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색채: 왕의 남자

‌글: 김순옥 (예술학 박사, 한국미술진흥원 원장)

줄거리
놀이패 광대 장생(감우성 粉)과 공길(이준기 粉)은 서로에게 애틋한 연정을 품고 있다. 공길의 야릇한 매력을 탐하는 양반들의 욕정은 장생의 분노를 가져오고, 결국 이들은 좀더 큰 판을 벌이기 위해 한양으로 떠난다. 한양 저잣거리에서 또 다른 놀이패 육갑, 칠득, 팔복을 만난 장생과 공길은 연산군과 장녹수를 풍자하는 판을 벌여 장안에 일대 선풍을 일으키지만 의금부에 하옥당하고 만다.
문초에 시달리던 중 장생은 내관 처선에게 왕을 웃겨보겠다고 목숨을 걸고 약속, 판을 벌일 기회를 얻는다. 공길의 기지로 굳어 있던 연산군을 파안대소하게 만든 이들은 대궐안에 거처를 얻고 왕 앞에서 중신들의 비리를 폭로하는 공연을 한다. 왕은 광대들을 가까이했고 공길은 특히 총애를 받아 왕의 거처로 자주 불리워간다. 연산군의 학살과 공길에 대한 총애를 부담스러워한 장생은 대궐에서 나갈 것을 제안하지만 공길은 외로운 왕에게 마지막으로 보여줄 공연이 있다며 여인들의 암투로 후궁이 억울하게 사약을 받는 내용의 공연을 한다. 왕은 진노하여 어머니인 폐비 윤씨를 모함한 여인들을 그 자리에서 죽인다.
그러던 중 공길은 장녹수와 중신들의 모함에 빠져 대역죄의 혐의를 받지만 장생이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양쪽 눈을 빼앗는 체형을 당한다.
궁궐 대전 앞마당. 허공에는 외줄이 매어있고 반정의 와중에 넋이 나가있는 연산군과 장녹수 앞에 나타난 장생은 비틀거리며 외줄에 올라타고는 왕에게 한판 사설을 늘어놓는다. 눈물을 글썽이며 그 장면을 바라보던 공길. 함께 줄에 올라타서 주고 받는 이들의 대화는 조선시대 최하류층으로 핍박받으며 지켜온 놀이패들의 예술혼을 절절히 나타내준다.
공길 : 네 놈은 다시 나면 뭐로 나고 싶으냐?
다시 태어나면 뭘로 태어날래?
양반으로 태어나련? 아님 왕으로 태어나련?
장생 : 싫다! 이 세상 한바탕 놀다가면 그만인 것을...
다음 생에 태어나도 당연히 광대로 태어날란다.
공길 : 이 놈, 목숨 놓고 광대짓하다 죽게 생겼으면서도 또 광대냐?
장생 : 그러는 네 년은 다시 태어나면 무어가 되고프냐?
공길 : 나야 두말할 것 없이 광대, 광대지!
- 왕의 남자 중에서 -


무방비 상태의 보호 본능을 불러 일으키는 여성의 색 - 분홍
영화의 첫 장면 어느 양반집 잔치무대에서 입고 나온 공길의 옷은 분홍빛 저고리였다. 궁궐에서 경극을 공연하던 때는 분홍과 빨강 의상 뿐 아니라 색조 화장까지 눈부시게 어우러져 관객을 환상에 빠뜨리게 했다. 분홍색 옷과 얼굴빛을 하고 있는 공길은 공연을 보는 양반들, 함께 공연하는 장생, 그리고 왕에게 까지 달콤한 환상이며 휴식이며 유혹이었다.
분홍은 육신(flesh)을 나타내는 색으로 통상적으로 에로티시즘이나 유혹, 사랑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또한 분홍은 여성성을 상징하는 색깔이다. 현대적인 여성의 능동성과 발랄함 보다는 남성의 사랑을 갈구하는 여성, 남성의 시각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여성, 환상과 꿈을 쫓는 클래식한 여성의 전형을 나타낸다. 따라서 남성의 입장에서는 보호해야할 대상이기도 하다.
공길의 분홍색 이미지는 연산군의 공격적 에너지를 서서히 진정시키고 아울러 고독감, 낙심, 절망감을 견디게 해주었다.
열정의 예술혼을 표현한


여성의 색 - 빨강
분홍이 수동적인 여성을 상징한다면 빨강은 능동적인 여성을 상징한다. 빨강옷을 입은 공길은 끼와 열정이 넘치는 예술혼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공길은 궁궐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공연을 펼칠 때마다 화려한 빨강색 옷을 자주 입고 나온다. 특히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눈먼 장생과 함께 빨간 광대복을 입고 줄타기를 하면서 나누는 대사는 공길이 권력에 의지하는 연약한 여성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광대로서의 삶에 대해 적극적으로 긍정하며 살아가는 자유정신과 예술혼에 충만한 존재임을 나타내고 있다.
“나야 두말할 나위 없이 광대, 광대지”
이 말을 하며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높이 치솟은 빨강색 공길은 더 이상 권력을 지닌 남성들의 성적 노리개로 수동적으로 보호받는 여성성의 상징이 아니라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진정한 광대, 공길인 것이다.


