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자  Seundja Rhee
‘내가_아는_한_어머니’_캔버스에_유채,_130x195㎝,_1962년._[사진_이성자기념사업회]_.jpg
내가 아는 한 어머니   130x195㎝  캔버스에 유채  1962
어릴적 소나무 껍질 먹은 이성자, 섬유 기질 판화로 표현

1950년대의 파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멀고 먼 곳이었다. 파리의 미술학교 그랑드쇼미에르 아카데미, 도무지 한국인이 있을 것이라곤 상상할 수 없는 그곳에 분명 한국 여학생이 한 명 있었다. 그녀는 이성자(1918~2009)였다. 아이 셋을 고국에 두고 온 만학도였다.
이성자는 전남 광양의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본향은 진주다. 이성자가 태어날 무렵 그의 부친은 하동군수를 지냈다. 그리고 김해군수를 거쳐 창녕군수가 되었다. 부친의 임지를 따라 이성자는 어린 시절을 김해, 창녕에서 보냈다.
이성자는 창녕에서 4년을 살았다. 창녕 읍내에서 화왕산은 지척이다. 보통학교에서 군청관사로 돌아오려면 개천을 건너야 했다. 화왕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이 개천이 되어 흘렀다. 찬물에 들어가 큰 돌을 들쳐 가재를 잡았다. 봄에는 창녕사람들이 삐삐라고 부르는 어린 띠를 뽑아 먹었다. 조심스레 껍질을 벗기면 은백색의 털이 달린 부드러운 순이 비집고 나왔다. 생명의 시작인 양 결이 고왔다. 오물오물 씹으면 단맛이 났다. 맥추(麥秋) 직전의 늦봄이나 초여름에는 아직 푸릇한 밀이삭을 태워 먹었다. 목가적인 생활이었다.

생활고에 헌 침대 시트 캔버스로 써
1950년대의 파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멀고 먼 곳이었다. 파리의 미술학교 그랑드쇼미에르 아카데미, 도무지 한국인이 있을 것이라곤 상상할 수 없는 그곳에 분명 한국 여학생이 한 명 있었다. 그녀는 이성자(1918~2009)였다. 아이 셋을 고국에 두고 온 만학도였다.
이성자는 전남 광양의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본향은 진주다. 이성자가 태어날 무렵 그의 부친은 하동군수를 지냈다. 그리고 김해군수를 거쳐 창녕군수가 되었다. 부친의 임지를 따라 이성자는 어린 시절을 김해, 창녕에서 보냈다.
이성자는 창녕에서 4년을 살았다. 창녕 읍내에서 화왕산은 지척이다. 보통학교에서 군청관사로 돌아오려면 개천을 건너야 했다. 화왕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이 개천이 되어 흘렀다. 찬물에 들어가 큰 돌을 들쳐 가재를 잡았다. 봄에는 창녕사람들이 삐삐라고 부르는 어린 띠를 뽑아 먹었다. 조심스레 껍질을 벗기면 은백색의 털이 달린 부드러운 순이 비집고 나왔다. 생명의 시작인 양 결이 고왔다. 오물오물 씹으면 단맛이 났다. 맥추(麥秋) 직전의 늦봄이나 초여름에는 아직 푸릇한 밀이삭을 태워 먹었다. 목가적인 생활이었다.

판화 작업은 그의 회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판화는 여러 색판을 중층적으로 쌓아 올려 작품이 완성된다. 칼의 운용은 붓의 운필보다 어렵다. 자칫 도필(刀筆 잘못 쓴 글씨)이 되기 쉽다. 더구나 이성자의 판목은 단단한 재질이어서 칼이 쉽게 나아가지 않는다. 선을 짧게 가져가야 한다. 1960년이 되자 마치 칼보다 더 강한 끌로 목판 위를 촘촘하게 찍어낸 듯, 캔버스 위에서 유채를 머금은 짧은 선이 중첩되는 그녀의 매력적인 운필이 작업의 특징을 이루었다. 1962년, 어머니 박봉덕의 환갑을 기려 제작한 ‘내가 아는 한 어머니’에서 그러한 특징이 잘 나타난다. 미술을 공부한 지 채 10년이 되기 전에 대가급의 반열에 올라버린 이성자의 원숙한 필세에 고국에 가지 못해 더 안타깝고 절절한 어머니를 향한 마음이 이 작품에 오롯이 녹아있다.
이성자는 성격이 밝고 적극적이었다. 이방인으로 그랑드쇼미에르 아카데미에 다닐 때 교수들에게도 나이 어린 화우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평론가이자 훗날 프랑스 문화성 미술담당관이 되는 질다스 파르델(1906~1997)은 이성자의 작품에 매료되어 그녀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목판화 작업을 권면하여 이성자를 샤르팡티에 화랑에 소개했다.
샤르팡티에 화랑의 대표 레이몽 나셍타는 1964년 이성자의 목판화전을 연다. 카탈로그 제작에 인색한 파리다. 그는 이성자의 전시 카탈로그를 제작해주었다. 그리고 비행기 티켓을 사주며 서울에 가서 한국의 미술계에 카탈로그도 보여주고, 아이들을 만나보고 오라 했다. 1965년, 이성자는 도불 15년 만에 고국의 땅을 다시 밟았다. 세 아들도 만났다. 감개무량했다. 서울대학교 의대의 함춘홀에서 회화 37점, 판화 40점으로 개인전을 개최했다. 한국의 미술계와 전혀 무연한 작가가, 그것도 파리에서 큰 성공을 거둔 작가가 갑자기 서울에 나타났다. 문화계의 충격이었다. 이후 서울의 현대 화랑과 전 세계의 화랑과 미술관에서 수많은 전시를 열었고 찬사를 받았다.
이성자는 한국의 풍토에서 나오기 어려운 거인이었다. 그녀의 자존감은 고결한 품위를 지키게 했다. 자신감은 끝없이 새로움에 도전하게 했다. 이성자는 1968년 남프랑스의 투레트에 아틀리에를 구했다. 2009년 거기서 종신을 맞았다. 회화 1300여점, 판화 1만2000여점, 도자기 500여점을 남겼다. 최선을 다해 삶을 소진했다. 그리고 광양, 김해, 창녕, 진주, 인천, 서울, 파리를 다 버리고 그녀의 후기작업의 주제이자 참된 본향인 우주로 돌아갔다.

황인 미술평론가

이성자_인물사진.jpg

이성자  (1918 ~2009) 
 
■학력
아카데미드라그랑쇼미엘
실천여자대학교 가정학 학사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
 
■수상
2009 보관문화훈장
2001 프랑스정부 예술문화공로자훈장
1999 제7회 KBS 해외동포상
1991 프랑스정부 예술문화공로기사 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