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 Lee, Joon
복사본.png
투영 130x130cm 1962
 ​
이준
 
한국은 이제 세계 미술의 흐름에 있어서 독특한 화가를 갖게 되었다… 20세기의 여러 화기법을 익히고 시도해 보았으며(후기 인상파의 화법으로부터 1960년대의 "하드·?지"에 이르기까지) 최근에는 자기 스스로의 스타일을 찾아 그 속에 한국의 얼을 불어넣기에 성공한 한 화가를!
 
이것은 한국이 서양의 영향을 벗어나서 독특한 표현을 구사할 수 있는 화가에 의한 1990년대를 열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늦은 감은 있지만 시의(時宜)에 적절한 일이라고 하겠다. 불행히도 서울에서 전시회를 갖는 많은 화가들이 아직도 오직 한 가지 "빠리"에서의 수업경력이나 또는 특정한 구라파나 미국화가를 모방하는 따위의 일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 것은 슬픈 일이라 하겠다.
 
1980년 1월의 이 전시를 통해서 우리는 완숙기에 들어선 이준의 감수성과 솜씨있는 한국 화가로서 자기 표현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인 독립의 과정을 볼 수 있다.
 
소장자들과의 교섭관계로 이 전시회에는 이준의 작품 25점만이 전시되었다. 소장품을 아끼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이 소장자들은 그들의 미술사에 대한 책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들이 단순한 소유자일 뿐만 아니라 예술적 천재의 소산인 그림의 보관자라는 점은 이해하는 것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임을 입증하는 또 다른 자질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그들이 롯데 호텔 5층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관람하는 관객들에게 자기 소장의 그림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면 25점의 전시 작품 중 몇 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작품 1번을 "마음의 정원"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은 1979년 늦게 제작한 최근의 그림이다. 이 학장은 이 작품이 삶과, 마당과 그리고 그것을 에워싼 공간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전통적인 한국 건축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속 안마당의 남쪽에 대준이 있고, 그 속에 한지 위에 잘 조화된 색상들로 투사된 작가와 관객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마당의 지적인 구도가 있다.
작가 자신이 이 "마음의 정원"을 작품 1번으로 한 것을 보면 이 그림이 작가가 좋아하는 작품의 하나라고 추측되여 충분히 그러리라고 수긍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준의 예술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법의 진수를 볼 수 있다. 이 작품의 독특함을 음미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가 거쳐온 세 개의 기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양 사람들은 작가의 정신이나 기법의 발전과정을 분석하기를 좋아하는데 이 전시회에서 우리는 그의 네 가지 다른 화풍 또는 기법들을 분명히 인지할 수 있고 또 그것을 각기 연대순으로 분류할 수 있다. 4년에 걸쳐 프랑스의 인상파, 후기 인상파, 그리고 훠미즘의 기법들의 훈련을 쌓은 후 1942년에 이 작가는 동경의 태평양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그리하여 그는 "모네", "고갱", 그리고 "마티스"의 만기법을 잘 구사할 수 있었다. 귀국했을 때는 그는 물론 그의 회화의 첫째 단계에 있었는데 그의 작품 24면 "월야"(1965년)에서 우리는 그 경향을 볼 수 있다.
 
또 이 화백은 로라에 다른 색깔의 물감을 묻혀서 사용하는 "하드·?지"를 시작했는데 그 자신은 "하드·?지" 작품을 처음 시작한 것은 1969년이었다고 한다. 처음에 그는 3인치로부터 1자 또는 그 이상되는 여러 가지 다른 크기의 로라를 사용했고, 그림의 필감을 살리기 위하여 붓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의 발전의 이 단계는 작품 20번 "하늘"에서 볼 수 있는데 그는 이 스타일을 태평양 위에 아른거리는 빛에서 착상한 작품 15번 "빛"을 제작한 1970년까지 계속 하였다. 작품 13번 "연"을 제작한 1976년까지 이 화백은 질감을 살리기 위한 붓을 사용하는 마무리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1977년과 1978년에 이르러서는 로라만을 사용하여 완전히 추상적인 기하학적 형태를 표현한 제 삼의 단계에 이르렀다. 네 번째로 그리고 현재 그가 시도하고 있는 기법은 아직 그 자신이 이름짓지 않았는데 아직도 사물을 명백히 하기 위하여 이름이나 분류를 하는 습관에 젖은 서양 사람인 나는 작가 자신이 스스로 원하는 이름을 붙일 때까지 이 단계를 "이화백의 날과 씨"(얼기설기한 피륙의 짜임새)기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화풍은 1978년에 시작했는데 1977, 78년의 "하드·?지" 추상화들의 발전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 방법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처럼 보이며 그는 점차 이 계령의 작품들에 치중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는 이미 언급한 다른 새 화풍으로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화백 자신이 이 스타일이 세계미술과 한국의 전통적인 느낌의 기본적인 것들을 잘 융화시킨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방법이 이화백에게 독특하게 한국적인 그러면서도 서양의 영향도 거부하지 않는 화가가 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하나의 성숙한 화가로서 그리고 한국사람으로서 이화백은 그의 느낌들을 표현하고 싶어한다. 그는 그의 나라와 서양을 함께 잘 알며 이화대학교 미술대학의 책임을 맡고 있으면서 오후시간들을 주로 스튜디오에서 주위 환경의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자신의 반성을 캔버스에 표현하기를 즐긴다.
 
