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인 Park, Myung In

전 한국일보사 차장, 한국미술연구학회 연구위원, 논문집 발간 편집위원·편집주간·논문 2회 발표
한국일보 백상미술관 큐레이터(겸직), 아라아트센터 관장, 오산시 미술품심의위원, 장애인문화예술대상 심사위원·심사위원장, 한국녹색미술회 자문위원·미술대상 3회 심사, 대한민국미술대전 비구상부문 심사분과위원장, 한국미술협회 학술 평론분과 위원장
< 현재 >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한국문화예술인단체총연합회(예총) 대의원, 서울미술협회 고문, 한국미술국제교류협회 자문위원, 한국미학연구소 대표
장편소설 「화가의 여자」, 「화가와 모델」 발행

미학이론

창조/창조성 creation/creativity
Ⅰ 정의와 창조성의 위상
보다 높은 가치실현을 지향하고 소여(所與, 사유에 의하여 가공되지 않은 직접적인 의식내용)의 현실에 제의하고, 그것을 변화해가는 역동적인 현상(現象, 본질이나 본체의 바깥으로 나타나는 상). 그 때 창조(creativity)란 이 지향성을 보이는 현상 일반을 말한다. 따라서 좁은 의미로 창조는 산출활동(産出活動)이라고 할 수 있지만, 넓은 의미로는 산출 주체인 사람도 그 소산도 창조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술은 창작으로부터 감상자에게 이르는 모든 위상이 창조성에 의해 채색된 전형적인 현상이다. 다시 말해 작품의 산출은 물론 그 작품 자체도 창조적이다. 예술작품은 단지 창조활동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할뿐만 아니라, 그것 자체가 만들어진 후에도 보다 높은 가치를 실현하려고 하는 지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작품이 생물과 같이 저절로 모습을 바꾸어 가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작품의 창조성은 실제로 감상자의 해석을 통해서 발휘되는 특질이다. 작품은 가장 뛰어난 본연의 자세를 내보일 것을 요구하고 그러한 해석을 요청하는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 창작-작품-해석의 세 가지 국면을 창조성이 꾀하고 있다는 사상은 이탈리아 미학자 L·팔레이존(Luigi·Pareyson, 1918)이 전개하고 있던 것이며, 그는 이 창조성을 ‘형성성(形成性 formatività’이라고 부르고 있다.
앞에서 가리킨 정의에서 ‘보다 높은 가치‘라는 것은 창조성에 관해서는 항상 ‘보다 높은 가치’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해도 ‘보다 높은 가치’는 무엇인가의 의미에서 새롭다고 할 수 있다. 어떻든 간에 이것은 상대적인 규정이며 이 상대성은 창조성의 개념에서 어떤 애매함을 초래한다. 다시 말해 실현되는 것을 비교함으로써 ‘보다 높은 가치’가 인간에 의해 개념의 실질성이 크게 변화한다. 일반사람들에 있어서는 흔한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만, 특정한 개인에 있어서는 창조적이라고 하는 것일 수 있다. 이것은 특히 성장 과정에 있는 어린이의 경우에 현저해서 교육학적인 개념으로서의 창조성에 있어서 중시되는 사고방식이다.
그러면 일반적인 관점에 있어서 창조적이라고 보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당연히 문화의 현상(現狀, 현재의 상태)에 있어서 예전에 없던 가치를 실현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시대의 경과와 함께 초극(超克, 난관을 극복함)되어 가는 것이며, 인간적인 현상(現象)에서는 상대성이 항상 따라다닌다. 이것에 대해 절대적인 가치로서의 존재를 실현하는 신의 창조(허무로부터의 창조)를 규정하게 된다. 이 신의 창조는 모두에서 기술한 정의는 아니지만, 일종의 이론적 한계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창조에서도 끊임없이 넘을 수 있는 것 같아도 넘을 수 없는 어떤 절대적인 성격을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술에 있어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예술이 진보개념으로 친숙해지지 않는 것은, 근세의 신구논쟁이 남긴 인식이다. 세상사는 시간과 함께 사라져 가지만 훌륭한 예술작품은 사라지지 않는다. 훌륭한 예술작품은 사라진 적이 없다. 이것은 결코 그 이전 예술의 본연의 자세를 초월했다는 의미에서의 가치는 아니다. 그러면 반드시 다음 시대에 의해 초극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실제로 여전히 신선함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 신선함, 혹은 가치는 시대적인 상대성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절대적인 척도에서의 적합으로부터 생긴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척도 혹은 기준일지는 창조를 생각할 때 중요한 논점이 된다. 