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엽
예술이 비탄에 빠진 자를 거기서 건져내기는 커녕, 더욱 더 비탄 속으로 끌어들인다는 이유로 해서 플라톤은 예술에 대해 호된 질책을 가한 바 있다. 예술이 생활의 곤궁이나 절망에 대한 구제의 수단이 될 수 있느냐에 항상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일단 한번쯤은 거기에서 기쁨에 대한 원망의 숨통을 열어볼 일이다. 화가 황유엽에 있어서도 예술은 구원에의 기대와 념(念)이 걸린 길이며 삶의 보람이 얹혀진 생활의 절대적인 명제일 것이다. 그것은 그가 가족을 북에 두고 온 이른바 「이산가족」이라는 특수한 그의 환경을 염두에 두면 쉽사리 이해될 수 있는 사실이다.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는 거치른 마티엘 위에 굵은 터치로 부각되어 나오는 일그러진 현상 의 인물과 동물들이 하나의 친화관계를 이루면서 그의 작품은 진득한 삶의 애환을 들어낸 다. 그는 특히 소를 즐겨 그리는 화가로서 그의 작품 가운데 주제로서등장하는 소들은 그 야말로 한국적인 정의에 차 있는 이 땅의 농우상(農牛像)이다.
인종의 땀에 쩔고 인간에 대 한 신뢰로 응어리진 그러한 소의 모습이다. 난폭한 야수의 습성으로 길들어져 투우장에서 인간과 피의 대결을 벌이는 소, 또는 신성동물로떠받들어진 나머지 거들먹거리며 게으름피 는 이국적인 소의 생태 그 어느 언저리에도 접근할 수 없는 이 땅의 순하다 순한 소의 모습 이다. 작가는 자신의 실존의 모습을 하나하나 확인이라도 해 나가듯 그것을 그리고 있다.
전체적인 작가의 작풍은 표현파적인 주정적 세계에 머물고 있는데 색채나 형상 모두가 거 치른 마티엘에 익몰되듯 숨가쁜 리듬에 차 있다. 때로는 야수파류의 광기가 번득이기도 하 지만 그의 체질의 생래적인 차분함이 화면 구석구석을 여과시키기도 한다. 그가 몸을 담고 있는 < 구상회(具象會) >의 이념 자체가 그러하듯 작가도 항시 토속적인데서 그의 예술의 실 마리를 구하고 있다.
출처 : 김인환(미술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