이 새로운 "날과 씨"기법은 "말"을 통해서 보는 것처럼 그의 한국적인것, 동양의 완곡한 아름다움은 표출케 하여 그럼으로써 작가의 감각을 통하여 전달되는 섬세한 대나무의 음영을 나타내 준다.
 
이화백은 이 새로운 기법에 대한 잠정적인 시도를 벌써 1968년에 시작했고 10년이 넘은 지금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소화하였다. 아직 이름지어지지 않는 이 방법은 초청장 겉장의 "깊은 못"이라고 불리우는 그림에서 볼 수 있다.
 
이화백은 약간 출렁이는 듯 하는 한지의 질감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이 종이의 특성을 살려서 작품을 한다고 한다. 화가는 항상 사물을 보거나 느끼는데 있어서 보통 사람보다 예리하며 그는 이 세상의 사물을 일반 대중이나 장사꾼들이 도저히 볼 수 없는 방법으로 본다. 그러면 작품 7번 "소란"을 생각해 보자. 이 작품은 1978년 예술원상을 받은 작품인데 포항제철 공장을 방문했을 때 화가가 녹은 쇠들이 운반되고 처리되는 과정을 보고 가혹한 기계적 잔인성, 또는 제철공장 내부의 넓은 공간에서 강철을 운반하는 거대한 자동 기계의 현실성 등에서 착상한 작품이다. 보는 사람의 목소리는 소음 속에 흡수되고 넓은 구내 한쪽가의 작은 통로에 서서 무시무시한 소음을 내며 강철을 만드는 과정을 바라보며 그는 위축됨을 느낀다.
 
화가 자신은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으로, 호암 미술관에 수장되어 전시에 포함시키지 못하는 초청장 겉장의 그림 "깊은 못"과 작품 1, 2번을 지적하였다. 작품 1번 "마음의 정원"은 이미 보았고 1979년에 그린 "산·달 그리고 그림자들"이라고 이름지은 작품 2번을 보자. 이것은 5개월에 걸친 시화(詩化)된 기하(幾何)의 결산이다. 주어진 주제에 대해 완전히 표현했다고 느끼면 그것을 그는 "완성"됐다고 얘기하며 그 특정한 구성은 다시 생각하지 않는다.
 
보통 그는 여러 개의 작품을 한꺼번에 제작한다.이화백은 그가 바라는 것은 자연의 "이미지"나 그의 환경에 대한 동양적인 반응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화장실에 걸려 있는 목 수건에서 착상한 작품 6번에서처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의 어떤 흔한 물체로부터도 그는 아름다움을 창조해 낸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노란 형태들의 유희가 되었고, 한편 작품 17번은 "해돋이"에서 착상한 것인데 한국의 동해바다 너머로 솟거나 "호노루루"의 "다이아몬드 헤드"(호노루루 시내에 있는 산봉우리) 너머로 솟아오르는 해돋이가 아닌 그가 보아온 수많은 해돋이에서 받은 인상들이 하나의 회화적인 표현으로 나타난 것이다.
 
작품 8번은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의 하나인데 그의 새로운 "날과 씨" 기법으로 된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질감을 지닌 작품이다.
한지 위에 그린 이 작품은 "산과 강"이라 이름 붙여졌고 작가는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하여 두달 여에 걸쳐서 "쌀"을 통해 수많은 산봉우리와 그림자들, 그리고 푸른 강물을 수없이 보고 느끼고 관찰했다고 한다"아름다운 산"이라 이름 붙여진 그의 작품 5번이 아직도 그가 주로 "하드·?지"화가였던 1979년 초에 그려졌다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며, 우리는 그려진 산들에서 유리의 날카로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가 수많은 산들을 한국 "쌀"을 통해서 관찰하고 그린 같은 해 후기의 작품 8번에서는 같은 화제(畵題)를 다루는 그의 솜씨가 훨씬 부드러워졌음을 볼 수 있다.
이들 최근 경향의 작품들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비교적 제작 시간이 덜 걸리는 것 같은데 그것은 그가 이미 사물에 대한 진수를 잘터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의 독특한 화법을 이룩했고 그리고 그것은 그의 한국미술사에 대한 공헌이 될 것이다.

출처 :  철학박사 죤·코벨

이준_인물사진.jpg
이준 (1919- 2021)

 
학력
~1942 태평양미술학교
 
■경력
2009~2012 국민원로회의 위원
2005~2007 제32대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2003~2005 제31대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2003 한국메세나협의회 이사
2003~2007 서울평화상 심사위원
1997 세종문화상 심사위원회 미술부문 위원장
1995 제1회 광주비엔날레 고문
1988 제24회 서울 올림픽 세계현대미술제 운영위원장
1987~1991 홍익대학교 대학원 강사
1986~1989 예술의전당 이사
1986 한국미술협회 회장
1984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문화예술 전문위원
1982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미술분과위원회 위원장
1981 문화공보부 정책자문위원
1981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75~1981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학장
1954~1984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1951~1953 숙명여자고등학교 교사
1946~1949 마산상업고등학교 교사
 
■수상
1995 은관문화훈장
1987 제36회 서울특별시 문화상
1986 예총예술문화상 미술부문 공로상
1984 서울특별시 교육공로패
1983 제28회 대한민국 예술원상
1978 제19회 3.1 문화상
1978 제27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초대작가상
1976 국민훈장동백장
1959 제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특선
1958 제7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특선
1957 제6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특선
1956 제5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특선
1953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대통령상
1951 대한미술협회 전시미술전 서울특별시장상
1947 조선종합미술전 문교부장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