그러므로 창조성의 단계로서 ① 특정 개인에 관계되는 주관적인 창조성, ② 객관적으로 초월할 수 있는 상대적인 창조성, ③ 인간적인 척도에 있어서 절대적인 창조성, 그리고 ④ 신적인 절대적 창조성으로 구별할 수 있다. 여기에서 예술 창조성으로 문제되는 것은 제3의 인간적·절대적 창조성이지만, 다른 제 3자도 이론상으로 비교하여 고찰하면서 참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같은 예술개념에 있어서 창조는 모방과 대비에서 이야기된다. 창조의 반대개념으로는 모방이지만 그렇다고 예술론의 고전적 이론으로서의 자연모방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자연모방에 있어서 창조적인 것은 결코 모순이 아니다. 그러나 충실한 자연모방과 비교해서 공상적인 형상을 그리는 것은 보다 창조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자연 모방설을 공상 면으로부터 수정하는 움직임은 이미 고대 말기에 드러나고 있었다. 이 경향에 대해서는 필로스트라토스(Philostratos, 2-3C) 이름으로 거론되는 것이 통례이다.〈Cf,Tatarkiewicz, History of Aesthetics, I, 285, pp. 297-98 헬레니즘 시대의 바로크적인 취미 경향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유력한 사조(思潮, 사상의 흐름. 한 시대의 사상의 일반적인 경향)가 되는 것은 역시 르네상스 이후이다. 선구적인 지표가 되는 것은 15세기의 철학자 니콜라우스·쿠자누스(Nicolaus Cusanue, 1401-64)의 생각으로서 스푼과 같은 도구를 고안하는 것은 자연을 모방하는 예술 이상인 것이다. 스푼의 형은 자연에는 없고, 정신의 아이디어를 모델로 하는 것이며 그 점에서 그 고안은 ‘무한한 기량 art infinita’에 가깝다는 것이다.〈Nicolaus Cusanue, Idiota de mente, cap, II; Cf. Tatarkiewicz, idid., III, p. 64-65〉
이것은 이미 인간의 정신이 신으로 착각하는 생산력을 가진다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서 그 연장선상에서 예술가를 ‘이미 한 사람의 신 alter deus’라고 보는 개념이다. 그리고 인간의 창작력을 강조한 근대적인 개념이 ‘천재’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것들의 고찰은 창조개념을 제시해서 파고든 것은 아니다. 창작의 실태에 관한 고찰은 후에 저촉되는 수사학(修辭學, 독자에게 감동을 주기 위하여 문장, 사상,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언어수단의 선택과 그 이용수법을 연구하는 학문)에 있어서의 고전적인 모델을 제외한다면 아마 금세기가 되어서 드디어 시작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특히 오늘날 창조성의 개념이 친근해지고 있는 것은 금세기 후반, 미국에서 전개된 심리학과 교육학의 연구가 크게 공헌하고 있다.
그것은 때 마침의 실존주의 철학의 융성으로 인해 자기실현으로서의 창조성을 강조한 것이며 창조를 천재의 예외적으로 초절적(超絶的, 절대로 넘지 못하는 한계를 사이에 두고 존재하는 일, 특히 신과 사람의 한계에서 세계에 대한 신의 초월적 존재의 뜻)인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일상적인 행동 안에서 편재(遍在, 두루 퍼져 있음)하는 창조적 계기(주관적 창조성)를 지적하면서 특히 사고의 창조성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창조성은 심리학적 구조론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심리학적 창조성 개념은 창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규정되고 있다. 그리고 창조의 어떠한 측면에 주목할 것인가에 따라 이론의 성격이 크게 좌우된다. 그 유형으로서는 심리학적 개념과 구조론적 개념을 구별할 수 있다. 우선 전자는 창조 과정에 있어서의 심리현상에 특이한 점을 인정하는 사고방식이다. 고래(古來, 옛날부터 현재까지)의 영감설(靈感說)이나 그것을 계승한 천재설에는 이 경향이 현저하게 인정을 받는다. 이 입장은 창조적 심리의 특이성을 강조하고, 창조의 주체를 ‘이상(異常)’한 것, 정신병자에 가깝게 보는 견해를 조장(助長, 도와서 자라나게 한다는 뜻으로 조급히 키우려고 무리하게 힘들여 오히려 망친다는 경계의 뜻)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금세기에 와서도 활발히 전개된 심리학은 오히려 창조를 인간에 있어서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보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창조적 심리를 창작과정의 수반현상(隨伴現象)이 아니라, 창조의 조건으로서 성격 형성을 보이고 있지만, 일례를 든다면 E·프럼(Erich·fromm, 1900-94)은 다음 다섯 가지를 창조성의 조건으로 거론하고 있다.〈The Creativity, pp. 48-68〉
