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색채: 스캔들

‌글: 김순옥 (예술학 박사, 한국미술진흥원 원장)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
세상엔 많은 색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자연의 순리와 함께 한다. 인간이 만들어낸 많은 색들은 회화적 역할과 함께 디자인에 관해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인간이 자연과 합일하는 것부터 시작된다는 말이다.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천연안료의 화려한 의상이 돋보이는 영화 ‘스캔들’은 영상이 너무 아름다워 보는 이들을 금세 화면에 빠져들게 한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가장 한국적인 색상이 이토록 관객들을 매료시킬 수 있다는 것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오방색의 화려하면서 상징적인 표현은 천지만물과 조화의 색채의식을 형성하는 근간이라 볼 수 있다. 주인공의 심리가 색채를 통해 강한 인상을 남겨 오래토록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이 영화의 원작은 18세기 프랑스 작가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서간체 소설 ‘위험한 관계’이다. 프랑스 혁명 전의 문란하고 퇴폐적인 상류사회를 차가운 눈으로 관찰해 날카롭게 분석한 작품이다. ‘스캔들’ 역시 시점을 18세기 후반인 정조 연간으로 잡았다. 조선시대의 유교사상에 새로운 실학사상이 더해 사회엔 무언가 새로움이 꿈틀대는 시기의 남녀상열지사를 다루고 있다. 새로움이 부각된 시기라고는 하나 당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품행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방탕하여 과연 실제 존재한 에피소드였을까 하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수 없다.
명색이 세도가의 정부인이지만 남자들을 유혹하는 이중생활을 영위하는 조씨 부인,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을 마다한 채 여인들에 탐닉하고 시ㆍ서ㆍ화를 즐기는 ‘문화 건달’ 조원, 드러내지 못할 첫사랑이자 사촌관계인 둘은 이 영화의 기둥줄거리인 ‘사랑과 복수’ 게임의 파트너다.
조씨 부인은 어느 날 남편의 소실 자리인 어린 소옥을 범해줄 것을 조원에게 부탁하지만 조원은 남편 잃고 9년간 수절한 행실로 세상에 알려진 숙부인 정씨에 대한 ‘도전’을 일생일대의 목표로 삼고 있다.
‘사랑의 도박’의 승부수를 즐겨 띄우는 조씨 부인은 조원이 숙부인 정씨에 대한 ‘작업’에 성공하면 자신을 부상으로 내리겠다는 조건을 걸게 되고, ‘사랑의 승부’를 좋아하는 조원 역시 내기를 수락한다. 평생 갈고 닦은 실력과 술수를 총동원하여 숙부인 공략에 나선 조원, 하지만 나라에서 금한 천주학에 입교하고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등 강한 신념으로 살아가는 숙부인의 꿋꿋함은 국왕이 정표(旌表)한 열녀답게 예상외로 완강하고, 그럴수록 조원의 전의는 더욱 불타오른다.
그러나 정절녀 숙부인은 바람둥이 조원과 요부인 조씨 부인의 집요하고 치밀한 계략에 빠져 끝내 훼절하고 만다. 조원은 많은 여자들에게 상처를 남겼으면서도 자신만은 사랑의 상처를 입지 않는 프로 바람둥이답게 숙부인을 떠나보내지만 이미 숙부인을 깊게 사랑하고 그리워하게 되어 조씨 부인과 결별을 선언한다.
요부의 배신감은 서릿발이나 마찬가지다. 조씨 부인은 숙부인의 훼절을 시동생에게 알려 곤경에 빠뜨리고 그 시동생은 복수심으로 조원을 살해한다. 조원의 죽음을 전해들은 숙부인은 이승에서 못다 이룬 사랑을 저승에서 이루자며 스스로 강물로 걸어 들어가 모진 명줄을 잘라버린다. 한편 조씨 부인은 그간의 난잡한 남자편력이, 평소 관계한 여인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온 조원의 화첩을 통해 뒷날 세상에 알려지자 죽음을 피해 먼 곳으로 초라하게 떠난다.


