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으로 노래하는 음유시인, 김재학
글: 김순옥(예술학 박사)
김재학 화백은 말이 없다. 휴대폰도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작품 활동에 몰두하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다. 우리 화단에 보기 드물게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동시에 호평을 받고 있는 인기작가로서 자신의 조형세계에 대한 버젓한 레토릭이라도 준비할만한데 그는 지나치게 꾸밈이 없다. 필자의 거듭된 인터뷰 요청에도 “미술작품은 그냥 보고 느끼면 그만이지, 인터뷰는 무슨…”이라며 수줍은 손사래를 친다.
그는 붓을 통해 말을 한다. 제인 캠피온 감독의 영화 피아노에서 벙어리 여주인공 홀리 헌터가 오로지 피아노를 통해서 세상과 소통하듯 김재학 화백은 붓을 통해 자연과 소통한다. 그의 작품에는 이지적인 시각과 기계적 엄밀성을 갖고 대상을 바라보는 극사실주의와는 달리 작가의 혼과 감정, 사물의 개성이 감각적인 터치를 통해 숨을 쉬고 있다. 생명이 없는 대상에 생명을 불어넣고 말없는 자연으로 하여금 스스로 말을 하게 한다.
김재학 화백의 작품은 자연이 실제보다 더욱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 그의 작품을 처음 본 사람은 미술의 문외한이라 할지라도 “야, 참 잘 그렸구나” 라며 찬탄을 하게 된다.
사실주의의 진수를 보여주는 현대 작가의 맨 첫 자리에 그의 이름을 올려놓는다 해도 이의를 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 생생한 묘사력이 살아있는 장미꽃 이나 벚꽃을 보면 새들이 앉으려다 떨어졌다는 솔거의 황룡사 〈노송도(老松圖)〉의 전설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대한 가치가 이러한 사실의 재현성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재현해낸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라 회화적인 자연이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낯익은 대상 속에서 우리는 처음 발견하는 낯선 아름다움에 놀라곤 한다.
그의 다양한 작품 속에서 우리는 단순한 공간배치나 시간표현을 넘어선 감성을 적절히 드러내는 장식으로서의 빛과 그림자를 대한다. 세밀하게 재현된 극사실적인 정물은 밝은 조명 아래 그 존재감을 극대화시키는 한편 거칠고 선 굵은 터치로 처리된 비어있는 공간은 정물과 절묘한 하모니를 이루며 효과를 극대화한다.
감정의 과잉 속에서 대상의 정밀한 관찰과 분석이라는 사실주의 특유의 미덕을 가지고 나오는 대로의 감정을 무질서하게 분출하지 않으면서 절제와 중용의 미를 보여준다. 그의 작품세계에는 대상의 치밀한 재현 위에 마지막 화룡점정의 붓 터치를 통해 대상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대가의 노련함이 엿보인다.
김재학 화백의 사실주의를 사실의 재현 이상으로 만들어주는 그의 몇 가지 조형기법은 주목할만하다. 무엇보다 우리는 그가 한국 수채화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는 수채화 작가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불투명재료인 유채로 그렸음에도 그의 작품에는 수채화의 맑고 투명한 이미지가 살아 있다. 실제의 자연색보다 더욱 선도 높은 맑고 선연한 회화적 색채를 통해 시각적인 긴장감을 유지함으로써 시각적 이미지의 감흥을 고조시킨다. 여기에 일회성과 즉흥성을 특징으로 하는 수채화 화가로서 오랫동안 닦아온 세밀하고 감각적인 붓 터치가 기본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전통적인 리얼리즘 기법에 충실하던 김재학 화백의 작품세계는 근래 들어 약간의 변화를 겪게 된다. 일러스트레이션에 가까운 감각적인 붓 터치를 통해 경쾌한 빛의 세계를 창출한 일련의 작품들 속에서 김재학 화풍을 완성시키려는 작가의 의지를 발견하게 된다.
작품의 소재에 있어서도 특정한 정물과 풍경에 대한 객관적인 조명에서 벗어나 다양한 사물 속에서 인간의 삶을 투영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엿보인다. 아니 이는 의식적인 전환이라기보다는 작가의 연륜과 삶의 무게가 가져다준 자연스러운 방향키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아무리 이 사회와 인간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탐미적으로 그리려 하더라고 그가 이 사회에 속해 있는 숨쉬며 사랑하며 땀내 나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인 이상 지천명을 넘어선 작가의 작품에 그의 삶의 무게가 묻어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그림은 무엇입니까? 예술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예술? 인생이 곧 예술이겠지요”
말없는 김재학 화백의 잠실 화실에 걸린 그림들이 필자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