ⓛ 의문을 가지는 능력, ② 집중력, ③‘나’의 감각, ④ 갈등과 긴장을 받아들이는 힘, ⑤ 매일 다시 태어나려고 하는 의지이다. 이 조건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것은 바로 어떤 적극적인 ‘태도’이며 창조조건일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교육의 지침이 될 수도 있는 유효성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태도’가 즉시 어떠한 창조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구조론으로도 이 사고방식의 ‘조건’은 변함없다. 예를 들면, R·메이(Rollo·May, 1909-)는 ‘창조적 과정’으로 ‘만남’과 그 ‘강함’, 그리고 그것이 ‘세계와의 상호적 관계를 맺게’되는 세 가지를 거론하고 있지만 이것은 결국 어떤 종류의 만남에 의해 창조성을 규정하는 것이다. 〈The Nature of Creativity, pp. 58-68〉
이것도 또한 주관성의 차원을 넘는 규정이 아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구조론은 제작과의 차이를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구조론의 고전은 수사학에 있어서의 변론작성의 프로그램이며 이것은 창작론의 유일한 고전적 이론이다. 고대 말기에 성립하고 있었던 이 프로그램에 의하면 변론의 작성은 다섯 단계로 구성된다. ① 구상(構想) inventio, ② 배열(배列) dispositio, ③ 조사(措辭) elocutio, ④ 기억(記憶) memoria, ⑤ 연출(演出) actio가 그것이다. 이 중 최후의 ④와 ⑤는 특유한 구두변론(口頭辯論)이며 문장의 작성은 처음의 ①과 ②와 ③의 단계에서 완결한다. 이 세 가지 중 창조적인 계기는 최초적인 ‘구상(構想)’의 단계에 집약되고 있다. 이것은 영감(靈感)의 사상(思想)과 즉응(卽應)하는 것이지만, 이것만으로는 스푼과 같은 물체의 고안과 예술작품의 창작과의 차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현대의 고전적인 이론이 된 발라스(Graham·Wallas, 1958-1932)의 4단계설에는 ① 준비기간 preparation, ② 회태(懷胎)기간 incubation, ③ 조명 illumination, ④ 검증 verification이 구별되고 있다. 〈The Art of thinking, 1926〉
이것은 실제 착상에 이르는 전 단계를 두 가지로 설정하고, 구상의 현실을 설명하려고 한 것이지만, 그 전 단계는 결국 창조의 조건과 같은 것이며, 창조의 실태에 육박했다고 하기에는 좀 멀기 때문에 창조의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창조에 있어서의 신학적 개념과 인간학적 개념
인간의 창조 활동에 관한 사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신의 창조를 모델로 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인간의 한계를 전제로 하는 사고방식이다. 신의 창조의 특색으로서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것은 허무로부터의 창조라는 무전제적인 창조다. 인간은 신의 창조를 모델로 할 수 없으며 어떠한 소재를 전제로 해서 처음으로 창조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허무로부터의 창조가 가능한가 라고 근거를 물으면 그것은 신의 전지전능이라는 속성에 있는 것이고 여기에는 신의 창조를 인간의 창조모델로 하는 단서가 된다. 말하자면, 전지전능이기 때문에 신의 창조는 모든 가능한 세계를 비교하고, 최선의 선택에 의한 세계를 정확하게 실현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론적으로 보면 그 성격상 과정이 없기 때문에 이 창조는 순시(瞬時, 극히 짧은 시간)에 행해진다. 〈『창세기』에서는 창조는 6일간 걸린다고 하지만, 그것은 유대교가 오랜 신화적 사고법의 반영으로 보는 것이며 이론적으로 연역(演繹, 일반적인 명제나 진리를 전제로 하여 보다 특수하고 개별적인 명제나 진리를 이끌어 내는 추리경험을 필요로 하지 아니하는 순수한 사유에 의하여 이루어지며, 그 전형은 삼단 논법)되는 테제(원래는 하나의 계기를 뜻하는 헤겔철학의 용어로, 정립이라고 번역되는 말)의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신의 창조성은 가능한 세계의 가치평가 국면에 집약되게 된다. 이것은 인간의 창조활동에도 적용할 수 있는 사고방식이며, 전술한 수사학적인 프로그램을 전형으로 서양의 전통적인 창작관(創作觀)을 유지해 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신학적 개념에 따라 인간의 창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처음의 구상에 있으며 그 후의 과정은 그 구상이 충실한 현실화에 지나지 않고, 그것 자체로서 적극적인 의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게 된다.