조씨 부인( 이미숙 ) 
붉은 계열의 화려한 색채에서 무채색으로 운명이 곤두박질한다. 붉은색과 보라색이 무척 잘 어울리며 주홍을 입어도 연한주홍에서 진주홍까지 세련된 색채감각을 자랑하는 패션리더다. 당시 패션리더는 신분상 기녀이다. 세도가의 정부인으로 빨강의 정념을 유감없이 드러냈다면 상열지사의 대표적인 등장인물임에 틀림없을 터. 빨강과 보라, 분홍의 배색감각이면 이 시대에도 충분히 통할 수 있는 패션감각의 소유자다.
섹스의 상징인 빨강 옷을 입은 부인은 그 색채의 욕망만큼이나 열정적으로 남자를 탐한다. 부인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소도구인 병풍도 주요 색깔이 빨강과 검정이다. 탁하지 않은데다 명도와 채도가 아주 높아 화려하게 보일뿐 아니라 권력을 나타내는 검정의 권위가 또렷하게 부각되고 있다.
부인의 정열적인 성적 욕망을 암시하듯 병풍 속에는 붉은 꽃들이 화려하게 꿈틀대고 있다. 부인 방의 검정 가재가구에서도 부인의 화려한 권력과 편력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부인이 나이 어린 옆집 도령을 인적 없는 산 속으로 유인해 욕망을 불태웠던 가마 또한 빨강과 검정으로 장식돼 주변의 자연과는 대조적인 화면을 만들어 진한 인상을 남겼다. 죽음보다 엄했던 당시 사대부사회에 도덕적 문책을 피해 황급히 중국으로 도망치는 부인의 옷차림은 검정과 회색의 무채색 톤으로 처리돼 ‘화려한 욕망 뒤의 쓰라린 회한’을 표출하고 있다.


숙부인( 전도연 ) 
무채색에서 붉은색의 화려한 색채로, 그러나 하얀 강물에 얼어붙은 열정의 죽음. 정절을 지키며 천주교의 가르침인 박애정신으로 살아가는 숙부인은 무채색이 주는 가라앉은 듯 단조로운 분위기로 시작된다. 젊은 나이에도 당시의 시대상을 거스릴 수 없어 수절과부답게 회색과 푸른색옷을 입고 등장한다.
방의 벽도 회색이고 가구나 꾸밈이 없어 공허한 분위기는 검소하고 절제된 삶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숙부인 방에 있는 병풍은 엷은 노랑 바탕에 검정 나무와 바위 절벽이 수묵담채로 그려져 있다. 가마역시 엷은 회색빛의 단조로운 구조다. 채도 낮은 의상과 배경으로 생기 없는 금욕생활을 하다가 조원을 만나 사랑과 성에 눈을 뜨면서 숙부인의 옷에 수절과부에게는 금기시된 붉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조원으로부터 받은 빨강 목도리는 조원이 숙부인에게 품은 욕망을 암시하며 앞으로 전개될 남녀상열지사를 충동적으로 보여준다. 이 빨강 목도리는 숙부인이 정인을 따라 저승을 택하면서 욕망의 끝자리처럼 끝내 얼어붙은 얼음과 눈 덮인 강물 위의 빨강으로 표현되었다.


조원( 배용준 )
 
무채색에서 진한 감색과 흰색이 대비된 조선 선비의 모습.처음엔 주로 하양과 검정 의상을 입다가 나중엔 진한 감색 옷을 입는데, 하양은 여성을 유혹하기 위한 바람둥이의 카리스마가 넘친다. 의상에 포인트를 주기위해 빨강 띠와 호박단추, 비단부채를 등장시켰는데, 다소 튀지만 봐줄 만 했다. 이야기가 후반부로 치달으면서 감색이 진해지지만 죽임을 당할 때는 하얀 의상과 빨강 피로 강하면서도 순정한 사랑이 표현된다.
요부와 바람둥이, 그리고 정절녀가 펼치는, 당시 양반사회가 뒤집어질만한 남녀상열지사를 다룬 ‘스캔들’은 이러한 에피소드를 담는 수려한 로케이션 장소와 현란한 의상, 화장, 그리고 음향이 어우러져 시대극이면서도 전혀 낯설지 않게 다가온 영화였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영화의 전편에 흐르는 색채의 향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