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 朴壽根 < 호: 미석(美石) > (1914-1965)
강원도 양구군 양구면(현 양구읍) 정림리 출생.
강원도 양구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강원도 인제군에서 독학으로 미술 공부를 하였다. 1932년 제11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 입선함으로써 화단에 등장하였다. 해방 후 월남하여 1952년 제2회 국전에서 특선, 미술협회전람회에서 입상하였다.[3] 1958년 이후 미국 월드 하우스 화랑·조선일보사 초대전·마닐라 국제전 등에 출품하는 등 국내외 미술전에 여러 차례 참가하였다. 1959년에 제8회 국전 추천 작가가 되었고, 제11회 국전에서는 심사위원이 되었다. 그는 회백색을 주로 하여 단조로우면서도 한국적 주제를 소박한 서민적 감각으로 충실하게 다루었고, 한국인 화가 중 가장 독창적이면서도 평범한 한국의 서민상을 주제로 삼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 1910년대
1914년 - 강원도 양구군(楊口郡) 양구면(楊口面) 정림리(井林里)에서 2월 21일(음력 1월 28일) 태어남1918년(4세) - 마을 글방에 다니며 한문을 배우기 시작함
♦ 1920년대
1921년(7세) - 양구 공립 보통학교 입학1927년(13세) - 양구 공립 보통학교 졸업. 가난으로 중학교 진학 못 함
♦ 1930년대
1932년(18세) -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처음으로 입선 '봄이 오다'이후 1943년까지 아홉 차례 입선함
1935년(21세) -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사망하자 춘천으로 가 그림 공부를 함
1936년(22세) - 제 15회 [선전]에‘일하는 여인’수채화 출품으로 두 번째 입선함
1937년(23세) - 제 16회 [선전]에‘봄’으로 세 번째 입선함
1938년(24세) - 제 17회 [선전]에‘농가의 여인’입선함
1939년(25세) - 제 18회 [선전]에‘여일(麗日)’입선함
♦ 1940년대
1940년(26세) - 2월 10일 강원도 금성 감리교회에서 김복순과 결혼, 5월 평양으로 가 공무원(평안남도 도청 사회과의 서기)으로 일함1941년(27세) - 제 20회 [선전]에‘맷돌질하는 여인 입선함1942년(28세) - 제 21회 [선전]에‘모자(母子)’입선함1943년(29세) - 제 22회 [선전]에‘실을 뽑는 여인’입선함1945년(31세) - 815광복 후 강원도 금성중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침
♦ 1950년대
1950년(36세) - 6.25전쟁 후 남쪽으로 내려옴1951년(37세) - 전라도 군산에서 막노동을 하며 그림을 그림1952년(38세) - 미군부대에서 초상화 그리는 일을 시작함
1953년(39세) - 제 2회 대한민국미술전 서양화부에 ‘우물가(집)’이 특선,‘노상에서’이 입선, 창신동에 집을 마련함
1954년(40세) - 제 3회 국전에서 ‘풍경’과 ‘절구’가 입상, 이어 제 4회, 5회 국전에서도 입선함
1957년(43세) - 제 6회 국전에서 ‘세 여인’이 낙선함
1959년(45세) - 제 8회 국전의 추천작가로 ‘앉아 있는 여인’을 냄, 이어 9회 10회 국전에 작품을 냄
♦ 1960년대
1962년(48세) - 한일국제교류전에 ‘나물’을 냄, 제 11회 국전에서 서양화부 심사위원으로 ‘소’와 ‘유동’을 냄, 오산 주한미공군사령부 도서관에서 박수근 특별 초대전이 열림
1963년(49세) - 왼쪽 눈 실명, 전농동으로 이사함
1964년(50세) - 제 14회 국전 추천작가로‘할아버지와 손자’를 냄
1965년(51세) - 4월 초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해 5월 5일에 퇴원함5월 6일 새벽 1시 전농동 집에서 별세, 경기도 포천시 소홀면 동신교회 묘지에 안장.
제 14회 [국전]에 유작 ‘유동(遊童)’ 전시.
10월 6일~ 10일 소공동 중앙공보관에서 유작전 79점의 작품이 전시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