이것에 대한 인간학적 개념은 당연한 것이면서 인간의 지력, 실현력의 유한성을 근저로 하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지력(知力)은 유한한 것이지만, 남에게는 신과 같이 모든 가능성을 전망할 수는 없고 각각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그 전모를 미리 포착할 수도 없다. 그리고 실현하는 힘의 한계는 구상을 한정하는 요인으로서도 기능한다. 그렇게 되면 사람의 창조성은 오히려 이 유한성을 적극적인 요인으로 전화(轉化)하는 것에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보통 장인이 만드는 도구와 같은 것은 만드는 방법의 처방에 충실하게 따라간다. 프로그램으로 보면 그것은 신학적 개념의 유형에 속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단순한 제작영역을 넘지 않는다. 이것에 대하여 창조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처음의 설계도와 정식화된 처방전에 따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예상을 넘는 무엇인가를 실현하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제작의 대상은 정확한 설계도를 쓸 수 있는 것인데도 교환, 창조의 대상은 그 자체를 실현하는 것보다 설계도나 말에 의한 기술에 의해 그것을 표현하는 수단이 없는 것이다. 구상과 실현의 사이의 이 지연은 인간의 능력의 유한성에 다시 말하면 육체의 개재(介在)에 유래하는 것이며 사람의 창조에 있어서 본질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창조에 관한 인간학적 개념은 이 점을 부정적 계기로서가 아니라 적극적인 요인으로서 포착하는 사고방식이다.
창조에 있어서 두뇌의 창조와 손의 창조라는 두 개념은 인간의 창조활동에서 두뇌에 대부분 맡겨져 있는 것과 손의 역할이 크다는 유형적인 구분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학자나 발명가의 일은 대부분 두뇌만으로 경영되고 있다고 생각되고, 반대로 특히 조형미술가의 제작과정의 대부분은 손에 의해 옮겨지고 있다. 음악의 경우에는 이 두 가지 일이 분업의 형으로 작곡가의 두뇌와 연주가의 손이 더불어 음악예술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창조에서 이론적으로 보아 해명이 충분한 것은 머리의 창조이다. 왜냐하면, 손의 창조는 머리와 손의 두 가지 계기가 존재하고 그 양자의 관계에서 설명 가능성이 보이지만 무의식적인 준비-회태(懷胎, 잉태)의 단계를 인정한다고 착상 바로 그것은 일거에 그 나름대로 여전히 신비한 채로 남겨져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두뇌의 창조, 창조적인 사고(思考)에 관한 이론에서 일종의 피드백의 메커니즘을 지적할 생각이 존재하는 것이다. ‘창조적 사고(創造的思考)’즉 단적인 두뇌의 창조를 몇몇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정의를 제출하고 있다.
‘창조적 활동은 단지 새로움, 비인습성, 지속성, 그리고 과제의 정식 표현화에서의 곤란을 특색으로 하는 특정 클래스의 문제해결의 활동이라고 생각 된다’. 창조적 사고라고는 ‘문제해결 problemsolving’의 하나의 형태이며, 어떤 과제에 대해서 그 곤란을 해소하는 활동이다. 보통은 해결해야 할 과제가 미리 주어져 있다. 그러나 그들은 창조적 사고의 최후의 특색으로서 이 점을 부정한다. 다시 말해 당초 나타난 과제는 막연하게 정확히 규정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과제에 대해 정식표현을 하는 것이 일부분이 된 것이다. 해결과 함께 문제가 처음으로 명확히 자각되는 종류의 문제해결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통상 인간의 지력(知力)에서는 명료하게 포착할 수 없는 과제여도 그 예감은 존재하고 시간을 들여서(=지속성)탐구함으로써 해결이라는 형에서 반대로 그 문제를 인식한다는 현상이 있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이러한 지연 혹은 전망이 좋지 않은 현상은 순수한 지성 현상이 아닌 육체와 결합한 지성의 현상이다. 말하자면, 머리의 창조도 이미 손의 창조와 같은 메커니즘을 분유(分有, 나누어 가짐)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손의 창조를 기본적 메커니즘으로 대표하는 것은 기술이다. 어떤 기술을 습득하는 것은 당분간 ‘주관적 창조’에 지나지 않지만, 방금 확인한 성격을 분명히 내보이고 있다. 기술이란 육체의 어떤 제어시스템이지만 그 습득과정은 한 번에 거행하는 것이 아니라, 시행착오의 모방을 통해서 조금씩 신체로 기억되어 간다. 목표로 여겨지는 동작은 명료하다. 예를 들면, 연필을 주머니칼로 깎을 경우, 요구되는 결과는 이미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과는 달리 신체적 인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 있다. 연필을 매끄럽게 깎을 수 있게 되고, 처음으로 이해되는 어떤‘느낌’이 존재한다. 이 시간이 걸리는 과정은 신체라고 하는 관성의 조직에 유래한다. 신체는 몸으로 움직임을 되풀이하는 것이며 그 개변(改變, 고치어 바꿈)은 조금씩 부분적인 수정을 거듭해 가는 것에 의해 처음으로 가능하게 된다. 신체의 이 구조는 위너(Nobert Wiener, 1894-1964)가 발견한 ‘피드백’의 메커니즘에 있다. ‘피드백’의 원리란 자신의 행동결과를 조사하고 그 결과의 선악으로 미래의 행동을 수정하는 것을 의미한다.〈N·Wiener 『인간기계론』71pp〉
