
金容朱論-통영 현대미술의 초석이자 귀감
인류의 역사는 지배자 중심적으로 기록되어왔다.
그러다가 민주주의가 정착되면서 평범한 소시민의 삶의 모습도 역사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오늘날에 이루어지는 인류의 역사는 지구상에 사는 모든 인간 삶이 그대로 반영된다.
그러고 보면 역사란 인류의 삶 그 전체의 자취라고 할 수 있다.
어떤 형태의 삶이든 모두 역사의 한 부분인 것이다.
이는 인간의 삶 가운데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삶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진정한 역사는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통영미술협회는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체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통영이라는 지역의 미술 활동 그 실체를 추적하고 기술하여 이를 세상에 알리고 남기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은 통영이 명실상부한 예술의 본향, 즉 예향임을 명확히 인지시키는데 중요한 일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역사적인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예향이란 허명일 따름이다.
통영미술협회는 이를 명확히 인식하고, 통영 근현대미술의 초석인 김용주에 대한 역사적 사실의 발굴 및 재평가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그동안 통영미술인으로는 최초로 화비를 건립함과 동시에 화집을 발간함으로써 역사적인 실체를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은 그 하나의 증표이다.
지나간 역사는 찾아내고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져버린다.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역사는 단지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실체가 있더라도 거기에 대한 현실적인 평가가 뒤따르지 않으면 역시 역사로서 남겨지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통영미술협회에서 화가 김용주를 기억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는 것은 예향으로서의 명확한 자기인식의 소산임을 알 수 있다.
김용주는 통영에 서양미술을 이입한 최초의 화가라는 평가 이전에 한국 근현대 서양미술사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실재하는 13점의 유화와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자료를 포함해도 모두 20점이 안 되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한국서양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이는 일본 유학을 통해 초기 서양회화를 도입한 1세대라는 프리미엄이 아니라, 작품 자체가 구현한 높은 예술적인 가치에 대한 정당한 평가일 뿐이다.
실제로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 방위 > < 자화상 > < 옥잠화 > 등은 기술적인 완성도는 물론이려니와 형식미 그리고 예술성에서 탓할 데 없다.
이들 작품은 당시 서양화의 전체적인 지형을 그리는데 빠뜨릴 수 없을 정도로 예술적인 가치가 높다.
그러기에 비록 소수의 작품만을 남겼을 뿐임에도 한국서양미술사의 한 부분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이 화가로서의 높은 성취는 개인적인 성과에 그치지 않고 그가 태어나서 성장하고 화가로서 활동한 통영미술에 긴요한 토양이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어쩌면 통영미술협회를 중심으로 통영문화계가 김용주의 존재가치를 알리는데 적극적인 것은 보다 발전적인 통영미술의 현실과 미래를 향한 지표를 설정하는데 있다.
한국서양미술사를 장식하는 화가로서의 김용주는 통영미술인의 귀감이자 선망의 대상이기에 그렇다.
따라서 김용주를 통영미술의 출발점으로 삼고 그의 작품과 생애를 기리는 것은 결과적으로 통영미술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는 일이기도 하다.
현재 인구 14만 명에 이르는 중소도시 통영은 예로부터 문화예술의 고장으로 알려져 왔다.
조선시대에 12공방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야말로 통영의 문화예술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명백히 보여준다.
300여 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12공방은 당시로서는 관민의 문화생활에서 아주 긴요한 역할을 했다. 전통공예라는 용어로 포괄할 수 있는 12공방은 기계의 힘이 아닌, 인간의 손의 기술로만 이루어지는 정교한 문화 생활용품을 생산하는 장인들의 집단이다.
12공방 가운데는 ‘지도와 수조도 및 의장용 장식화를 그리는’ 화원방도 존재했다.
이는 오늘날의 화실과 같은 곳으로서 순수한 창작이 아닌 생활화나 목적화를 그리는 일을 맡았다.
이들의 작업은 현대미술에 대입시켜 볼 때 창작활동이나 다름없다.
이렇듯이 그림을 그리는 화원방의 전통은 통영의 근현대미술이 태동하는데 어떤 식으로든지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다시 말해 그 영향이 미술가를 지망하는 청소년들에게 직간접적인 자극제가 되었을 터이다.
통영미술을 논할 때 12공방의 존재를 결코 도외시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용주가 유복한 가문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화가수업을 받기 위해 일본 가와바다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난 것도 따지고 보면, 12공방의 전통이 이어져온 통영의 문화적인 토양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리란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고장과 달리 통영에서는 장인들의 존재에 대한 편견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12공방이 존재함으로써 거기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인구가 적지 않았을 터이다.
이러한 특수한 사회적인 여건은 통영이 근현대에 이르러 각 분야에서 성가 높은 예술인들을 많이 배출하는데 필요한 자양이 되었으리라 보는 까닭이다.
실제로 김용주만 하더라도 구한말 인동도호부사를 역임한 만석꾼 김진현金晉鉉의 증손이라는 사실이 말하고 있듯이 그림을 그려야 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림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문화예술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 및 이해도가 높은 지역적인 특수성과 무관하지 않았으리라는 판단이다.
이러한 지역적인 특수성이 예술 각 분야에서 적지 않은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하게 된 원인의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인구대비 출중한 예술가의 배출은 선례가 없을 만큼 단연 독보적이기에 그렇다.