질감과 채도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천연염색 의상들
영화에서 장생은 처한 환경에 따라 뚜렷이 구분되는 두 가지 상반된 채색의 의상을 입는다. 궁궐에서 왕의 보호와 지원을 받으며 공연을 할 때는 비단의 광택과 매끄러운 질감의 채도가 높은 화려한 옷이다. 반면에 대부분의 장면에서는 무광의 거친 질감의 채도가 약한 빛바랜 색이다.
이러한 설정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궁궐 연회에서 입은 흰 바탕의 색동 옷은 본래 장생에게 맞는 옷이 아니다.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놀고 길에서 살다가 길에서 묻힐 장생에게는 그저 풀빛, 흙빛으로 자연채색한 의상이 제격이다. 왕이 입혀준 색동옷을 벗어던진 장님이 된 장생이 줄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으면서 하는 독백은 천생 광대인 장생의 정체성을 잘 나타내준다.
깃발을 앞세우며 온갖 징과 꽹과리와 장구를 두드리며 신나게 놀고 있는 장생과 공길, 육갑과 칠득, 팔복이 입은 의상은 길가의 흙과 돌과 풀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권력이 주는 위엄의 색 - 파랑
영화에서 연산군과 장녹수, 그리고 중신들은 모두 권력을 지닌 존재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소유하고 있는 권력을 다양한 색채의 의상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사실 조선시대에는 신분의 차이에 따른 의복 색깔의 엄격한 규제가 있었다. 노랑은 황제만의 색이고, 왕실의 색이 빨강, 관인의 색이 파랑, 그리고 일반 서인은 하양의 옷을 입게 되어 있었다. 태종때 까지는 고려사회의 여파로 신분에 따른 구별이 엄하지 않았지만 세종조에 이르러서는 각 관청의 하급 관리와 상공에 종사하는 자, 천민 등에게는 붉은 옷을 입지 못하게 하는 등 복색에 따른 구분이 엄격해졌다.
그런데 영화 「왕의남자」에서는 색채학적인 면에서 이러한 역사적 고증과는 다른 두 가지 사실이 눈에 띤다. 하나는 왕이 입은 곤룡포의 색깔이고 두 번째는 일반 민중들의 옷 색깔이다. 조선시대의 왕은 전통적으로 붉은 색 곤룡포를 입었으나 영화에서 입은 연산군의 곤룡포 색깔은 파랑이다.
이러한 차이는 왜 일어났을까? 회화성을 살리기 위한 의도된 왜곡인가, 철저하지 못한 고증에서 비롯된 옥의 티인가? 필자는 전자라고 본다. 고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보기에는 왕의 곤룡포 색깔이 빨강이라는 것과 조선시대 백성들이 흰 옷을 주로 입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상식적이다. 왕의 곤룡포를 빨강이 아닌 파랑으로 했던 것은 파랑이 갖는 남성성과 권력을 공길의 연약한,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는 분홍색과 대조시키기 위한 전략은 아니었을까? 파랑은 남성성과 성공과 권력의 상징임과 동시에 불안정함과 외로움의 상징이기도 하다. 어머니 폐비 윤씨를 죽인 중신들에게 둘러쌓여 있는 연산군의 극도로 불안정하고 고립되어 있는 상황을 시각적으로 극대화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곤룡포=빨강의 공식을 깨고 파랑을 전면에 배치하게 한 것은 아닐까? 왕의 곤룡포도 중신들의 관복도 파랑이다. 권력을 나누어 갖고 있으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하고 있는 상황을 표현하기에 파랑은 가장 적합한 색깔이다.
한편 희대의 요부라고 일컬어지는 장녹수의 영화 속 의상은 의외로 섹스어필하거나 색정적이지 않고 위엄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영화 포스터에도 나오고 있는 진한 초록저고리나 장생과 공길 놀이패들이 왕 앞에서 펼치는 첫 공연에 등장하는 노랑의상은 장녹수를 시중의 가벼운 요부로서가 아니라 권력의 실체로 표현하고자 한 감독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1180만명의 국민이 관람한 공전의 히트작 왕의 남자. 「왕의 남자」는 감동을 주는 스토리와 배우들의 열연 등 많은 미덕을 갖고 있는 작품이지만 특히 미술을 전공한 이준익 감독(세종대학교 회화과 졸업)의 탁월한 색채감각으로 인해 화려하면서도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영상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들의 개성과 처한 상황에 따라 적절히 배치되어 있는 색채를 탐색해 봄으로써 「왕의 남자」가 갖고 있는 매력에 더욱 더 젖어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