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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로의 작품세계

글: 신항섭

‌겸재예찬MII225 60X72CM 마포위에 아크릴 철분 2002

겸재예찬으로 새로운 추상세계를 창조한 윤명로 화백

‌글: 신항섭(미술평론가)

윤명로, 그는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유산을 이룬 선인들, 특히 이름없는 미술가들의 슬기를 캐내는 광부와 같다.
그의 평면작업은 그 초기단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같은 전제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흔한 말로 “전통의 재현”이란 표현에는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전통”이라든가 “재현”이라고 하는 어의 자체가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곡해되고도 있거니와 그 자신의 작업이 실제로 그같은 문제와는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작품에 빌어다 쓰는 명제가 지나간 사실, 또는 그 흔적을 가리키는 단어라는 판단은 잘못되고 위험스런 일이다.
그러기에 이 같은 일반적인 오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품생활의 초기에 즐겨 쓰던 명제들, 일테면 “석기시대” “동기시대” “출토”등 자칫 전통의 문제도 제기되기 십상인 고풍스런 단어를 떼어 내던진 것이다.
작품명제가 안고 있는, 다시 말하면 단어 자체가 지닌 언어의 의미성으로 작품 전체를 파악하려는 태도를 그로선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작품은 그 같은 명제로부터 이해의 접근점을 유도하고는 있지만 접근방법이 쉬운 만큼 거기엔 커다란 함정이 있다. 작품의 진실은 명제가 시사하는 외형에 있지 않고 보다 깊은 내면에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여기서 말하는 “광맥”이란 그의 창작활동에 있어서 방법론상의 구체적인 대상으로 파악되며, “광부”란 미답의 표현을 찾아내려는 윤명로 자신의 작가적인 입장을 뜻한다. 따라서 ‘캔버스’에서 일체의 허구성이 부정당한 뒤부터 “‘캔버스’의 진실성을 추구 한다”는 이른바 회화에 있어서의 새로운 방법론의 전개는 바로 윤명로 자신의 작가적인 의지와 상통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것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밝혀진 방법이 아니어야 한다는 창작의 윤리성에 동조함으로써 어차피 윤명로적인 방법의 발상을 기대하고 또 믿게 하고 있다.
여기에 결과한 것이 언급한 대로, “이름 없는 선인들의 기를 캐내는 작업임과 동시에 그것은 또 평면이라는 이미 주어진 질서에 따르는 일인 것이다.”
여기에서 선인들의 “슬기”라 함은 일차적으로 창작행위를 뜻함이며 그 행위를 통해 순화된 예술성의 은유이다.
그러한 예술품을 만드는 과정, 또는 정신생활을 오늘의 자기적 방법으로 변용함으로써 선인들이 도달한 만큼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겠다.
시공을 문제 삼지 않는 초월개념이 예술성의 바탕을 이룰진대 그 옛사람들의 무심한 방법의 터득이야말로 자기만의 세계에 닿는 지름길일 것이다.
그들의 방법을 터득하기 위한 오늘의 행위는 한 작가로서의 창작의지에 응집되고 있음으로써 엄연히 모방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오늘 그의 방법 속에서 “옛적”이라는 어떤 물증을 제시할 만한 점도 검출되지 않음으로써 더욱 그러하다.
그러면 과연 무엇으로 하여금 그가 옛 사람들의 자취를 탐하고 있음을 설명하도록 할 것인가. 73년도를 기점으로 하는 일련의 “균열” ‘시리즈’를 보아서는 답변키 난감하다.
“균열”이란 명제도 그럴뿐더러 말짱한 ‘캔버스’위에 적당히 흰 물감이나 칠해대는 행위에서, 그 결과에서 “옛적”인 맛은 전혀 찾아낼 수 없으니 말이다.
굳이 “예스럽다”라는 말에 어울릴 표현이 있다면 마치 오랜 세월의 자취라고나 하듯이 물감이 마르면서 생기는 갈라터짐, 즉 “균열”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 “갈라터짐”을 무위적인 것으로 볼 때 선인들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공통된 특징인 자연스러움, 즉 인위적인 꾸밈 대신, 자연의 질서에 따르는 듯한 동화현상에다 직접 대입시키는 것은 어떨까?
물론 이 과정상에서 드러나는 모순, 또는 억지스러움은 평면적인 사고방식으로야 이해되기 어려운 것이나, 자연의 질서를 물질 자체에 부여된 생성력으로 생각할 때 논리의 돌파구가 열린다.
이럴 경우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균열”의 의미성은 선인들의 소박한 예술적 의지가 자연에의 동화현상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에서 훨쓴 소급되어 보다 본질적인 문제, 바꿔 말하면 자연물질의 생성력을 환기 시키는 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윤명로가 “균열” ‘시리즈’를 통해 밝혀온 방법상의 비밀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상기한 선인들의 자연관 또는 예술관의 선택적인 해석과 이해가 뒷받침되고 있음으로써 오늘의 방법이 비롯된 것이겠다.
그가 10여년 가까이 문제 삼아 온 소위, “균열”이란 명제 의 연작들은 한결같이 흰색에 의존하고 있다. 더불어 하나같이 갈라터진 균열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또한 그 균열된 사이로 ‘캔버스’의 살갗이 노출됨으로써 강한 야취를 풍긴다. 이같은 화포의 신체성을 직면케 되는 우리는 “볼장 다 봤다”는 허탈감에 몰리면서도 “무얼 나타내고자 했을까”하는 의문에 다시금 사로잡히게 한다.
그러나 역시 우리의 시야에 건져지는 것은 백색의 막막함 뿐이고, 기껏해야 갈라터진 물감 사이로 드러내는 ‘캔버스’의 맨살뿐이다. 스무 번, 백번을 되풀이해서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곧 그의 백색 그림이 어떤 형체의 ‘이미지’화가 아닌 까닭이다.
그러면서도 전개되어온 과정을 보면 그 나름대로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음을 알게 된다. 가령 회랑식 장방형의 선을 만들었다든지, 커다란 점의 띠를 이루어갔다든지, 아니면 사선을 의식하고 있다든지......등 백색 바탕위에 펼쳐지는 갖가지 모양이 엿보인다.
그럼에도 역시 이들 모양을 일부러 표현하려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백색 바탕과 ‘캔버스’의 맨살이 드러나는 균열의 표정이 강렬한 나머지 이 같은 모양들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더구나 개개의 작품으로 보아선 이같은 표정조차 간취하기 힘들다. 그것은 역시 작품의 주된 개념이 형상성에 있지 않은 까닭이다.
그의 작품에 나타난 표정들은 단조로운 작업방식에서 얻을 수 있는 잔재미일 것이며, 우리들에게도 얼마간 보는 즐거움을 줄 것이다. 물론 그 자체가 작품의 성격이 되지는 못하지만 이해를 돕는 친화의 역할은 해낼 수 있으리라.
어찌 보면 그의 균열들은 갑골문자적인 언어성이 감지되기도 하는 데, 이 역시 직접적인 관련은 없고 다만 그의 단아한 작업방식에서 문취를 짐작케 할 따름이다.
색체는 물론이려니와 자분자분한 붓자국에 짙은 인식의 그림자가 배어 있음을 깨닫게 한다. 붓과 그 자신과의 은밀한 대화를 통한 행위의 정확성은 필시 자기성찰을 동반한데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기성찰은 곧 자아의식일 테며, 이는 언어충동을 유발한다는 문화의 단계적 현상으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