이렇듯이 통영인들 스스로가 예향, 즉 예술의 본향이라고 말하는 데는 그만한 자부심이 깔려있다. 비록 12공방이 전통공예라고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통해 그 예술적인 가치에 대해 주목하고 있는 실정이다.
김용주가 근현대를 아우르는 한국서양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단지 개인적인 성과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를 기점으로 통영의 미술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1945년 통영중학교와 통영여자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후진을 양성하는데 힘썼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하다.
통영에 서양미술이 뿌리를 내리는 초석의 역할을 한 것이다.
후진양성과 함께 < 통영문화협회 >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여 전혁림과 함께 미술부를 맡아 지역미술 저변확대를 위해 노력했다.
그런가 하면 ‘< 경남교육미술연구회 >를 결성하고 방학을 이용해 경남 각 지방을 순회하며 전시회, 강연회, 사생대회를 개최하는 등 미술계몽과 분위기 조성에 힘을 쏟는다. 한편, 이때부터 이태규, 박종석 등 미술지망생들을 받아들임으로써.’ 통영 현대회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김용주는 개인적인 창작활동과 더불어 지역미술 발전과 후진 양성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개인적인 창작활동보다는 통영에 서양미술을 이입하는데 더 큰 의미를 부여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교단과 지역의 문화예술을 활성화시키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오늘 통영이 예향으로서의 명성을 이어갈 수 있는 것도 그의 선구자적인 노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미술 분야에 한정해 볼 때 김용주와 전혁림 그리고 이한우와 김형근의 존재만으로도 통영은 예향으로서 손색없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김용주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다.
비록 남겨진 작품 수가 절대적으로 적다는 점이 못내 아쉽기는 할지언정, 남은 작품만으로도 출중한 작가적인 역량을 가늠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 방위 >는 조형적으로 뛰어난 작품임은 물론 내용에서는 해방 이전의 시대상을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암수 한 쌍의 닭을 통해 일제치하라는 암울한 시대상을 투영하고 있는 이 작품이 도달한 조형적인 성과는 매우 크다.
일반성을 벗어나는 대담한 대각선 구도 및 비례 그리고 강렬한 색채대비가 시선을 사로잡는 독특한 형식미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기에 그렇다.
특히 이 작품이 획득한 조형적인 성과는 오늘날 통영의 현대회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강렬한 원색적인 성향의 단초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당시 화단 상황으로 보아서는 이처럼 명료하고 강렬한 색채대비는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색채대비 및 명도대비는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특징이다.
이러한 극렬한 색채 및 명암대비는 어쩌면 그가 인물화에 남다른 열정과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그의 작품 가운데 실내의 인물이 많은데 역시 강렬한 명암대비가 인상적이다. 외부의 빛을 한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실내라는 조건에서 대상을 부각시키다 보면 그 배경은 자연히 어두워지게 마련이다.
이렇듯이 빛이 억제되는 제한적인 상황을 역으로 이용하면 인물을 더욱 선명하고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인물화가 전체적으로 명암대비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은 이에 연유한다.
또한 극렬한 색채대비는 그 자신의 개인적인 성향이거나 회화적인 사상 및 철학의 소산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 자신이 태어나 성장하여 살아왔던 통영이라는 자연환경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즉 짙푸른 남빛바다가 주는 강한 시각적인 인상이 그의 색채감각에 어떤 식으로든지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방위 >에서 보여주는 짙은 색채감각을 단순히 개인적인 취향이나 성향으로 보기에는 어딘가 미흡하다. 하지만 짙푸른 남빛바다와 대입시키면 납득하기 어렵지 않다.
오늘날 통영의 미술가들에게서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원색적인 색채이미지 또한 통영이 가지고 있는 자연환경에서 배태되었다고 볼 수 있다.
< 방위 >에서 보여주는 암갈색의 대지(땅의 개념이 아니라)에 대비되는 암청색의 하늘, 그리고 황갈색 및 붉은 색의 수탉으로 전개되는 색채이미지는 자연에 입각한 색채감각을 훨씬 뛰어넘는 조형적인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실제의 색채보다도 한층 강조되는 색채이미지는 회화적인 표현기법의 하나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 방위 >는 그러한 기본적인 색채개념에서도 훨씬 벗어나 있다.
이는 피지배민족으로서의 울분을 강렬한 색채이미지로 분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김용주가 보여주는 이와 같은 색채이미지는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통영 출신의 화가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색채성향이다.
강렬한 원색의 사용은 비현실적이다.
사실주의 미학개념을 벗어나는 강렬한 원색의 사용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통영 미술인들의 작품에서 원색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는 김용주의 작품이라는 선례가 있기에 아주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보색대비와 같은 강렬한 색채이미지는 내용과 관련이 있다.
형태를 통한 이해보다 색채가 주는 메시지가 시각적인 인상 및 호소력이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색채이미지를 통해 화가 자신의 내면을 토로하는 것이다.
이렇듯이 김용주는 통영의 미술 현장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통영 서양화 곳곳에서 그의 존재감은 다양한 형태로 검출된다.
왜냐하면 통영의 서양화에서 김용주의 존재는 훌륭한 본보기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로부터 직접 그림을 배워 성공적인 화가로 활동하는 경우는 소수에 지나지 않을지언정,
그가 보여준 작가적인 정신 및 조형적인 성과는 통영의 현대미술의 근간이기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