여기에서 중요한 의심이 제기될 것이다. 피드백은 기술 이전의 간단한 동작을 이미 지배하고 있다. 눈앞에 있는 물건을 손에 들 때도 눈으로부터의 정보 피드백에 의해 손의 움직임을 제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동작은 신체에 처음부터 갖추어진 기본적 능력이지만 기술이란 노력에 의해 습득해야 할 능력이다. 기술은 자연상태에는 존재하지 않는 보다 고도의 목표로부터 요청되어 온다. 피드백에 의한 설명은 이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아무리 고도의 기술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에게는 기본능력의 조합과 적용 이외에 다른 수단은 없다. 특히 그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신체에 축적되어 가는 것은 중요하다. 여기에 성장과 발전의 기초가 있기 때문이다. 기술은 이미 주관적으로는 창조성의 현상이라고 보아도 좋다.
그러면 그 한계를 더욱 돌파할 가능성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여기에서도 과제-해결의 관계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 기술의 경우 해결해야 할 문제는 확실히 처음부터 명료하게 선택되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에 달했을 때 처음에 가지고 있었던 과제의 인식과는 별종의 인식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언어적으로는 전할 수 없는 신체적인 인식이다. 예를 들면 ‘연필을 깎는다는 것이 이러한 것이었던가”라고 하는 확신이다. 이것은 해결에 의해 처음으로 과제가 인식되는 구조를 이미 나타내고 있다. 기술의 창조성이 가지는 이 주관적 한계를 더욱 한층 넘을 가능성은 결과로서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인식이 주관적인 느낌이 아니고 작품에서 결정하고 있는 것에서 요구될 것이다.


기술은 습득하는 동시에 그 실행에 있어서의 긴장이 느슨해진다. 긴장이 저하하는 이유는 그 과제가 한정되고 있어서 시작으로부터 도달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오랜 시간적 과정을 거치는 손의 창조는 최후까지 기장하게 된다. 그 이유는 항상 결과에 주의하면서, 그것이 의미가 있는 과제에 대한 해답인 것인가 아닌가를 확인해야 하는데 있다. 반대로 예술적인 기량의 습득과 함께 긴장이 높아지는 것도 있다. 그것은 인식이 세심하게 되어 과제가 보다 어려워져 오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결과를 보고 창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를 확인하는 것은 인간의 창조가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성격을 뜻하고 있다. 이러한 성격은 ‘발견’을 의미하는 invention이란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발명’이라고 번역되지만, 프랑스인들은 인간의 창조를 가리키는데도, cration (신의 창조만을 향해서 이용한다)과는 구별해서 이 단어를 이용하고 있다.
그 해결이 지금 과제가 의미있는 것이라는 인식은 명증적인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예전에 경험한 적이 없는 새로운 경지에 들어갔다고 하는 반응보다 생생한 명증성이다. 그 새로움은 조만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한 후에도 신선함이 존재한다. 그것은 인간의 제작활동에 있어서의 절대적인 평균치라고도 하는 존재를 시사하고 있다. 벨까지는 기술적인 반복 실현하는 것이 가능해도 그것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영감을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혹은 은혜와 걸출한 능력에 뒷받침할 수 있었던 긴장이 필요하다. 이 경계선이야말로, 베토벤의 작품과 그 양식을 모방한 학생의 습작이나 컴퓨터에 의한 시뮬레이션(simullation)을 분류하는 것이다. 이 절대적인 기준을 초월하는 진정한 창조는 그 새로움의 명증성에 있어서 작자도 놀라게 하는 아름다움으로서 현상(現象)해 온다.