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것’과 ‘보이는 것’에 대한 회화적 질문
김강용의 근작전에 부쳐
윤진섭(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김강용의 벽돌 그림이 20여 년의 연륜을 넘기면서 더욱 원숙해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의 < 현실+상(Reality+Image) > 연작은 정제된 미감과 절제된 조형성을 바탕으로 이젠 거의 완벽한 수준의 경지에 오른 것으로 판단된다. 그의 작품이 이러한 수준에 오르기까지에는 아마도 20여 년간 모래를 다루어온, 재료에 대한 그의 경험과 지식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모래를 선택하고 정제하는 일에서 시작하여 이를 접착제와 혼합하여 캔버스에 바르는 일, 그렇게 발라진 모래로 벽돌의 이미지를 만드는 일에 이르기까지, 벽돌 작품을 둘러싼 공정은 그 자체로 매우 까다로운 일인 동시에 반복되는 지루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앞에서 나는 그의 벽돌 작품을 가리켜 “이미지를 ‘만드는’ 일”이라고 표현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벽돌 작품이야말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일에 가깝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서 ‘그리는’ 행위는 벽돌이 노출될 때 생기는 밝고 어두운 부분을 표현할 때로 국한되며, 그나마 이 두 가지 색 톤(tone)의 사용은 최소한도로 억제된다. 반면에 벽돌의 전면을 차지하는 사각형의 단면은 인위적인 조작이 전혀 가해지지 않은 생 모래로 채워진다. 그의 캔버스는 일정한 두께의 모래로 덮인 평평한 평면인데, 이 균질의 공간에 밝은 부분과 그림자 부분, 그리고 벽돌과 벽돌 사이에 경계선을 그려 넣음으로써 마치 벽돌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김강용이 오랜 기간에 걸쳐 도달한 이 기술적 숙련은 그의 작업이 지닌 독특한 특질이다. 그리고 이 특질이야말로 그의 작품을 사실적인 경향의 다른 작품과 구분짓는 뚜렷한 경계선인 것이다. 그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매우 역설적이게도 그 이유를 우리는 이 작가의 초기 작품과 근작을 비교해 봄으로써 찾아볼 수 있다. 1983년 그로리치 화랑에서의 첫 개인전 출품작이었던 < 현실+장(場) > 연작은 같은 모래 바탕에 벽돌을 그린 그림이되, 그것들은 대상의 ‘재현(representation)’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벽돌의 모사(copy)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작품의 명제가 < 현실+장 >이었던 이유도 벽돌이 존재하는 장소성, 즉 벽돌담이나 벽돌더미가 지닌 표정의 묘사에 주목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사물이 마치 눈앞에 존재하는 것처럼 똑같이 그리는 이 눈속임 기법(트롱프 뢰이유)은 1970년대 중반 무렵 우리 화단에 불어닥친 구미 하이퍼리얼리즘의 영향이거니와, 작업 초기에 김강용은 이 기법을 자신의 작업의 방법론으로 수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모래 바탕 위에 벽돌을 아무리 똑같이 그려낸다 해도 그것이 하나의 허상임엔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현실이 될 수는 없겠기 때문이다.
극사실주의가 지닌 이 닮음(유사)의 요체는 ‘~과 같다’란 언표로 표상된다. 캔버스에 그려진 벽돌은 실제의 벽돌과 유사할 뿐, 벽돌 그 자체는 아니다. 그 유사의 틈을 메우기 위해 김강용은 벽돌의 질료를 이루는 모래를 캔버스에 바르고 이의 재현을 위해 사실적인 묘사를 가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캔버스에 묘사된 벽돌이 실재가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현실과 가상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강용의 근작인 < 현실+상(Reality+Image) > 연작은 긴 우회의 과정을 거쳐 도달한 이상(Idea)의 세계이다. 그의 근작에 나타난 벽돌의 이미지는 모사(copy)의 대상으로서의 벽돌이 라기보다는 오히려 화면 구성의 재료에 가깝다. 거기에는 초기작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장소성을 드러내는 구체적인 정황이나 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벽돌은 이상적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유사를 나타내는 특질은 최소화되어 있다(그의 작품에서 간혹 보이는 벽돌의 흠집에 관한 묘사는 이러한 ‘최소화’의 진행을 가로막는 요인이다).
김강용의 작업이 아직도 벽돌에 관한 것으로 읽힐 수 있는 요인은 모래라고 하는 질료적 측면과 장방형의 입방체가 지닌 형태적 유사성에 기인한다. 이는 우리의 경험에 입각한 연상작용의 결과이다. 그러나 시점(視點)의 모순과 벽돌의 크기에 있어서 논리적 모순을 보이고 있는 그의 근작들을 분석해 보면 작품에 나타난 벽돌의 이미지들이 현실적 정황이나 실제의 벽돌이 지닌 본질을 떠난 것으로 파악된다. 1점 소실의 원근법적 체계를 무시한 다시점법의 도입, 크기가 제각각인 벽돌들, 벽돌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깔끔한 외양, 두꺼운 캔버스의 옆면과 거기에 묘사된 벽돌의 측면 등은 그의 작품이 대상으로서의 벽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모사의 차원에서), 이상화된 벽돌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김강용이 벽돌의 이미지를 화면 구성의 요소로 파악하고 있다는 증거들이다. 그것은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현실을 초월해 있다. 그가 보여주는 벽돌 이미지의 다양한 변주는 화면에 조형적 질서를 부여하고자 하는 지적 노력의 소산이다. 그는 리듬, 균형, 조화, 균제, 강조, 파격과 같은 다양한 조형원리를 통해 화면을 구성하며, 그렇게 산출된 작품들은 미적 쾌감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그에게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남아있다. 가령 ‘~과 같다’라는 언표를 ‘~이다’라는 언표로 바꾸는 일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유사가 아니라 그 자체가 실재일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아내는 일이 하나의 실마리가 될 것이다. 그림자는 아직도 그의 작품이 환영의 언저리에 머물러 있음을 암시해 준다.
오랫동안 그는 실재(모래)와 환영(그림자)의 결합을 통해 2차원 평면 회화의 이율배반을 입증하고자 시도해 왔다. 고운 모래로 뒤덮인 그의 캔버스 화면은 근본적으로 평평하다. 그러나 음영의 간단한 조작을 거치면서 그의 그림은 요철이 심한 입체적 환영으로 전환된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그림은 원근법적 체계를 철저히 준수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별로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김강용의 벽돌 그림은 그림의 실제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의 상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상상력을 통해 벽돌을 캔버스 평면에 배치하고,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그려낸다. 그러므로 관객이 보는 벽돌 그림은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그의 작품은 ‘보는 것’과 ‘보이는 것’에 대한 관계를 묻는 하나의 회화적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